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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교과서는 법이니까, 꼭 세 번은 정독해야 한다"고.

물론 어머니 말대로 세 번을 정독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교과서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그 중요한 교과서를, 아이들에게는 '법'과 같은 교과서를 왜곡한다고 한다. 식민지배와 위안부 문제를 왜소화하고, 아베 총리를 찬양하는 등 한국에서도 민감한 사안을 교과서에 싣는단다.

<오마이뉴스> 심규상 기자님께서 특명을 내려주셨다.

"일본 교과서 왜곡을 취재하고 오세요!"

<오마이뉴스> 대전·충청 대학생 실습기자가 된 내게 처음으로 떨어진 임무였다. 나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일본 구마모토로 떠났다. 충남의 시민단체들(아래 충남방문단)이 일본 구마모토를 3박 4일 일정으로 방문해 '역사왜곡 교과서 불채택'을 촉구하는 데 동행 취재를 맡았다. [관련기사 : "요새 일본 아이들, 침략전쟁 있었냐고 물어본다"]

"몸은 일본에 있지만, 마음은 한국에 있다"

"구마모토 교과서 네트워크"와 "충남방문단" 6일 저녁, 구마모토의 시민단체와 충남방문단이 환영간담회를 한 후 결의를 다지고 있다.
▲ "구마모토 교과서 네트워크"와 "충남방문단" 6일 저녁, 구마모토의 시민단체와 충남방문단이 환영간담회를 한 후 결의를 다지고 있다.
ⓒ 문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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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에서의 첫날 밤이었던 지난 6일, 충남방문단 구성원들은 한자리에 모여 결의를 다졌다. 그곳에는 방문 일정의 통역을 맡은 주영덕 선생님과 선생님의 딸 주선미양도 함께했다. 선미는 큐슈조선중고급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으로, 통일된 한국을 꿈꾸는 '조선인'이다.

방문단은 한 명 한 명씩 본인 소개를 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을 즈음, 선미 차례가 됐다. 그녀는 밝은 웃음을 지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런데, 당찬 목소리가 점차 떨리기 시작했다.

"저는 고향인 한국에 몇 번 가본 적 없습니다. 몸은 지금 일본에 있지만 언제나 마음은 한국에 있습니다. 언제나 고향 생각하며 일본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조선 사람으로서 자부심 갖고 당당하게 살아가자고 생각합니다."

참여정부 때만 해도 한국에 방문할 수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 이후 한국땅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땅이 됐다고 한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땅을 그리워하며 이방인으로서 일본에서 살아야 했던 서러움이 선미를 울렸을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그 날, 밝은 웃음 뒤에 가려진 그녀의 그늘을 볼 수 있었다. 얼마나 핍박당하며 살았을까. 방금 전까지는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하던 사람들도 그 순간만큼은 숙연해졌다.

"그러니까 여러분, 저희가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그녀의 자기소개가 끝난 후 이곳저곳에서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눈물을 닦았다. 번지르르하게 꾸민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담백하게 내뱉던 그녀의 진심은 통했다. 그녀의 눈물은 그동안의 역사에 대한 무지, 무관심을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교과서에 짧게 서술된 '숨겨진 역사들'

해방 이후, 일본에 있는 조선인들은 자신의 국적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한일 국교 수립 전에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남한의 국적을 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과 남한의 국적 중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재일조선인들은 자연히 무국적자, '조선인'으로 남게 됐다. 그리고 현재까지 조선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일본에 정착하게 된 조선인 역사의 기록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은 재일 조선인들의 역사를 인정하기를 거부했으며, 한국은 조선인들의 신념을 이해해주지 않았다. 또 공통적으로 양국 모두 조선인학교에 지원하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그들과 그들의 역사는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그냥 조선인일 뿐이었다.

부끄러웠다. 나는 한국사 자격증도 갖고 있었으면서, 이런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국을 생각한다는 선미를 보며 부끄러운 내 과거가 떠올랐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감사했고, 자랑스러웠던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나 역시 국가에 불만이 많은 청년 중 한 명이었다. 그래도 나는 대한민국의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었고, 나라의 보호를 받고 있는 국민이었다. 그러나 선미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조국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녀를 사랑해주지 않는 조국에 애정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사명감이 생겼다. 역사가 바로 잡혀 그들의 지난 역사와 신념을 인정받을 수 있기를 기도했다. 지금 당장 어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마는, 이번 나의 일본 방문이 앞으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에 일조할 수 있기를 그리고 앞으로 일본과 함께하게 될 재일조선인들의 역사 또한 교과서에 기술될 수 있기를 바랐다. 선미의 발언은 다시 한 번 내가 일본 구마모토에 온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구마모토 현청의 싸늘한 반응... 일본이 보였다

둘쨋날인 7일부터 충남방문단은 구마모토 지역 교육위원회 방문을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방문단들은 선미의 말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기록하고 낭독하는 등 각자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교육장들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진심이 통한다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그러나 셋째날(8일), 구마모토 현청에 방문했을 때서야 일본의 현실이 보이는 듯했다. 우리는 회의실 쪽으로 갔다가 사무실로 내려가야 했다. 회의실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어싿. 그래서 충남방문단은 넓은 사무실에서 요청서를 낭독해야 했다. 직원들이 모두 듣고 있는 넓은 공간에서 낭독했으니, 실리적인 측면에서는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구마모토 현청 사람들은 교과서 역사 내용 개정에 냉담한 모습을 보였다.

역사를 좋아하고, 열심히 배웠던 학생의 입장으로서 이런 일본의 행태를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자국의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고, '소설'을 쓸 거면 애초에 국사는 왜 배우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적어도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교과서에는 사실을 기록해야 하는 것 아닐까. 서로 다른 역사를 배우는 한일의 아이들 그리고 과거 일본에게 피해를 받은 타국의 아이들이 과연 서로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을까. 교육자들은 왜 아이들에게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면 된다고 가르치면서, 본인들은 잘못을 인정하거나 반성하지 않는 걸까.

어린이집에 다니던 시절, 바보같은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핏줄과 혈관은 같은 말인데, 친구는 핏줄이라고 주장하고, 나는 혈관이라고 주장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언성을 높였고, 서로를 바보라고 놀렸다. 둘 다 똑같은 말인데 우리는 서로가 배운 말만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혹시나 한·일 아이들도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 사실로 여기고 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공신력 1위'의 정보원이 아닌가. 자신의 부모님이 틀린 말을 해도 맞다고 우기는 아이들이 교과서 문제에서는 오죽할까 싶다.

미래 각국 아이들의 평화와 역사 때문에 피해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역사 왜곡과 교과서 문제는 꼭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옆 나라 일본에는 생업을 뒤로 하고, 역사 왜곡 문제에 발 벗고 나서는 사람들도 있다.

잊히지 않는 '선미의 눈물'

나흘 내내 비공식적인 자리에서까지 첫날 '선미의 눈물' 이야기가 나왔다. 모두가 얼마나 인상 깊게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끝까지 진지한 태도로 교류에 임했다. 미래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충남방문단과 구마모토 시민단체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힘을 합쳐 역사 왜곡과 교과서 문제를 꼭 해결해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역사, 위안부, 전쟁, 식민지….

사람들의 무관심과 역사의 기록 부재에 의해 잊혀졌지만,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우리 핏줄이 내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또 더 많은 우리 핏줄들이 고통 받을 지도 모른다.

한일시민단체(충남시민단체와 구마모토 시민단체)가 교류를 시작한지도 어느덧 18년.
우리는 지금 동부아시아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는 초행길을 걷고 있다. 당장 이번 일본 방문이 어떤 성과를 보일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하루빨리 역사 왜곡 문제가 해결돼 선미가 일본에 있는 동안 행복하기를, 그리고 지금보다 더 성숙해진 한국에 돌아올 수 있길 바란다.


#구마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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