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뜻대로 됐다.
입법취지를 위배한 정부시행령에 대한 수정·변경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한 국회법 개정안이 6일 국회 본회의에 재상정돼 '투표 불성립'으로 사실상 자동 폐기됐다. 대다수 새누리당 의원들은 거부권을 행사한 박 대통령의 뜻에 따라 재의결에 참석하지 않았다.
다만, '박심(박 대통령의 의중)'이 100% 실현된 것은 아니다. 박 대통령이 불신임을 표했던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회법 개정안 문제가 일단락된 만큼,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의 2차 사퇴 공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유 원내대표의 거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새누리당은 이번 국회법 거부권 행사 사태를 겪으면서 스스로 '청와대의 거수기'임을 입증했다. 더군다나 대통령이 친정의 원내사령탑을 찍어 누르는 형태의 결론이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오늘 국회의 결정은 헌법의 가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라고 짧게 논평했다.
이로써 새누리당이 10여 년 간 들어 올렸던 '원내정당화' 깃발은 사실상 갈기갈기 찢어졌다.
사무총장보다 '급' 낮았던 원내대표원내대표는 원래 '원내총무'로 불리웠다. 지금은 당대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당의 '투톱'으로 인정받지만 당시에는 아니었다. 사무총장·정책위의장과 함께 당 3역 중 하나였음에도 사무총장보다도 '급' 낮은 자리로 평가됐다. 그랬던 원내대표의 위상이 '국회 교섭단체의 대표의원'이란 본뜻에 걸맞게 격상된 건 사실상 10여 년 전이다.
이는 '1인 헌법기관'으로서 국회의원의 위상을 회복하는 길과도 같았다. 당의 유력 대권주자 1인에게 집중된 권한을 분산시키고 원내대표를 선출하는 의원총회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의원총회가 당의 주요 의사결정기구로 자리 잡으면서 국회의원 개개인은 당과 정파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소신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실제로 당 총재가 선임하던 원내총무를 의원총회에서 직접 선출하도록 바꿀 때 내세운 명분도 '권력분담론'이었다. 이회창 전 신한국당(현 새누리당) 총재는 1997년 9월 기자회견에서 이를 내세우면서 "원내총무를 의원총회에서 선출하는 등 경선제를 확대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선출방식만 아니라 원내총무의 권한도 점진적으로 확대됐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2002년 3월 의원총회가 국회 의장단과 상임위원장 선출권, 주요 쟁점법안에 대한 심의·의결권에 대한 실질적 권한을 갖도록 당헌·당규를 바꿨다. 즉, 당 소속 의원들을 이끄는 원내총무의 위상을 크게 강화한 셈이다.
한나라당은 1년 뒤인 2003년 당대표-원내총무-정책위의장의 '트로이카 체제'를 마련했다. 의원총회에서 선출되는 원내총무에게 국회운영에 관한 책임과 최고권한을 주면서 당대표가 다른 최고위원들과 '합의'를 거쳐 임명토록 한 정책위의장을 의원-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에서 선출토록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당대표 권한은 축소되고 상대적으로 원내대표의 권한은 확대됐다.
박 대통령이 처음 당대표를 맡았던 2004년 한나라당 첫 원내대표 경선에서 김덕룡 의원이 선출됐고, 2005년엔 지금의 '원내대표-정책위의장 러닝메이트제'가 도입됐다. 트로이카 체제가 원내대표에게 보다 힘을 몰아주는 투톱 체제로 바뀐 것이다. 점진적으로 진행됐던 '원내정당화'가 제대로 꽃 피웠다고도 볼 수 있다.
심지어 이는 현재의 야당, 새정치민주연합보다도 진일보한 원내정당화 시스템으로 평가할 수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전신인 열린우리당은 원내대표에게 정책위의장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부여했지만 몇 차례의 혼란을 겪은 뒤, 당대표가 정책위의장을 인선하는 방식으로 회귀했다.
10년 전 '원내대표-정책위의장 러닝메이트제' 도입했지만...무엇보다 박 대통령 역시 이 같은 원내정당화에 힘을 실었다. 2003년 6월 발족한 '정치개혁 및 당 쇄신을 위한 모임'이 대표적이다. 박 대통령도 원내·외 위원장 30여 명 중 한 명으로 이 모임에 참여했다. 이들은 발족 선언문에서 "지역적 지지기반과 기득권에 안주하는 구태 정치로는 우리 당에 미래가 없다"라며 ▲ 지구당 위원장의 기득권 포기 ▲ 국민참여형 상향식 공천 ▲ 중앙당 간소화 및 원내·정책정당화 등을 촉구했다.
2003년 한나라당 상임운영위원회에서 "한나라당도 원내정당화, 정치자금 투명화, 지구당 폐지 등 정치개혁 과제에 대해 과감한 발상의 전환으로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오세훈 당시 상임운영위원의 주장을 거든 것도 박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은 당시 "내년 총선은 어떤 정당이 공천에서 신선한 모습을 보여주느냐의 경쟁이 될 것"이라며 "당의 최우선 순위는 정치개혁 정당개혁이고, 신선한 총선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문했다.
2005년 '원내대표-정책위의장 러닝메이트제' 도입 당시 당대표도 박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은 당시 대표자대회에서 "지속적으로 변하고 더 개혁해야 한다"라면서 "혁신안에 따라 당헌을 고치고 새롭게 출발하려 한다, 더 민주적이고 더 효율적으로 다가가는 정당으로 가려고 한다"라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이보다 앞서 당대표에게 권한을 집중하는 것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대했다. 박 대통령은 2002년 2월 이회창 당시 총재와 신경전 끝에 한나라당을 탈당하며 "제왕적 1인 지배 정당을 종식하지 않고서는 정권 교체를 해도 의미가 없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와 함께 유 원내대표를 공개적으로 '비토'하면서 앞서 자신이 제기했던 '원내정당화'를 스스로 부정했다. 과거 집권여당 대통령으로서 당 총재를 겸임하며 원내총무를 지휘하던 식으로 유 원내대표를 청와대의 '졸'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공교롭게도 당대표 재임 당시의 '말'과 달리 원내대표들과 갈등을 빚은 당사자이기도 하다.
김덕룡·강재섭 당시 원내대표는 국가보안법 등 4대 법안을 둘러싼 대여협상, 사학법 장외투쟁 국면 등에서 박 대통령과 갈등을 일으키며 중도 사퇴했다. 만약 유 원내대표가 이번에 사퇴를 택한다면 10년 만에 박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원내대표가 자진사퇴하는 경우가 또 발생하는 셈이다.
박 대통령은 이후 원내대표들과도 그리 편하지 않은 관계였다. 강재섭 원내대표 사퇴 이후 비박(비박근혜) 성향의 이재오 의원이 당시 박 대통령의 지원을 업은 '친박' 김무성 대표를 꺾고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그 뒤를 이은 사람도 비박 성향의 김형오 전 의원이었다. 그 이후도 오랫동안 박 대통령은 원내대표 '덕'을 보지 못했다. 2011년 김무성 대표가 원내대표로 선출됐지만 이는 박 대통령의 반대를 무릅쓴 결과였다.
"2004년 당대표 땐 정당민주화 기여했다는 평가 받았는데..."
이에 대해 김민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이날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유승민 원내대표 전후만 비교해도 그동안 청와대가 얼마나 불편했는지 드러난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유 원내대표의 전임인) 이완구 전 원내대표 때만 하더라도 김재원 당시 원내수석부대표 등을 통해 청와대가 일을 같이 할 수 있었다"라며 "김무성 당대표도 입법 관련 정책 사안은 원내대표의 사안이라고 일임해 이 전 원내대표가 (원내를) 장악할 수 있었다"라고 지적했다.
즉, 박 대통령이 여당 원내대표를 국정운영의 '도구'로 활용해오다가 유 원내대표 취임 이후 그 민낯을 드러내게 됐다는 설명이다.
특히 김 교수는 박 대통령의 '원내정당화'·정당민주화' 기치가 2012년 비상대책위원장 취임 이후부터 사실상 변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그는 "2004년 당대표 당시 총선 비례대표 의원 공천에도 거의 개입하지 않았고 2006년 지방선거 때는 당시 열린우리당보다 많은 경선을 치렀다"라며 "그 같은 박 대통령의 행보는 정치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가 민주주의를 탄압했지만 그 딸은 정당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얘기를 할 정도였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런 행보가 2012년 비상대책위원장 취임 이후 자기 사람을 심거나 다른 진영 사람을 쳐내는 식으로 바뀌었다"라며 "2007년 경선 실패와 2008년 친박 붕괴 등이 원인이었는지 모르겠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