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곤혹스럽게 됐다. 박 대통령이 취임 후 다져 온 외교원칙을 '가까운 사람'이 앞장서 흔들고 있는 상황이 초래됐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후 '원칙주의' 외교를 추진했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를 압박해왔다. 지나치게 원칙에 매몰돼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는 전문가들의 비판이 있었지만 이에 대한 국민여론은 긍정적이었다. 매주 진행되는 여론조사 전문기관의 국정수행 평가에서도 외교·국제 분야는 다른 정책들에 비해 후한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동생과 여권 차기 대선주자가 앞장서 사고를 치고 있다. 박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씨가 "일본에 계속 과거사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말했다. 대통령 취임 후 첫 특사로 중국을 갔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최근 미국을 방문해 "우리에게는 중국보다는 미국"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언니의 '과거사 사과 요구'에 부당하다는 동생
30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박 대통령의 동생인 박근령씨는 일본의 포털사이트인 '니코니코'와 한 특별대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의 사과를 계속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는 "(과거사 관련 일본의) 사과에 대해서 자꾸 얘기하는 것은 우회적으로 부당하다는 생각으로 얘기했다"라며 "천황까지 합해서 네 번이나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는데"라는 취지의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전범들을 합사한 일본 야스쿠니 신사를 일본 정치인들이 참배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박씨는 "(신사참배 문제는) 내정간섭이라고 (대담에서) 이야기했다"라며 "'나쁜 사람이니까 묘소에 안 찾아갈거야' 그게 패륜이라는 것"이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남편인 신동욱 공화당 총재도 <연합뉴스>와 한 통화에서 이 같은 발언 사실을 인정했다. 신 총재는 "한일관계는 시대적 상황에 맞춰서 가야 한다는 게 발언의 요지였다"라며 "한국에서 논란이 있을 걸 예상했고 99명이 찬성하는데 한 명이 반대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현 대통령의 동생인 그의 발언이 현 정부의 대일 외교 기조와 전혀 맞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이해 그간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던 양국 관계가 해빙 기류를 타고 있지만 '일본 정부의 과거사 사과' 문제를 전제하고 있다. 아베 일본 총리가 내달 발표할 종전 70주년 담화 내용에 관심이 쏠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직접 과거사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도 밝혔다. 박 대통령은 지난 6월 22일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리셉션에 참석, "국교정상화 50주년인 올해를 한일 양국이 새로운 협력과 공영의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전환점으로 만들어야 한다"라면서 "이를 위해서는 가장 큰 장애요소인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화해와 상생의 마음으로 내려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내려놔야 한다'와 '내려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가야 한다'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라며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선행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당장, 황진하 새누리당 사무총장은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일본 자민당은 아베 총리에게 위안부 연행에 강제성이 없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고 아베 총리는 의견서를 받고 '확실하게 받아드린다, 잘못된 점은 고쳐나가겠다'라고 발언했다는 보도가 나왔다"라며 "다시 한 번 촉구한다, 과거사에 대한 양심적이고 진정한 반성과 사죄를 통해서 한일관계를 증진시키고 세계 속에서 도덕적으로 책임성 있는 일본이 되도록 노력해줄 것을 촉구한다"라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의 동생이 '박근혜 정부의 요구는 과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일본에서 해 버린 셈이다. 물론, 박근령씨는 대통령의 동생일 뿐, 정부 정책에 영향을 끼칠만한 인사는 아니다. 다만, 그의 발언으로 국민의 눈쌀이 찌푸려진다면 대통령으로서도 그 파장이 신경쓰일 수밖에 없다.
대통령 공 들인 중국 대신 미국에 '올인'하라는 차기 대권주자
미국을 방문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돌발 행동도 못지않다. 지나치게 미국에 편향된 시선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지난 27일 미 워싱턴DC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한 간담회에서 "미국은 유일한, 대체불가능한, 독보적인 동맹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에게는 역시 중국보다는 미국이다, 유일한 동맹국인 미국에서 (중국과 가까워지는 한국을) 의구심을 갖고 보는 시각이 있다"라며 이같이 말했다. (관련 기사 :
"아이고 장군님 고맙습니다" 미국 간 김무성의 '오버액션')
김 대표는 같은 날 오후 우드로윌슨센터에서 한 연설에서도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는 전면적인 관계이고, 한중관계는 분야별 일부의 관계"라고 말했다. 지난 29일 미 국무부에서 대니얼 러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만나서는 "한국과 중국과의 경제 관계가 커지고 있으나 이는 한국과 미국의 굳건한 동맹에 기초한 교류"라고 강조했다.
차기 여권 대선주자 1위에 꼽히는 집권여당 대표가 중국과의 관계보다 미국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공개적'으로 강조한 셈이다.
무엇보다 "국제정치에서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오래된 격언마저 무시한 김 대표의 '양자택일' 화법은 박 대통령이 취임 후 쌓아왔던 '공든 탑'을 무너뜨릴 공산이 크다.
박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미국보다 먼저 중국에 김 대표를 단장으로 하는 특사를 파견했다. 또 '친박 실세'인 권영세 전 새누리당 의원을 주중 대사로 임명하면서 한중관계 진전에 신경썼다. 권영세 전 대사 후임으로는 김장수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임명했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박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 그리고 실세 인사를 파견했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THAAD)의 한반도 배치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중국을 감시하고 포위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문제기 때문에 정부의 입장은 신중했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 등 여당 일각에서는 사드 배치를 공론화하기 위해 애썼지만 청와대는 "요청이 없었기 때문에 협의도 없었고 결정된 것도 없다"는 '3NO' 원칙을 유지했다.
야당부터 김 대표를 강도 높게 질타하고 있다. 최재천 새정치민주연합 정책위의장은 이날 정책조정회의에서 "김 대표는 외교를 자신의 정치 목적에 활용하고 있다, 잠재적 대권후보로서 안보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계산된 돌출 발언과 행동을 했다"라며 "속내를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외교 원칙을 철저히 망각했다"라고 비판했다.
같은 당 유은혜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김 대표의 행보를 '마이너스 외교'로 칭했다. 그는 "동북아를 둘러싼 민감한 외교적 사안이 산적해 있고, 그에 따라 우리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느 때보다 균형을 잡고 중심을 지켜야 한다"라며 "(김 대표는) 이러한 때에 "중국보다 미국"이라는 말로 불필요하게 외교 상대국을 자극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여당도 '중국보다 미국' 발언 파문 확산을 막는 중이다. 방미 수행단장인 장윤석 새누리당 의원은 이날 CBS라디오 <박재홍의 뉴스쇼>에 출연, "(김 대표의 발언에 대해) 국내 언론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라며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지, 중국은 중요하지 않고 미국만 중요하다 그런 뜻은 전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모두 '엎질러진 물'과 같은 일들이다. 사흘 뒤 휴가를 마친 박 대통령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