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시 옥구농공단지 소재 친환경 생활 용품 제조 업체인 아주실업 성광문(65) 회장. 그는 군산인쇄소와 <군산미래신문> 회장을 겸하고 있으며, 더불어 다양한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달 20일 그를 인터뷰했다.
성 회장은 산수(山水)가 뛰어난 전북 진안이 고향이다. 1982년 군산인쇄소 대표로 사업가(CEO)의 길을 걸었다. 1985년 지장회에 입문하고 군산불교 청년연합회장이 되면서 적극적으로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인도의 마트마 간디의 말을 인용, "보상을 구하지 않는 봉사는 남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행복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봉사는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지금이 기회"라고 덧붙였다.
장애인 일자리 창출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가 경영하는 아주실업은 여성가족부로부터 여성 친화 기업으로 인증 받았으며, 직원의 40%가 장애인이다. 창업 때부터 계획했던 것은 아니고,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소개로 2명을 고용하고 조금씩 체계적으로 늘렸다. 이후 전국 장애인 사업장으로 선정되면서 정기적으로 채용하게 됐다고 한다. 그의 꿈은 장애인이 능력껏 일하면서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지난 4월에는 국제 와이즈멘 클럽(Y's Men Club) 한국 지역 제5대 총재에 취임했으며, 법무부 교정위원 중앙협의회 회장도 맡고 있다. 그가 대표로 몸담았거나 현재 활동 중인 민간 단체와 봉사 단체는 군산 경실련, 재단법인 환경사랑, 군산성폭력상담소, 북한이탈주민지원 지역협의회, 사단법인 아름다운 가게 전북 공동대표 등 스무 개가 넘는다. 그는 "50대까지만 해도 봉사 활동을 선거 출마를 위한 사전 작업쯤으로 의심 받았는데, 예순을 넘기면서 오해가 풀렸다"며 허허 웃는다. 다음은 성 회장과의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전국 장애인 표준사업장'으로 지정받아
-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나?"새벽 5시에 일어나 걷기 운동을 1시간 30분쯤 한다. 전에는 은파호수공원 산책로를 돌았는데, 요즘엔 경암동 강변 로터리에서 강심을 따라 철새 조망대 방향으로 걷는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실컷 들여 마시고 집에 오면 지장 부처를 모신 2층의 작은 기도방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예불)를 드린다. 3배를 하면서 어제를 감사드리고 오늘도 어제처럼 건강하고 유익하게 지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 아주실업 창업 시기와 생산 제품 종류, 규모 등이 궁금하다. "군산인쇄소를 운영하면서 제품을 (주)옥시에 납품을 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1991년 가내 수공업으로 출발했다. 1996년 (주)애경산업으로 거래처를 바꾸고 이듬해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에 있는 농공 단지로 확장 이전했다. 지금은 제1공장, 제2공장을 갖추고 방충제, 세정제, 방향제, 소취제(냄새 제거) 등 실생활용품 130여 종류를 생산하고 있다.
10년 전부터 수출도 해오고 있다. 처음엔 일본 시장을 개척했고, 수출량이 꾸준히 증가해 시장을 유럽으로 확대했다. 2009년 1백만 불 수출, 2011년 3백만 불 수출을 달성했다. 작년에는 5백만 불 수출을 목표로 세웠는데 아깝게도 460만 불에서 그쳤다. 요즘 판로는 일본 30%, 애경산업 납품 33%, 나머지 37%는 수출과 내수로 나뉜다. 이 모두가 품질 관리, 납기 준수, 노사가 한마음 한뜻으로 가족처럼 뭉치는 화합의 열매가 아닌가 싶다."
성 회장은 "제1공장 부지는 주변에 저수지도 있고, 나지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등 풍광이 뛰어나 노후에 아내와 텃밭도 가꾸면서 조용히 지내려고 30년 전에 장만했는데, 새로 시작한 사업이 예상외로 큰 수익을 내고, 이곳에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울며 겨자 먹기로 용도를 바꿨다"면서 "세상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라고 말했다.
- 아주실업은 '전국 장애인 표준 사업장'으로 지정받기도 했다. 어떻게 장애인을 고용하기 시작했나?"외환 위기로 모두가 어려웠던 1998년부터다. 그해 가을 군산명화학교 교장에게 지체 장애인 두 명을 고용해달라는 부탁받은 게 계기가 됐다. 그때 고용한 남자 직원은 지금도 근무하고 있다.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은 직원 60명 중 24명이 장애인이다. 앞으로 계속 늘려갈 방침이다."
- <군산미래신문>은 언제 어떻게 창간하게 됐나?"1996년 4월 <진포신문>으로 창간했다. 처음엔 지인의 권유로 이사로 들어갔다. 그런데 3개월쯤 지나 대표 발행인이 못하겠다며 그만 두는 바람에 엉겁결에 대표를 맡게 됐다. 당시엔 지분을 100% 소유하고 있었는데, 2006년 주식회사 <군산미래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70%를 지금의 대표, 부사장, 편집국장 등에게 나눠주고 나는 30%만 가지고 뒷전(회장)으로 물러나 있다. 현 제작진이 도내에서 손꼽을 정도로 운영을 잘하고 있어 든든하다."
탈북 새터민 부부 합동결혼식 주례, 기억에 남아
- 학창 시절 성광문은 어떤 학생이었나?"타고난 성격이 적극적이었다고 할까, 4H 운동도 리더를 맡는 등 자그만 일에도 정성을 다하고, 앞장서는 스타일이었다. 어려서부터 체구가 커서 그런지 시비를 거는 친구도 없었다. 그 덕에 급우들과 싸움한 번 해보지 않았다. 나는 인덕이 있는 것 같다. 학창 시절 좋은 친구도 많았고, 금방 깨질 것 같았던 모임도 가입하면 다시 활기차게 살아나고...(웃음)"
- 봉사 활동에 관심 있는 분들을 만났을 때 인용하는 격언이나 사자성어는? "어려운 사자성어나 격언보다 현장에서 겪은 경험담과 평소 가슴에 담고 있는 나의 생활 신조를 얘기해준다. 특히 '돈을 좀 더 많이 벌고, 시간이 나면 봉사를 하겠다'는 분들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 젊은 날의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듯, 봉사도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좋은 찬스를 놓친다고..."
- 많은 사회 봉사 단체를 이끌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 활동은?"군산에 정착해 살면서 경제적 사정으로 혼례를 치르지 못한 탈북 새터민 부부 4쌍의 주례를 섰던 일을 잊지 못한다. 그들에게 합동 결혼식 비용과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우리 회사 직원으로 채용해서 그런지 더욱 기억에 남는다. 북한이탈주민지원 지역협의회에 참여한 것도 생활이 어려운 새터민을 돕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미래 통일을 선도할 소중한 자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법무부 교정위원으로 교도소 재소자들을 만나면서 가슴이 찡해졌던 경험도 있다.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 남자 중학생과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한 죄로 군산교도소에 들어왔다. 죄가 무거워서 그런지 누구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사연이 너무 슬프고 안타까워 외할머니를 설득 끝에 겨우 화해를 시켰는데, 면회하고 두 달 만에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그 할머니가 '여한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을 때 전율이 느껴졌다."
100% 협조해준 아내, 점수도 100점 줘야 공평해
- 30년을 꾸준히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언제, 어떤 계기로 시작했는지?
"일찍 철이 들었는지 30대 중반부터 시작했다. 1984년 겨울로 기억한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어느 날이었다.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설경을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절에 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때 은적사에 찾아가 대우 스님을 만나 보시(나눔)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게 계기가 됐다. 그 후 전북불교대학에 나가 이론 공부도 하고, 봉사활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 아내에게 점수를 준다면?"모기업(母企業)인 군산 인쇄소를 맡아서 운영하는 아내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크고 작은 봉 사단체 대표를 많이 맡았다. 그때마다 아내가 반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체 대표가 돼서 못 마시는 술도 마시고, 늦게 들어올 때도 있었는데, 왜 늦느냐고 따지거나 짜증을 내지 않고 이해해줬다. 내 활동에 100% 협조해줬으니 점수도 100점을 줘야 공평할 것 같다. (웃음)"
- 미래 꿈이나 계획이 있다면? "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공동 사업장, 즉 복지 시설을 만드는 게 가장 큰 소망이다. 1998년 장애인 직원을 처음 채용하고 조금씩 늘리면서 생긴 목표다. 우리 회사만 해도 24명의 장애인 직원이 근무하고 있는데, 그들이 그만두면 어디로 가겠나. 그들도 늙고 나도 늙는다. 남은 생애를 그들과 동행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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