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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창묘.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9호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비문과 석물도 없는 어느 필부의 묘 같다.
 이건창묘.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9호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비문과 석물도 없는 어느 필부의 묘 같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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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두 바퀴에 몸을 싣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달리면 몸도 마음도 날아갈 것 같다. 출렁이는 녹색의 들길은 자전거타기에 더없이 좋다.

누가 자전거를 처음 발명했을까? 굴러갈 때는 넘어지지 않고, 내가 발산하는 에너지로 빠르고 편안하게 달리도록 한 발상,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전거를 인류가 만든 수많은 발명품 중 완벽하고 아름다운 발명품이라는 말까지 한다.

나는 요즘 자전거 타기에 푹 빠졌다. 아침운동으로 아내와 함께 자전거를 탄다. 혼자보다 둘이어서 더 좋다. 매일 이 마을 저 마을 코스를 만들어 달린다. 고샅 구석구석을 타다보면 강화나들길을 따라 가는 경우도 많다.

아내는 자전거를 즐겨 탄다.
 아내는 자전거를 즐겨 탄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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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내는 자전거 쉼터에서 강화나들길 안내 코스를 유심히 보다가 뜬금없는 제안을 한다.

"여보, 휴일에는 자전거 타고 우리 사는 주변 문화재를 돌아보면 어때요? 운동도 하고 문화재도 탐방하고!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아니에요?"

강화나들길 따라 자전거 타기

자전거 타면서 문화재를 탐방한다? 아내가 권하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다. 운동을 즐기면서 우리 지역 문화재를 더듬어보는 것도 큰 의미를 더 할 것 같다.

내가 사는 강화도는 수려한 자연경관과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선사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반만년 역사현장의 중심에 서 있는 곳이다. 문화재와 수려한 경관을 연결하여 강화나들길이라는 탐방로들을 묶어 놨다.

강화나들길 표지판. 제4코스에 이건창 선생 묘가 있다.
 강화나들길 표지판. 제4코스에 이건창 선생 묘가 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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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디를 탐방해볼까? 우리는 강화나들길 4코스에 있는 양도면 건평리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선생 묘소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간단한 물과 간식을 준비하고, 힘찬 발걸음으로 페달을 밟아본다.

시작은 녹색의 들길이다. 들길은 자전거타기에 안전하다. 오가는 차량도 거의 없고, 콘크리트 포장이 되어 있어 거침없이 씽씽 달릴 수 있다.

중간 중간 나들길 안내표지와 리본이 있어 방문객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하우약수터에서 얼마를 달렸을까? 머지않아 건평리마을에 도달했다.

밭에서 일하는 주민 한 분을 만났다. 가을 김장거리 심을 준비에 분주한 손길이다.

"어르신, 여기가 이건창 선생 묘소가 있는 동네 맞죠?"
"맞게 찾아왔네요. 나들길 걷는 사람들은 여럿이 다니는데, 자전거 타고 왔네! 부부이신가? 댁이 어디요?"
"제 집사람입니다. 화도 마니산 밑동네 살구요."
"상방리? 수월찮은 거린데! 어사또 이건창 선생 만나러 왔구먼요!"

먼 길 찾아 자기 동네에 있는 훌륭한 선비를 찾아온 우리가 반가운 모양이다. 누구한테 이건창 선생을 알려주게 되어 신이 나는 듯 일손을 멈추고 선생의 면면을 설명해주신다.

탐관오리 벌하고, 백성 살핀 대문장가

이건창은 조선말 대문장가이자 문신이었다. 선대로부터 강화도에서 생활한 강화 토박이다.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이건창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이건창생가.명미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인천시광역시 기념물 제30호이다.
 이건창생가.명미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인천시광역시 기념물 제30호이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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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이조판서를 지낸 조부 이시원으로부터 어린 나이 때부터 가학(家學)으로 충의와 문학을 배웠다. 이시원은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군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수치스러움에 동생 이지원과 함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분이시다. 선조의 순국은 어린 이건창에게도 올곧은 삶과 정신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건창은 신동 소리를 들을 만큼 5세 때 문장을 구사하였고, 만 14세에 조선왕조 최연소자로 급제하였다. 너무 어린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지라 4년 뒤에야 홍문관의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다. 그 뒤 청년 이건창은 사신을 수행하여 기록을 맡았던 서장관에 발탁되어 청나라에 가서 이름을 크게 떨쳤다. 그 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의 서쪽지역 민생을 살피는 암행어사가 되었다. 또한 예문관의 벼슬을 거쳐 함경도의 경성 이북을 다스리는 안무사에 올랐다.

그는 불의를 보면 사사로운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아부하거나 굽실거리는 게 태생적으로 맞지 않았더 그는 암행어사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탐관오리들을 무섭게 꾸짖고 징벌하였다. 그야말로 산천초목이 떤다는 어사또였다. 온갖 위계와 술수로 탄핵에서 벗어나려던 수령들의 농간에도 그는 굽힘이 없었다. 고종임금은 지방관을 보낼 때에 "그대가 가서 잘못하면 이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공사를 집행하는 그의 자세는 반듯하였다.

이건창은 탐관오리들에겐 추상같은 기개의 암행어사였지만,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는 따뜻했다. 그는 가난하고 궁색한 백성을 불쌍히 여겨 세금을 실정에 맞게 덜어주도록 조정에 건의하여 도움을 주었다. 지금의 서울부시장격인 한성소윤으로 있을 때는 외국 사람이 가옥과 토지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건창은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영세불망비가 각처에 세워진 것도 그럴 만했다.

이건창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는 여러 관직의 부름을 받았으나 이를 마다하고, 고향 강화도에 내려와 생활하다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건창의 생애를 보면 충신의 손자로, 올곧은 그의 씩씩한 기상은 권신들과의 상반된 견해로 잦은 갈등을 겪었다. 이로 인해 유배되거나 낙향하여 칩거하는 때가 많았다. 그는 자신의 아픔을 시와 저술로 마음을 달래고 울분을 풀었다. 이건창의 뛰어난 문장이나 시는 대부분이 그런 어려운 시절에 완성되었다.

이건창은 어린 나이에 달성서씨(達城徐氏)와 결혼하여 10년 남짓 생활하다 사별하였다. 꽃다운 나이에 먼저 세상을 뜬 부인을 슬퍼하며 쓴 도망시(悼亡詩)가 있다. 그의 작품 한 수를 읽어보자. 가슴이 먹먹하다.

未乾桮捲淚 (미건배권루) … 술잔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仍積簟牀塵 (잉적점상진) … 살평상엔 먼지만 가득히 쌓였소
更忍中門入 (경인중문입) … 다시 차마 중문으로 들어가 보지만

家居亦外人 (가거역외인) … 내 집에 살아도 손님만 같구려
何嘗望作郡 (하상망작군) … 내어찌 일찍 벼슬하기만을 바랐겠소만
稍已識居鄕 (초이식거향) … 이제야 조금 알아 고향으로 돌아왔건만

小福難消受 (소복난소수) … 박복한 당신 향수를 누리지도 못했는데
門前紫稻香 (문전자도향) … 지금 문 앞에는 햅쌀 향기만 그득하구려
兒小不知哭 (아소부지곡) … 아이는 어려서 곡을 할 줄 몰라서

哭聲似讀書 (곡성사독서) … 곡성이 글 읽는 소리와도 같다가
忽然啼不住 (홀연제부주) … 갑자기 엉엉 울며 멈추지 않더니
簌簌淚連珠 (속속루연주) … 하염없는 눈물만 구슬같이 흘렀소

영재 이건창 선생은 조선조말 양명학자였다. 그는 서구열강에 반대하는 주체적 개혁을 추구했다. 전통을 중시하며 변화를 꾀하는 지식인이었다. 권력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민생의 실상과 어려움을 다루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다.

그의 저서로 문학적 시문집인 <명미당집(明美堂集)>과 파당과 족친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연구한 <당의통략(黨議通略)> 등이 있다.

묘비조차 없는 가슴 저린 이건창의 묘

주민이 일러준 길을 따라가니 건평교회 길모퉁이에 선생의 묘를 안내하는 나들길표지가 있다. 우리는 문화재 안내판을 발견했다. 자전거를 세우고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이건창묘 문화재 표지판이다. 이것 마저 없었으면 누구의 묘인지 모르겠다.
 이건창묘 문화재 표지판이다. 이것 마저 없었으면 누구의 묘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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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창묘 오르는 계단. 문화재 표지판이 보인다.
 이건창묘 오르는 계단. 문화재 표지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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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오르자 묘 하나가 눈에 띈다. 단분(單墳)에 특별한 장식이 없다. 아내는 선생의 봉분을 보고서 탄식조로 말을 한다.

"여기가 암행어사를 지내고 대문장가이신 이건창 선생 묘란 말이예요? 믿기지 않네!"
"안내판 봤잖아!"
"비문이 없으니까 그렇죠! 그 흔한 석물은 고사하고 상석도 없네요."
"선생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어느 필부의 묘일세 그려!"

주자학만을 철저히 숭상한 조선사회에서 선생은 가학으로 지식과 실천의 일치를 주장한 양명학을 익힌 '비주류의 사상가'여서 그럴까? 제멋대로 피워난 이름 모를 들꽃과 가을을 부르는 풀벌레소리가 외로운 영재 선생의 묘를 지키고 있다. 소박하고 검소한 묘에서 그의 살아생전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여기저기 삐죽삐죽 솟아 난 잡초들이 많이 있다. 아내가 봉분 주위를 서성이다 성묫길에 온 사람처럼 잡초를 뽑는다. 아내 손에는 어느새 잡초가 한 움큼이다.

이건창묘. 관리는 되고 있으나, 듬성듬성 잡초가 많이 올라왔다. 우리는 성묫길 온 사람처럼 잡초를 뽑았다.
 이건창묘. 관리는 되고 있으나, 듬성듬성 잡초가 많이 올라왔다. 우리는 성묫길 온 사람처럼 잡초를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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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하기 그지없는 묘소에서 암행어사의 호령, 역졸들의 "암행어사 출두요!" 함성이 들리는 것 같다. 탐관오리에게 어사또의 추상같은 꾸짖음과 이를 지켜보며 환호하는 백성들의 모습도 그려진다.

우리는 비록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곧고 바른 성품과 높은 기개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이건창을 본다.

이건창 선생을 만나고 오는 길, 아내와 나의 자전거 페달에 힘이 더욱 붙는다.

덧붙이는 글 | 차량을 이용하여 이건창묘를 가려면 네비게이션 행선지를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건평교회>로 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태그:#이건창, #이건창묘, #이건창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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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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