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미디어 시대'라고 하지만, 텔레비전(TV)은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가진 매체 중 하나다. 그러나 사회적 의제를 제시하고 토론과 대안을 이끌어내는 '공론장'으로서의 기능은 많이 약해졌다.
방송사들이 수익과 직결되는 시청률에 목을 매면서, TV는 공동체의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기보다 더 많은 '오락'을 제공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 '퍼블릭 액세스(public access)' 운동은 이처럼 위축되고 있는 TV의 공론 기능을 되살릴 대안으로 눈길을 끈다.
퍼블릭 액세스는 대중매체로부터 소외된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직접 기획하고 제작한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활동을 말한다. 수동적 시청자였던 시민이 능동적인 생산자로 변모하는 게 핵심이다. 지난 6월 2일 서울 동교동 홍대입구역 부근의 비영리공공미디어센터 '미디액트'에서 퍼블릭 액세스 전문가 김명준(53) 소장을 만났다.
단편영화 만들던 공대생이 미디어운동 선봉장으로
"그때는 독립영화라는 말도 없었을 때고, 거칠게나마 진보적인 영화도 만들어보고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같은 것도 찍고 그랬죠."김 소장이 영상 관련 일을 시작한 것은 서울대 공대(81학번)를 다니며 교내 영화서클에서 활동할 때다. 단편영화 제작 등으로 영상의 세계와 인연을 맺은 그는 1994년 영화평론가 정성일과 EBS(교육방송) 영화전문프로그램 <시네마천국>의 작가로 일했고, 그 이듬해 영화잡지 <KINO(키노)>의 창간에도 참여했다. 또 노동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결성된 영상집단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제작, 교육, 연구와 국제연대 활동을 했고 한국독립영화협회(한독협)에서도 정책위원을 맡았다.
"퍼블릭 액세스와 관련한 정책을 주장하기 시작한 건 1994년쯤이었어요. 1998년에 창립한 한독협이 퍼블릭 액세스 활성화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을 계속 제출했죠. 거기서 제안했던 내용 중 하나가 미디어센터 설립이었어요."지난 2002년 '미디어로 행동하라'는 뜻으로 출발한 미디액트는 시민들의 후원과 참여로 운영되는, 아시아 최초의 공공영상미디어센터다. 일반인을 위한 미디어교육, 자율적인 시민영상제,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독립영화를 위한 창작지원, 영상제작교육과 장비지원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캐나다에서 시작된 운동, 미국 영국 등에서 1970년대 정착
퍼블릭 액세스의 역사는 1960년대 후반 캐나다에서 시작됐다. 몰락하고 있는 광산과 어촌 주민들이 지역 문제를 환기시키고 관계 당국과 대화를 모색하기 위해 비디오 제작 교육을 받고 빈곤 현실 등에 대한 영상물을 만들어 전파했다.
이런 운동은 미국으로 번지고 제도화했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1972년에 전미 상위 100위권 내에 있는 케이블방송 시설 가운데 가입자가 3500가구 이상인 경우, 여러 채널 중 1개는 퍼블릭 액세스 채널로 개방할 것을 의무화했다.
"미국은 케이블 방송의 특정 채널을 대중이 창작한 영상물을 방송할 수 있도록 개방해주고, 각 방송국이 시청자 제작에 필요한 기자재를 구비하고 있어요. 또 장비 사용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퍼블릭 액세스 시스템이 정착돼 있습니다. 저도 뉴욕에 갔다가 퍼블릭 액세스 관련 단체를 접하면서 조사를 했는데, 한국도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게 필요하겠다 싶었어요."우리나라에서도 지난 2000년 방송법이 개정되면서 퍼블릭 액세스가 법적으로 보장됐다. 김 소장과 같은 미디어 활동가들과 시민사회단체, 연구자들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거둔 성과였다. 공영방송사인 한국방송(KBS)은 2001년부터 '열린 채널'이라는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을 편성해 시민들이 직접 제작한 프로그램들을 방영하고 있다.
또 재단법인 시민방송(RTV)은 2002년 9월 위성방송 최초로 '퍼블릭 액세스 전문채널'로 개국했다. RTV는 시민들이 직접 방송 사업에 참여하는 비영리법인으로, 일반인들이 제작한 프로그램에 과감히 채널을 개방하면서 대안방송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퍼블릭 액세스가 법제화한 지 15년이 지나도록 그 활동상과 대중적 파급력은 미미한 게 현실이다. 김 소장은 방송통신위원회와 같은 규제기관과 지상파 방송사,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 등 플랫폼 사업자들이 퍼블릭 액세스를 적극적으로 끌고 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RTV는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정부 지원이 끊기면서 존폐 위기를 겪고 있고, KBS에 일반인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열린 채널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시청자도 많지 않다는 것이다.
"캐나다에서는 퍼블릭 액세스 활성화를 위해 영화진흥위원회가 적극적으로 나섰어요. 영국 BBC에서는 70년대에 이미 여러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그 당시 BBC PD들은 전국방송 시간대에 고정적으로 퍼블릭 액세스 프로그램을 배치하고 나름대로 제작지원 시스템을 운영하는 등 방송사와 싸워서 퍼블릭 액세스를 정착시켰어요. 시민들에게 방송 제작을 통한 표현의 자유를 주기 위해 PD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놓은 겁니다."약자들의 '작은 목소리'가 크게 들리도록
스마트폰의 대중화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유튜브(Youtube) 채널 등의 발달은 시민들이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기회를 확장시키고 있다. 김 소장은 이에 걸맞게 시민들의 권리 의식도 높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기가 뭔가를 표현할 수 있다는 인식의 수준은 높은데, 그것이 매우 중요한 권리이고 또 역사적으로 보장됐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은 낮은 것 같아요. 퍼블릭 액세스는 'Voice of the voiceless', 즉 목소리 없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갖도록 한다는 철학에서 출발했죠. 주류 미디어에서 소외된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인식할 때, 퍼블릭 액세스의 가치가 빛날 것입니다."김 소장은 현실적인 퍼블릭 액세스 실천 방안으로 시민들이 KBS '열린 채널' 등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하고, 방송통신위원회·한국콘텐츠진흥원 등 공공기관이 지원하는 시청자미디어센터, 영상제작교육프로그램 등을 활발히 이용할 것을 제안했다. 또 미디액트와 같은 전문적 조력자들의 지원도 적극 요청할 것을 권했다.
"누구든지 미디어를 통한 발언의 기회를 갖고, 주류사회의 잘못에 문제를 제기하는 시민사회가 이뤄져야 합니다. 시민들의 미디어 권리 확장이 민주주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하도록, 함께 고민하고 개척해나갔으면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이 운영하는 비영리 언론매체 <단비뉴스>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