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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것이 되고 싶은 욕망

몇 년 전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서울메이트'란 제목의 코너가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똑같은 물건도 서울 것이 더 좋아 보이고 시골 것은 촌스럽다고 여기고, 시골 사람이 서울말을 배워서 쓰는 과정을 우스꽝스럽게 그려낸 코너였다.

이 코미디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서울 것이 갖는 권력과 이를 갖고 싶은 욕망이다. 사실 서울 사람은 이런 욕망에 관심이 없다. 왜냐고? 이미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이니까! 서울 사람은 시골 사람이 서울 사람이 되고자 하고, 또 흉내 내지만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것을 그냥 재미있게 볼 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지역잡지와 출판이 이제껏 처해온 상황이 이 코미디극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지역사람은 언제나 서울에 진출하려고 하고, 이런 경향은 오랫동안 굳어져서 지역의 문화는 지역 그 자체의 자존감을 잃어 버리고 자신을 깎아 내리거나, '글로벌'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붙인 채 또 다른 서울로서의 중앙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 왔다. 

지역의 숨결을 담으려는 지역잡지

지역잡지와 출판이 지역의 가치 있는 일, 사람, 태도 등을 기록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지역문화잡지연대를 만든 잡지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전라도닷컴, 사이다, 함께가는예술인, 토마토
지역문화잡지연대를 만든 잡지들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전라도닷컴, 사이다, 함께가는예술인, 토마토 ⓒ 지역문화잡지연대

민중생활사의 보고로 불리는 <전라도닷컴>은 2000년에 웹진으로 출발해서 2002년 월간으로 발행하여 전라도의 사람, 자연, 문화를 담아냈다.

"우리 집에 경사가 났어! 소가 새끼를 낳당게! 소도 사람허고 똑같애. 사람도 개린(가리는) 것맹키로 소도 개래. 궂은 것을 개려줘야제. 이랄 직(이럴 적)에는 동네 사람들도 조심해 주니라고 마당에 안 들어서. 어이, 안에 있는가? 허고 배깥에서 부르제. 동냥치도 중도 안들어서는 뱁(법)이여. 행이나 소헌티 해로울깨비. 시방은 새끼가 삘(뻘그레)해. 사람이나 짐생(짐승)이나 같애. 새끼 귀헌 것도 똑같애. 시방 이미(어미)는 두근두근 허고 있을 것이여."
(소 새끼 낳던 날, 고창 상하면 하장리 김회원)

수원 팔달산 자락의 사람, 자연, 문화에 대한 소소한 얘기들을 소개하는 <사이다>는 수원의 골목을 누비는 골목잡지다.

"지금으로부터 약 90년 전, 수원에 살았던 한 일본인이 화서문에 대해 남긴 기록입니다. 화서문을 통해 보는 마을 풍경은 지금 들어도 참으로 정겹습니다. 기록 속 '평화로운 굴뚝 연기'가 피어오르는 촌락마을은 지금으로 치자면 신풍동 어귀쯤이 되겠지요.

신풍동은 그때나 지금이나 '자연스럽고 소박한 느낌'이 가득한 마을입니다. 골목 어귀마다 2, 30년 된 가게들이 고스란히 자리를 지키고 있죠. 하지만, 동시에 급변하는 변화의 문턱에 있기도 합니다. 가장 오래됐지만, 동시에 가장 새로운 마을! 이곳이 바로 신풍동입니다."

대전의 <토마토>는 지역 속에서 예비사회적기업 활동을 통해 문화운동을 해 나간다.

"재미있었어요. 생각보다 주민들의 반응이 뜨거워서 좋았구요. 처음에는 구청에서 나온 줄 알다가 우리가 자발적으로 기획했다고 하니까 참 잘 생각했다며 그간 얼마나 악취가 심했는지 호소하시더라고요. 이제 냄새 안 나서 좋겠다고요. 향후 관리에 관해서는 불안함은 있지만, 주변 공동체를 믿고 지켜보려고 해요. 오늘 게릴라 가드닝은 학생들에게도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한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오늘이 계기가 돼서 앞으로 이런 캠페인이 지역사회에 확산되면 좋겠습니다."

부산의 <함께가는예술인>은 예술 현장 속에서 놀고 난 결과물로 잡지를 만드는 문화예술잡지다.

"전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과 사고가 모두 '예술'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나 노래나 춤이나 사진이나 연극영화만 '예술'이 되는 세상은 참 재미없는 세상일 것입니다. 상품으로서의 예술전문가 일부가 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술'이 없는 삶을 사는 세상이라면 참 끔찍할 것 같습니다. 이런 자기 부정과 자기 호의가 없는 예술은 소수 특권층을 위한 광대 예술로 타락하거나, 기껏해야 질 낮은 욕망의 어떤 낙서장, 그럴듯하지만 속을 보면 알맹이가 없는 무슨 장식 같은 것으로, 썩어간 것입니다. 예술이 무엇일까란 질문은 많은 부분 예술 내에 있지 않고 예술 밖에 있기가 십상입니다. 기존의 '예술이라는 것' 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당신의 행운을 빕니다."

지난 2013년 지역문화잡지연대를 만들면서 모인 <전라도닷컴>, <사이다>, <토마토>, <함께가는예술인>은 지속해서 모여서 지역의 숨결을 어떻게 살려낼까 고민했다. 그 고민은 지역 대 서울이라는 단순한 대립구도가 아니라 지역이 문화생태계의 부분으로서 기능해야만 한다는 깨달음과 더불어 오늘날 지역 문화 전반이 거대한 자본의 입김 아래 놓여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다는 절박함에서 출발했다.

지역 잡지와 출판, 정책을 논하다

지역잡지와 출판 활성화를 위한 제주 컨퍼런스 2015년 7월 16, 17일 제주대학교 행정대학원 세미나실에서 지역잡지와 출판 활성화를 위한 컨퍼런스가 열렸다.
지역잡지와 출판 활성화를 위한 제주 컨퍼런스2015년 7월 16, 17일 제주대학교 행정대학원 세미나실에서 지역잡지와 출판 활성화를 위한 컨퍼런스가 열렸다. ⓒ 전라도닷컴

지난 7월 16일부터 17일까지 제주대학교에서 '지역잡지와 출판의 활성화를 위한 제주 컨퍼런스'가 열렸다. 전라도닷컴을 비롯해 수원의 사이다, 대전의 토마토, 부산의 함께가는예술인이 모여 결성한 지역문화잡지연대와 특별손님으로 모신 서울의 스트리트에이치, 그리고 제주도의 각출판사가 모여서 지역문화를 살려내고 그 숨결을 기록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임을 확인하고, 그 의미와 방법에 대해서 열띤 발표와 토론을 벌였다.

지역문화잡지연대 대표를 맡고 있는 전라도닷컴의 황풍년 편집장은 환영사에서 "지역은 한국 문화의 다양성과 전통문화의 보루이자 생태 환경적 삶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이며 "지역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대물림하는 일은 무분별한 개발과 파괴의 삽질에 제동을 걸고 물질만능 시대의 폐해를 극복하는 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경훈 제주민예총회장이자 각 출판사 대표는 "열악하다는 말도 사치스러운 것이 지역출판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이 살아 있다는 것은 지역문화가 살아 있다는 표징이다. 즉, 지역의 지식생산이 이어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출판사의 존재는 이런 지역 문화의 모태와 같은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작은 출판사라도 지역의 인문학 출판사의 존재는 그러므로 의미 있는 것이다."

이번 제주 컨퍼런스는 지난 5월에 열린 '지역출판 진흥과 활성화를 위한 국회토론회'에 이어 대규모 시장이 문화를 좌지우지하는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 고사해가는 지역문화와 출판을 살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논의하는 자리가 되었다.

"2013년 기준으로 출판 사업체, 종사자, 매출액 모두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출판은 문화다양성의 보고이자 저장소, 지식 문화공공재이자 고유한 문화입니다. 이러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출판지원 정책이 필요한 때입니다. '지역신문발전법'과 같은 발상으로 '지역출판지원법'을 제정하는 입법시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역 출판환경의 현황과 진흥제도화를 위한 과제'라는 제목으로 최낙진 교수가 발표하면서 한 말이다.

이어진 토론에서는 지역을 다루고 있고, 지역에서 만들어진다고 모두 지역잡지라고 말할 수 있나, 지역문화를 애정을 가지고 지켜내고, 키우고, 살려 쓰는 '태도'를 지원하는 정책을 우리가 먼저 제안하고 이를 설득력 있게 전달할 준비를 하자, 일본 돗토리 현의 지역도서전을 둘러보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정기적인 '지역도서전'을 열 수 있게 같이 고민해 보자는 의견도 나왔다. 

사람다운 태도가 바로 우리가 지켜낼 지역문화


지역 문화가 살려야 할 것은 지역 경제가 아니라 사람다운 태도다. 민중을 구경꾼에 머무르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가치 있는 것으로 귀 기울여 들을 때 우리는 비로소 후대에 물려줄 만한 감동적이고 위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때에야 비로소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지금 이 순간,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역의 잡지와 출판이 그러한 사람다운 태도를 살려 쓰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우리가 후대에 물려줄 문화생태계의 보고가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지역문화잡지연대#지역잡지와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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