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방학하자마자 제굴이 요리 학원 보낼게.""안 보냈으면 좋겠는데... 지금 가야 소용없어.""왜? 뭔가 전문적으로 배우면 좋잖아.""그런 거 아직 안 배워도 돼. 급식소 봉사를 더 자주 보내려고 하는데?"우리 부부가 한 토론은 무색했다. 여름 방학 첫 주말, 제굴은 일어나자마자 친구들 만나러 나갔다. 종일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디야? 뭐 하고 있어?" 전화하고 싶다. 그러나 남편은 말린다. 청소년이 갈 곳은 동네 공원, 노래방, 편의점, 피(시)방 정도. 그중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곳이지만 엄마가 싫어하는 피(시)방. 남편은 말한다.
"배지영이 전화하면 제굴이는 다른 데라고 하겠지. 아니면 지금 막 피시방 왔다고 하든가. 안 해도 되는 거짓말을 하게 된다니까. 그냥 둬도 돼."그날, 제굴은 해 질 녘에 집에 왔다. 오자마자 씻고, 컴퓨터를 켰다. 게임 '하스스톤'을 하고, 만화 영화 <심슨>을 보고, 요리사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찾아봤다. 색종이 접기에 푹 빠진 꽃차남(유치원생)이 제굴이한테 가서 뭔가를 물어보자 윽박질렀다. 지켜보는 내 표정이 고울 리 없었다. 그러나 제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밤늦도록 같은 자세였다.
오, 맙소사! 그 다음 날, 제굴은 인어공주로 변신해 있었다. 서지 않았다. 걷지 않았다. 두 다리를 한쪽으로 모으고 질질 끌면서 손으로 짚어서 움직였다. 눈부시게 아름답지 않았다. 완전 꼴불견이었다. 제굴의 등짝을 세게 때렸다. 남편은 "크느라고 그래. 성장통이 와서 그럴 거야"라며 제굴 편을 들었다. 그게 진실이라 할지라도, 내 마음은 부글거렸다.
7월 21일부터 본격 방학. 제굴은 오전 11시에 눈을 떴다. "방학하니까 너무 좋아"라며 침대에서 뭉그적거렸다. 그때 <아이의 사생활>이라는 책을 떠올렸다. 남자아이에게는 "그래서 이제 뭘 하려고 하는데?"라고 직접 물으라고 했다. 나는 "지금이 몇 신데 그러고 있어?" 따지지 않았다. 지적인 엄마처럼 물었다. 제굴은 "밥 먹고 치워야죠"라고 답했다.
"제굴아, 가스레인지 후드 떼어서 닦아. 힘들면 식기 세척기에 넣고. 오븐 청소도 해라.""엄마! 나 밥 먹고 계속 부엌에서 일하고 있어요. 지금 화 날라고 했어요. 나, 밖에서 데려왔어요?""(웃음) 티 나냐? 네 친엄마가 찾아올 때까지는 잘 키워야지.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요리 실컷 밀어주잖아. 이거, 네가 바라는 거 아니야?"
설거지와 부엌 청소를 마친 제굴은 다시 요리책을 꺼냈다. 유치원 갔다 와서 먹을 꽃차남 간식을 만든다고. 양파 속에 달걀과 치즈를 넣고 오븐에 넣었다. 맛은 그럭저럭 먹을 만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자체 평가. 제굴은 치아바타 빵에 베이컨과 갖가지 채소를 넣은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맛있다고 실컷 먹고서는 2시간 동안 낮잠을 잤다.
제 형이 만든 간식을 본 꽃차남의 반응은 시시했다. "나는 입이 작은데 형은 너무 크게 만들었어"라고 불평했다. 제굴이 좀 작게 만들어오자 이번에는 "똥 같어"라고 했다. 기분이 상한 제굴은 혼자서 다 먹어치웠다. 부엌으로 가서는 한숨을 쉬었다. 별거 하지도 않았는데 싱크대 안에는 설거지거리가 한가득. 설거지를 마친 제굴은 소파에 널브러졌다.
"엄마, 주부들이 왜 드라마 보는지 알겠어요. 집안 일은 끝이 없어.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져요. 그래서 소파에 앉으면 드라마를 보는가 봐.""엄마는 드라마 안 보는데?""엄마가 요리하고 치우는 거를 알아요? 모르잖아요! 나는 이제 아빠가 드라마 좋아하는 거를 이해해요. 밥하는 거 힘들어서 그런 거야."방학 이틀 차. 제굴은 일어나자마자 아빠와 같이 군산 나운복지관 무료급식소에 갔다. 제굴은 급식소 청소와 컵 정리를 했다. 간이 배이게 꼬챙이로 대추 속을 찌르는 일을 도왔다. 음식이 다 되고 나서는 어르신들 식판을 갖다 드렸다. 다 먹은 식판을 치우고, 청소까지 마쳤다. 집에 와서는 에어컨을 세게 켜놓고 낮잠을 내리 3시간 동안 잤다.
자는 제굴을 흔들어 깨웠다. 제굴은 "제발요. 나는 방학 생체리듬이 따로 있어. 낮잠은 무조건 자야 해요. 안 그러면 예민해져요"라고 했다. 잠결에도 이토록 논리적인 말을 하다니, 나는 제굴에게 설득당할 뻔했다. 그러나 현실을 보라.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인데 온종일 책 한 쪽을 읽지 않는다. 나는 제굴에게 짜증을 냈다.
"강제굴! 누가 보면, 네가 급식소 갔다 온 게 아니라 나라 세우고 온 줄 알아. 쫌 일어나!"나는 차츰 제굴 방학이 며칠 차인지 세지 않았다. 대신, 독심술을 연마했다. 제굴은 이런 생각을 하겠지. '방학은 좋다. 늦잠을 잘 수 있으니까. 방학은 좋다. 낮잠을 잘 수 있으니까'라고. 잠에서 깬 제굴은 오븐에 튀김 요리를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오징어 전을 부쳐보고, 그토록 좋아하는 돈가스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맛있다고 "깍깍" 소리를 내며 감탄했다.
토요일 아침에 제굴은 친구 주형이랑 같이 옛 군산역 무료급식소에 갔다. 주변 청소를 하고, 몇백 개의 식판을 정리했다. 식판 배식보다 어르신들이 급식소로 들어오는 속도가 빠르다. 그래서 자원봉사 학생들은 어르신들이 세 명씩 들어가게 조절한다. 참지 못하는 어르신들은 학생들 팔을 아프게 친다. 서로 싸움도 한다. 제굴은 그런 일들을 보고 겪었다.
"엄마, 근데 나 급식소에서 되게 좋았어요. 나보고 주방 들어오래요. 학생들은 원래 못 들어가잖아요. 설거지한 식판을 날랐어요. 신발이 젖으니까 장화 신어야 하는데 맞는 게 없어서 작은 걸 신어서 힘들었어요. 발을 오므리고 다니잖아요. 식판도 되게 무겁고요. 그래도 주방 들어갔으니까 좋지. 근데 주형이는 급식소 봉사 다신 안 한대요. 너무 힘들대."
제굴 방학 2주 차, 꽃차남이 다니는 유치원도 방학했다. 제굴은 오전에 동생을 데리고 영화 <요괴워치>를 보러 갔다. 집에 오면서 돼지고기 등심을 샀다. 고기 써는 게 신기하다며 "정육점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라고 했다. 제굴은 동생 손발을 씻기고 나서는 수제 돈가스를 만들었다. 밥벌이하는 내게 동생 밥 먹이는 모습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다음 날에 제굴은 동생을 데리고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보러 갔다. 영화 끝나고는 꽃차남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이 '의좋은 형제'는 친이모와 길에서 마주쳤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2차 성징이 온 제굴에게 문상(문화상품권)과 현금을 주며 축하해 준 지현 이모. 제굴은 갑자기 이모한테 깜짝 선물을 하고 싶었다. 정육점으로 달려가서 돼지고기 등심을 샀다.
한낮, 뜨거웠다. 부엌은 덥고 습했다. 제굴은 다이어트를 하는 이모를 위해서 두 가지 버전의 돈가스를 했다. 기름을 안 쓰고 오븐에 하는 돈가스와 고기 안에 치즈를 넣어서 기름에 구운 돈가스. 제굴은 "엄마, 나 요새 완전 돈가스에 꽂힌 거 알죠? 이모 것도 맛있게 잘할 수 있어"라고 했다. 예쁜 도시락통이 없는 게 흠이라면서 김치까지 따로 담았다.
"엄마! 엄마도 같이 가. 내가 싼 도시락 보고, 이모가 좋아하는 거 봐요. 진짜 좋겠죠?"제굴은 돈가스가 눅눅해진다고, 꽃차남 손을 잡고 먼저 가 버렸다. 뒤늦게 간 나는, 제굴의 도시락을 본 지현 부부의 표정이 어땠는지 모른다. 감격해서 펑펑 울지 않은 건 확실하다. 당황한 표정이었을 거다. 이제 막 식사를 마친 지현네 식탁을 보면 안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딱 입에 넣은 순간에 제굴이가 상기된 표정으로 벨을 누른 거겠지.
지현은 제굴이가 만든 돈가스를 어떤 접시에 담을까 허둥댔다. 한꺼번에 접시를 몇 개나 꺼내왔다. 시간은 오후 1시 반. 덥고 배고픈 꽃차남은 참지 않았다. "다 알아. 사진까지 찍고 먹으려고 그러지?"라고 했다. 조금씩만 먹는 제부는 점심 안 먹은 것처럼 돈가스를 많이 먹었다. 조카가 도시락을 싸온 특별한 날이라서 에어컨도 켰다(제부네 에어컨은 가구, 평소엔 켜지 않음).
그날 밤. 영어 학원까지 갔다 온 나는 피곤했다. 안방에서 꽃차남을 재우고 나오니까 제굴은 만화영화 <심슨>을 보고 있었다. 엄마 몸 안에 설정된 잔소리 기능이 자동으로 튀어나오기 전에 제굴은 선수를 쳤다. "나, 오늘 예민해요"라고 했다. 점심 먹고 3시간은 자야 하는데 이모네 집에 갔다 오고, 꽃차남 돌보느라고 못 잤다고 하소연을 했다.
방학인데 낮잠을 못 잔 아들. 나는 신중하게 행동했다. 제굴이가 누운 침대로 가서 누웠다. 제굴은 어릴 때 이모네 집에 가는 게 여행 같았다고 했다. 드디어 이모한테 도시락을 싸줄 수 있어 좋다며 낮에 있었던 일을 몇 번이나 복기했다. 나는 요리를 안 하지만 제굴이가 요리 하는 얘기를 듣는 게 참 좋다. 그러나 오전 1시, 잠이 쏟아졌다. 제굴은 나를 흔들었다.
"엄마, 자지 마요. 얘기 더 해요. 아직 할 얘기 많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