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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을 찾아 빵을 나눈 후 2시간 강의.
▲ 한국어 학원생들에게 2시간 강의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을 찾아 빵을 나눈 후 2시간 강의.
ⓒ 김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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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이 일상적으로 이어지는 네팔. 그 때문일까, 작은 지진에 공포감을 갖는 경우도 줄어들었다. 최근엔 여진의 규모도 차차 작아지는 듯하다. 규모 4.7에서 4.3까지. 그리고 가장 최근인 지난 8월 16일 오후 3시 30분(한국시각 오후 6시 45분)엔 규모 3.9의 여진이 지나갔다. 카트만두 시내 깔리마티라는 곳에서 발생한 것이다.

카트만두 사람들은 작아지는 여진의 규모 속에서 지진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네팔 번다'(총파업)가 지진과 다를 바 없는 현실에 고통을 안겨 주고 있다. 카트만두 시민과 네팔 사람들이 헌법 발효를 앞두고 파업을 벌였다. 자신들에 이익과 배치되는 헌법제정에 불만을 가진 각 정파와 종족 그리고 지역이 주요 대상이다. 제정될 헌법의 내용을 보면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모든 피해는 일반 시민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총파업은 이방인이 보아도 답답한 구석이 많다.

헌법제정을 앞두고 일어나는 불편한 일들에 빵 배달에도 몇 차례 차질이 생겼다. 주중에는 카트만두 시내와 인근 지역, 주말에는 지진피해가 극심한 지방을 찾아가야 한다. 이제는 각 지역을 방문하는 일도 총파업에 길이 막힐까 걱정이다.

한국어 배우는 학생들, 강의를 부탁받다

네팔예술대학을 찾아서 학생들의 창작열정을 보았다.
▲ 네팔예술대학을 찾아서 네팔예술대학을 찾아서 학생들의 창작열정을 보았다.
ⓒ 김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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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정에도 차질이 생겨 하루는 네팔 학생들을 찾아 격려하기로 했다. 네팔에서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이다. 학원에서 한국어 강의를 하는 네팔 한국문화센터 부대표 모한까르기씨를 빵 공장으로 불렀다. 과거에는 총파업을 하는 날이면 오토바이도 다니지 못했다. 요즘은 오토바이는 다닐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빵을 포장해서 담았다. 모한까르기씨의 오토바이를 타고 그가 수업하는 고태솔이라는 곳으로 갔다. 공항 인근에 있는 학원이었다. 한국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가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이 작은 교실에 빼곡히 들어찼다. 50여 명이라고 들었는데 60명은 되는 듯했다. 그런데 때마침 '회식'이라는 주제의 강의 시간이었다. 모한까르기씨가 내게 강의를 부탁했다. 나는 빵을 나눠준 후 2시간 동안 수업을 진행했다.

다음 날은 네팔 화가 람 바하두르 타다(Ram Bahadur Thada)를 불렀다. 그가 다니고 있는 네팔예술대학교 학생들을 응원하러 가자고 말했다. 그와 빵을 들고 작은 툭툭과 미니버스를 갈아탔다.

네팔예술대학교 석사과정 캠퍼스가 있는 키리티푸르(kiritipur fine art college)에 40분 만에 도착했다. 그곳은 지진으로 무너진 캠퍼스를 피해 옮겨간 곳이다. 그런데 키리티푸르 캠퍼스에도 무너져 금이 간 곳이 많았다. 학생들은 창작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그들을 방문한 것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나누고자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불편해하면 모두 무용지물이다. 그런데 학생들의 반응도 좋아서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대학교 학생들이라서 빵을 전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보다 작품을 만드는 모습을 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들도 그런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작품을 보면서 전체적으로 조금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나라 사정이 불안정한 데서 기인하는 것일 것이라 짐작했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라 불안한 심리가 작품에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낙천적인 네팔 국민, 안정을 기원하며

무너진 캠퍼스 안에서 땀 흘리며 창작에 열중인 미래의 예술가들을 만났다.
▲ 창작에 열중인 미래의 예술가들 무너진 캠퍼스 안에서 땀 흘리며 창작에 열중인 미래의 예술가들을 만났다.
ⓒ 김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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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대학의 학장은 쉬마씨다. 지난 2007년 내가 한국에 초청해서 전시회 연 바 있다. 그녀는 인도인이고 판화작품으로 유명하다. 잠깐 얼굴만 보고 다시 찾았을 때는 학교를 떠나고 없었다.

빵을 나눠주고 곧 캠퍼스를 나서려는데 람 바하두르 타다가 한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람 바하두르 타다가 그 학생과 오토바이로 이동하면 좋겠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학생의 귀갓길이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이었다.

네팔에서는 오토바이가 매우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최근에는 교통 혼잡이 심해져서 더욱 필요한 운송수단이 되고 있다. 여성들은 작은 스쿠터를 이용하는데 구매비용이 매우 비싸다는 단점이 있다.

한국으로 가려는 젊은 네팔인들과 창작의 열정을 다하는 네팔예술대학교 학생들. 그들이 네팔의 미래다. 그들이 바르게 정착하려면 어서 정치적 안정이 필요할 텐데, 정치적 상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지진 이후의 후유증도 심히 우려된다.

다행스러운 것은 네팔 국민의 낙천적인 성격이다. 그들의 일상은 답답하게 보일 정도로 여유롭다. 평소에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답답하기만 하던 그들의 생활 태도가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는 장점이 되고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여전히 희망을 품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네팔 국민에게 빠른 안정이 찾아오기를 기원한다.


태그:#네팔번다(총파업),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 , #네팔예술대학교, #람 바하두르 타다, 모한 까르기, #예술대학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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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사람의 사막에서" 이후 세권의 시집, 2007년<히말라야,안나푸르나를 걷다>, 네팔어린이동화<무나마단의 하늘>, <길 위의 순례자>출간, 전도서출판 문화발전소대표, 격월간시와혁명발행인, 대자보편집위원 현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홈페이지sisarang.com, nekonews.com운영자, 전우크라이나 예빠토리야한글학교교사, 현재 네팔한국문화센타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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