국내 최대 사학으로 비리가 끊이지 않아 학내 구성원과 갈등을 지속했던 선인학원은 1994년 시·공립화 됐다. 선인학원이 한때 거느린 학교는 14개교, 그곳에 다닌 학생이 3만6400여 명, 교직원이 1만4000여 명에 달했다.1980~1990년대 인천은 '노동자의 도시'로 불렸다.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이 많았던 인천엔 맞벌이 부부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맞벌이 부부 자녀들이 다닌 학교의 상당수가 선인학원 수중에 있었다. 이로 인해 인천 교육은 추락했다. 선인학원이 지금까지 그대로 존치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 기자말학생들의 참여 없이 교수나 교사·직원만의 힘으로 학교법인 이사회 퇴진 등 학교 정상화를 목표로 한 투쟁이 성공을 거둔 경우는 일찍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선인학원 정상화 투쟁은 초창기에는 학생들이 앞에 서고, 교수와 직원이 뒤에 선 모양새였다. 나중에 교수협의회와 교사협의회가 꾸려지면서 교수와 교사들은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학원 정상화 투쟁 초창기, 교수들은 학생들과 함께하는 걸 꺼려했다. 학원이 이미 국가에 헌납됐고 정부의 기본 입장은 건전한 사학으로 육성하는 것이므로, 정부 책임자들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만 한다면 근본 대책을 세울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과 기대가 지극히 순진하고 어리석은 것임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91년, 학생들은 나름대로 학원 민주화 투쟁을 전개했고, 교수협의회와 교사협의회는 각자 위치에서 학교법인 정상화와 대 정부 청원운동 등을 전개했다. 주체들이 개별적으로 대응할 뿐, 공동의 이해와 요구를 모아 함께 싸우지는 못했다.
나아가, 인천 최대 사학으로 분쟁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지역의 민주세력과 연대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선인학원 설립자 백인엽은 교수들이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통제했다. 대부분의 교수는 생활근거지를 서울에 뒀다. 돈벌이 수단 성격이 강하다 보니 인천지역 현안이나 사회활동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교수들은 지역사회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정부 해바라기'처럼 정책 결정자들과의 협상에 집중했다.
목요회·전교조와 만남그러다 목요회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인천지부가 선인학원과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했다.
목요회는 인천지역 종교인·교수·변호사·문화예술인 등 전문 직종에 종사한 인천 출신들이 중심이 돼 1989년 창립한 단체다. 이 목요회에 인천대 교수협의회의 핵심인 강광(미술학과)·윤용만(경제학과)·윤찬원(국민윤리학과) 교수 등이 회원으로 참석했다. 이들은 목요회에 선인학원 사태의 과정을 알렸고, 목요회 다른 회원들은 선인학원 사태의 심각성을 지역에 적극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전교조 인천지부도 하나의 창구였다. 선인학원 내 초·중·고등학교 교사협의회 소속 교사이면서 전교조 활동을 한 교사가 많았다. 이들의 입으로 선인학원 사태의 진행과정이 상세히 지역 사회에 퍼지기 시작했다. 지역사회는 선인학원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학교 주체들이 학원 민주화를 절실하게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1991년 12월 16일 인천대 교수협의회는 '장석우 교수 징계 회부'에 항의하기 위해 긴급 비상총회를 열었다. 이 총회에 목요회 이진 목사와 정희윤 간사가 참석하면서 자연스럽게 인천대 교수협의회와 지역사회가 만나기 시작했다.
장 교수는 1992년 1월 초 파면 조치를 당했다. 그리고 10여 일 후 범선인학원정상화추진위원회 활동을 함께한 이세영·장재선 교사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대량 징계와 이로 인한 학내 갈등이 예상되자, 뜻 있는 지역인사들 사이엔 '교수와 교사들의 대량 징계를 막아보자'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다.
드디어 1992년 1월 20일, 인천 중앙감리교회에서 '선인학원 사태를 우려하는 인천시민의 모임(아래 선인학원시민모임) 준비위원회'가 결성식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은 인천대 교수협의회가 철야농성을 도입한 이후 한 달 남짓한 시기였으며, 징계 파동이 선인학원 내 중·고교 교사에게 확산되기 시작한(1월 14일) 이후 6일만이었다.
이날 결성식에 1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선인학원 정상화 없이는 인천 교육의 질적 향상을 기대할 수 없고, 선인학원은 11년째 비정상적 상태로 방치돼 있다"라고 한 뒤 11년째 파행으로 운영돼 인천 교육의 암적인 요소인 선인학원을 정상화하기 위해 지금이라도 인천시민 전체가 직접 발 벗고 나서서 선인학원의 정상화를 촉구하는 시민운동을 전개한다는 등의 '선인학원 정상화를 위한 입장'도 발표했다.
최원식(국문과) 인하대 교수가 '선인학원 시민모임'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여기에 이후 인천의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인사가 대거 참여했다. 김병상 신부, 김성복 샘터교회 목사, 문병호 변호사, 엄종희 한의원 원장, 홍미영 의원, 홍학기 원장, 이진 목사, 진영광 변호사 등이 참여했다. 인하대에선 최 준비위원장 이외에도 김영규·김종길·김진우·윤영천·이계진·이정용 교수 등이 참여해 힘을 보탰다.
'선인학원 시민모임'은 선인학원 정상화를 위해 공개적으로 활동하겠다고 선언했다. 선인학원 정상화 방안 모색을 위한 인천시민 공청회 개최와 선인학원 정상화 촉구를 위한 인천시민 10만인 서명운동 전개 등이었다.
'선인학원 시민모임'의 출범을 계기로 선인학원 민주화 투쟁은 새로운 상황을 맞이했다. 학생·교수·교사들의 투쟁이 학원이란 울타리를 넘어 지역사회와 호흡하면서 시민운동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선인학원 시민모임'은 1992년 1월 31일 인천 중구 소재 섭리회 수녀회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선인학원 시민모임' 회원뿐 아니라, 인천대 교수협의회 소속 교수와 교사협의회 소속 교사, 인천대 총학생회 간부, 전교조 인천지부 간부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1992년 선인학원 정상화를 위한 투쟁의 기본 방향과 골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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