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웅전 하동 쌍계사 대웅전.
대웅전하동 쌍계사 대웅전. ⓒ 정도길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수십 년 세월이 지난 뒤, 처음으로 만나는 동창이 있다면 쉽게 알아 볼 수 있을까. 그것도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던 동기생이라면 첫 눈에 알기란 쉽지만은 않을 것만 같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음을 이번에야 알았다.

6월 27일 이른 아침. 경남 하동에 자리한 쌍계사로 들어가는 길목 풍경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며칠 전 내린 비 때문인지 매표소 입구 바위틈엔 시원한 물줄기로 작은 폭포가 생겼다. 이 모습 또한 전혀 떠오르지 않음은 물론이다.

추억 쌍계초등학교 안내판에서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추억쌍계초등학교 안내판에서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 정도길

장마철이라 후덥지근한 날씨지만 숲 속 길은 시원함이 가득하다. 매표소를 지나니 작은 간판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진한 주황색을 칠한 바탕에는 '쌍계초등학교'라 쓰였고, 간판 위는 '학교 종이 땡땡땡'을 상징하는 종 하나와 남녀 아이들로 보이는 철 조각품을 올려놓았다.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춘 작품의 신선함이 느껴진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 이런 앙증스런 작품을 구경했는지는 모르겠다. 이 역시도 기억이 나지 않는 현상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작은 것 하나에서도 추억을 찾아내어 회상에 잠겨 보는 것도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함이 아닐까.

일주문 하동 쌍계사 일주문.
일주문하동 쌍계사 일주문. ⓒ 정도길

'삼신산쌍계사'라는 편액을 건 일주문. 앞쪽 '외청교'라는 다리와 조화를 이룬다. 지붕은 여덟팔자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팔작지붕'으로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되는 다포형식이다. 처마가 매우 화려하고 공포로 꽉 차 있는 느낌으로 목조건축의 아름다움을 맘껏 뽐내는 듯하다.

기둥 앞뒤에는 보조기둥을 만들어 지붕을 안전하게 지탱하게 했고, 머리 부분에는 연꽃무늬를 장식하여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상징성을 더했다.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은 사찰의 전통적인 가람배치 형식을 띠고 있다. 극락이 있는 천상으로 가는 이 길 하늘에는 오색 연등이 걸려 세상에 축복을 내려주고 있다.

여행에서 얻는 즐거움이란,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는 것

구층석탑 하동 쌍계사 구층석탑.
구층석탑하동 쌍계사 구층석탑. ⓒ 정도길

천왕문을 지나 계단에 올라서면 하늘 높이 솟은 탑이 웅장하다. 팔영루 앞에 우뚝 선 구층석탑 앞에는 석등 두 개가 양쪽에 섰다. 이 탑은 1990년 건립됐으며, 국보 제48호 '평창 월정사 구층석탑'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8각의 2층 기단 위에 9층의 탑신을 세웠고, 석재로 만든 상륜부는 화려한 장식으로 마무리했다. 가볍게 들려있는 옥개석 모서리에는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다.

바람 부는 날 수많은 풍경이 내는 소리는 어떤 느낌으로 가슴에 메아리쳐 와 닿을까 궁금하다. 이 탑 안에는 스리랑카에서 모셔왔다는 석가모니 진신사리 3과, 산내 암자인 국사암 후불탱화에서 출현한 부처님 진신사리 2과 그리고 전단나무로 만든 부처님의 일위를 모셨다고 한다. 이 탑이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이다.

삼신산 쌍계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다. 신라 성덕왕 21년(722) 대비, 삼법 두 화상께서 선종의 6조인 혜능스님의 정상을 모시고 귀국, "지리산 설리갈화처(눈 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 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이곳을 찾아 절을 지은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전한다. 쌍계사는 우리나라 8대 총림 중 하나다. '총림'이란, '승속이 화합하여 한 곳에 머무름이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총림은 승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 염불수행을 전수하는 염불원의 시설을 갖춘 사찰을 말한다. 쌍계사는 국보 제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를 비롯하여 보물9점(제380호, 제500호, 제925호, 제1364호, 제1365호, 제1378호, 제1695호, 제1696호, 제1701호) 등 국가지정 문화재 10점과 지방지정 문화재 20점 등 총 30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산내 암자로는 칠불암, 국사암, 불일암, 도원암 등이 있다.

삼층석탑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삼층석탑.
삼층석탑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삼층석탑. ⓒ 정도길

대웅전 앞마당에 올라서니 경내에는 맑은 소리가 절간에 가득하다. 목탁소리는 사방팔방 소용돌이치고, 스님의 불경소리는 청아함의 극치에 이른다. 넋이 나갈 지경이다. 지금까지 이처럼 맑고 고운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던가. 풍경소리도, 새소리도, 계곡의 물소리도, 이처럼 아름답게 들은 기억이 없다. 혼이 빠져 발길 따라 움직였다. 소리가 탄생한 곳은 대웅전 법당이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법당 안으로 발을 디뎠다. 이런 분위기에 숙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부처님 앞에 서면 왠지 작아지는 나를 보게 된다. 세상 밖에서도 나를 낮추고 작게 만들어야 진정한 불자가 아닐까. 그러나 나 역시도 세상으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허물로 가득한 중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수행정진은 끊임없이 이어가야만 한다. 쌍계사 대웅전은 중앙에 석가여래를 비롯하여, 7불·보살이 자리한다. 오른쪽으로부터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보현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약사여래 그리고 일광보살이 세상을 비추고 있다. 힘겨운 108배는 '나를 낮추겠다'는 일념으로 시작과 끝을 맺었다.

108배 하동 쌍계사 대웅전에서 108배를 올리고 25번째 염주 알을 꿰었다.
108배하동 쌍계사 대웅전에서 108배를 올리고 25번째 염주 알을 꿰었다. ⓒ 정도길

기도를 마치고 스님께 두 손 모아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스님, 너무나도 맑고 깨끗한 목소리의 울림이 나의 몸에 층층이 끼어 있는 더러운 때를 말끔히 씻겨 주었습니다."

스님도 함박웃음으로 합장 기도하며 공덕을 베풀어 주었다.

쌍계사 사시불공에는 특별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다녀 본 사찰에서의 사시불공은 대개 대웅전에서만 하고 있었는데 반해, 쌍계사에서는 같은 시각 명부전, 나한전, 화엄전에서도 예불이 진행되고 있었다. 각 법당마다 올리는 기도와 명호는 다르겠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마음 자세는 똑같은 일념이리라.

쌍계사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 소박한 모습의 마애불, 탑, 석등

금강계단 하동 쌍계사 대웅전 뒤에 자리한 금강계단.
금강계단하동 쌍계사 대웅전 뒤에 자리한 금강계단. ⓒ 정도길

대웅전 뒤편 언덕에 자리한 금강계단. 석종형 부도로, 겉으로 봐서도 세월의 흔적이 느끼지 않을 정도로 최근에 조성한 듯하다. '금강계단'이란, '불사리를 모시고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곳'이란 뜻이다. '금강보계'에서 유래된 말로 금강과 같이 보배로운 '계'라는 의미다.

금강계단에는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그래서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대표적인 곳이 통도사 금강계단이다. 그러고 보니 쌍계사 금강계단이 어디서 본 듯한데, 알고 보니 통도사 금강계단과 많이 닮은 느낌이다. 원형의 탑 사방에는 범종에 새기는 비천상이 양쪽으로, 다른 양쪽으로는 연꽃무늬 형상 등이 조각돼 있다.

마애불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불.
마애불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불. ⓒ 정도길

쌍계사는 국보와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와 지방문화재가 많이 있다. 전각과 탑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는 것도 여행의 재미를 보태준다. 지장전 옆에 자리한 '하동 쌍계사 마애불'(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은 보는 순간 웃음이 절로 난다. 부처상이라기보다는 승려에 가까운 소박한 모습이다. 고려시대 것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대웅전 앞마당 우측에 자리한 삼층석탑도 아기자기한 재미를 더해준다. 이 또한 소박한 서민의 모습이 물씬 풍겨난다. 정교함도, 작품성도, 예술적인 감각도 없어 보이는 이 탑은 일반 탑과는 달리, 그 크기도 작아 마치 애기 탑처럼 느껴진다. 서쪽에 있는 석등 또한 단출하다. 이 석등은 화사석(등불을 놓는 돌)과 옥개석(지붕돌)이 없어 원형을 알기 어렵다. 홀쭉한 팔각형 기둥에 단순한 형태의 석등에서도 소소한 재미를 느낀다.

금당 금당 가는 길. 조금 올라서 오른쪽으로 가면 불일폭포로 가는 길이다.
금당금당 가는 길. 조금 올라서 오른쪽으로 가면 불일폭포로 가는 길이다. ⓒ 정도길

금당으로 오르는 길, 108계단에 섰다. 금당은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이라 들어갈 수가 없다. 여기서 국사암까지는 0.5km, 불일폭포까지는 2.3km. 시간만 넉넉했더라면, 세월을 노래하며 폭포에 올라 온 몸으로 떨어지는 물을 받았으리라. 마음의 때도, 육신의 때도 씻어버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계곡을 끼고 자라는 대숲에서 바람이 분다. 대나무 숲에서 부는 바람, 그래서 '죽풍'이다. 내 블로그 <안개 속에 산은 있었네> 닉네임이기도 하다.

대숲 대숲에서 부는 바람이 좋다.
대숲대숲에서 부는 바람이 좋다. ⓒ 정도길

대숲에서 부는 바람은 어떤 바람으로 사람에게 전해질까. 시원할까, 냉기 스린 찬바람일까, 향기로울까, 코를 찌르는 악취 나는 바람일까. 나는 어떤 바람으로 타인에게 전해질까, 나를 돌아본다. 짜증나기 쉬운 이 여름날 만큼, 시원하고 향기 나는 바람으로 다가가고 싶다. <108산사순례> 그 스물다섯 번째 기도여행, 쌍계사에서 25번째 염주 알을 꿰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 <안개 속에 산은 있었네>에도 싣습니다.



#쌍계사#금강계단#대숲#죽풍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알찬 여행을 위한 정보 제공과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