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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 'Wasch Wasch FEST-빨래 프로젝트'는 베르나우(Benau) 문화부와 베를린예술대학 Art in Context연구소의 주최로 필자가 독일에서 2015년 6월부터 9월까지 진행하는 참여형 예술프로젝트다.

이번 공공미술 'Wasch Wasch FEST-빨래 프로젝트'는 '불안'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올해로 분단 7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과 통일 25주년을 맞이하는 독일 사이에 어떠한 역사적 간극이 존재하는지,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전쟁 이후 과연 독일과 한국 사람들의 삶은 어떠한지 베르나우 지역주민들과 예술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 과정을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나누고자 몇 회에 걸쳐 게재하려 한다. - 기자 말

 베르나우에 위치한 육군의류보급군사시설 입구에 '위험! 출입금지, 통행금지!'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베르나우에 위치한 육군의류보급군사시설 입구에 '위험! 출입금지, 통행금지!'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 권은비

여기, 유령이 나올 법한 거대한 군사기지가 있다. 지도에서 이곳을 찾을 수 있는 정확한 주소 따윈 없다. 지역주민조차 이 군사지역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한다.

약 6만5000㎡, 총 8동으로 이루어진 이 붉은 벽돌의 군사단지는 1939년부터 독일나치군의 군복을 생산하던 군사단지였다가, 1945년 소비에트 연방의 점령 이후 육군보급품 생산 및 군복 세탁을 했던 군사기지였다. 독일이 분단되었을 때 소련군의 점령지역에 속했던 동독지역의 베르나우는 독일이 통일을 이루면서 자동적으로 소비에트군대가 철수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1994년, 이 소비에트 육군군사보급기지는 완전 폐쇄되었고 11년 동안 더 이상 사람이 존재하지 않은 이 공간을 각종 이름 모를 들풀과 꽃, 나무들 그리고 야생동물들이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2015년, '위험! 군사시설 출입금지, 통행금지!'라고 적혀있는 푯말과 함께 굳게 닫혀있는 철문이 열렸다.

 베르나우에 위치한 소비에트 육군군사보급기지 내·외부 풍경
베르나우에 위치한 소비에트 육군군사보급기지 내·외부 풍경 ⓒ 권은비

지역시민단체가 제안한 공공미술

사람들로 하여금 잊힌 이 거대한 군사단지가 올해 개방된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베르나우 지역주민들로 결성된 한 비영리단체 판케 파크 시민협회(Panke Park e. V) 덕분이다.

신학자이자 훔볼트 대학 교수였던 칼텐보른 박사(Carl-Jürgen Kaltenborn)를 중심으로 조직된 판케 파크 시민협회는 버려진 공간이나 다름없었던 이 군사기지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역사 아카이브와 생태, 문화, 건축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치시대부터 분단의 시대까지의 역사를 머금은 이 공간은 별다른 대안이라고 할 것도 없이 소유권이 대형 토지 자산관리 회사에 넘어갔고, 그저 어디서나 볼 법한 주택단지로 쓰이기로 계획이 되어있는 상태다. 몇 십 년에 걸쳐 이 역사적 공간이 방치되어 있었지만 약 6만5000㎡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에 대한 지역주민의 관심은 아직 부족한 것이 현실이었다.

그리하여 판케 파크 시민협회의 제안으로 11년 동안 버려졌던 공간에 대해 다시금 다양한 역사적 사유를 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이번 공공미술프로젝트가 기획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대개 지자체나 문화재단을 통해 실행되는 공공미술의 구조와는 조금 다르다 할 수 있겠다.

 판케 파크 시민협회가 모아놓은 과거 소비에트 육군군사보급기지의 역사적 자료
판케 파크 시민협회가 모아놓은 과거 소비에트 육군군사보급기지의 역사적 자료 ⓒ 권은비

냉전의 역사가 과거형인 독일 그러나 한국은 현재진행형

베르나우(Bernau)는 베를린에서 불과 약 6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베를린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아기자기한 집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고 거리에서 외국인들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한데 어쩐 일인지 베르나우 곳곳에선 독일 군인들의 기념비보다 소비에트군인들의 묘비나 기념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5년 4월 20일 이른 아침, 이른바 '붉은 군대' 소비에트 연합군들이 베르나우를 뒤덮기 시작한다. 베르나우 지역주민들 중에는 아직도 이날을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군사기지 건물 내부에서 발견 할 수 있는 과거의 흔적
군사기지 건물 내부에서 발견 할 수 있는 과거의 흔적 ⓒ 권은비

자신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독일의 동쪽에 산다는 이유로 소비에트 군인들의 일시적 통제를 받은 사람들, 그리고 어느 순간 공산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로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베르나우다.

이때부터 이곳의 가장 큰 나치의 군사기지였던 소비에트 육군군사보급품기지는 온통 빨간 색을 띠게 된다. 건물에 적혀 있는 러시아어 표지판도 빨간색, 주요한 시설들도 빨간색으로 칠해졌고 심지어 건물 내 안내판마저 빨간색이다.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무기와 군인을 찬양하는 식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프로파간다들의 발자취들은 치열했던 냉전의 역사가 무색할 정도로 보잘것없었고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이 군사기지에서 보이는 모든 것들이 냉전은 이미 일찍이 끝났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생각은 '한국은 아직 냉전 중이다'였다.

나는 분명 과거 냉전의 흔적들을 보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속으로는 현재 한국의 냉전 상태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이 느껴졌다. 이 거대한 붉은 벽돌 건물 안이 밖의 온도보다 훨씬 춥게 느껴진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방대한 군사기지 건물 내부는 공포영화를 찍어도 될 법한 풍경이다.
방대한 군사기지 건물 내부는 공포영화를 찍어도 될 법한 풍경이다. ⓒ 권은비

한국 미군기지 떠오르게 하는 베르나우의 소비에트 군사기지

내가 처음 이 군사기지에 방문했을 때 판케 파크 시민협회의 활동가인 융 한스씨를 만났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이 동그래지며 악수를 건네더니 곧장 묻는다.

"어디서 오셨어요?"
"Korea(한국)에서 왔습니다."
"아! Korea… 그럼 북쪽이에요 남쪽에요?"

나는 잠시 당황하다, 이내 대답했다.

"남쪽이요."

한국을 떠난 후 사람들로 하여금 매번 듣는 질문이지만 나는 아직도 '남한에서 왔습니다' 라는 말이 입에 붙질 않는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 수출 상품에도 'Made in Korea'라고 써 있지 'South korea'라고 적혀 있지 않은 것처럼, Korea앞에 남이냐 북이냐를 붙이는 것은 여간 어색한 일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융 한스씨가 말을 이어간다.

"하하 당신이 북한에서 오진 않았을 거라 예상하긴 했어요. 독일 사람들도 분단이 됐을 때, 독일에서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꼭 묻곤 했어요. 동쪽에서 왔는지, 서쪽에서 왔는지."

융 한스씨는 말을 마치자마자 분주하게 이곳 저곳을 안내하더니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며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건물 내부의 또 다른 공간
건물 내부의 또 다른 공간 ⓒ 권은비

"여기는 예전에 소비에트 군복을 만들던 곳이었지만 세탁공장이기도 했어요. 그때 소비에트 군대에서 화학 세제를 사용했었는데 그것이 지하수로 흘러 들어가서 이 군사 지역 일대의 물이 오염되어 버렸죠. 그때 당시에 오염된 물을 끌어올려서 정화하는 걸 아직까지 반복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꽤 많이 걸릴 것 같아요."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니 한국에 있는 미군기지들 생각이 안 날 수 없었다. 주한미군기지 내 환경오염에 대한 실태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 않은가.

순간 머릿속에 냉전의 역사 속, 한국과 독일의 과거와 현재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너무나도 다른 듯, 비슷하게 느껴졌다. 소비에트 육군군사보급기지의 안내를 했던 융 한스씨가 묻는다.

"이 곳을 둘러보니 뭐 좀 예술적 아이디어가 떠오르나요?"

나는 그저 씨익 웃어보였지만 머릿속에는 이미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이 곳에서 동네사람들과 빨래를 해야겠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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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시각예술가로 활동하다, 독일 베를린에서 대안적이고 확장된 공공미술의 모습을 모색하며 연구하였다. 주요관심분야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 공동체안에서의 커뮤니티적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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