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대에서 전국해양문화학자 대회를 마친 일행은 흑산도와 홍도 탐사에 나섰다. 흑산도란 이름의 유래는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도라 불렸다. 그래서인지 산에는 나무가 가득하고 바닷물이 아주 맑다.
목포항을 출발해 2시간여 만에 흑산도 읍동항에 도착하니 해산물을 파는 노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건어물을 팔며 오징어를 말리는 아주머니한테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흑산도 아가씨는 다 어디가고 아주머니만 있어요?""흑산도 아가씨? 나도 젊었을 적에는 흑산도 아가씨였제. 그런데 이렇게 80먹은 할멈이 되어부렀소"유배문화의 산실 흑산도흑산도는 아가씨와 홍어, 파시가 유명하지만 기억해둘 게 또 하나 있다.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을 필두로 상당수의 중죄인이 유배당한 곳이다. 유배형에는 위리안치, 본향안치, 절도안치가 있다. 유배문화공원에 기록된 유배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리안치(圍籬安置) - 중죄인에 대한 유배형 중의 하나이다.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가 둘러쳐진 집안에 사람을 가둔다. 대개 탱자나무가 많은 전라도 연해의 섬에 보냈다. 절도안치(絶島安置) - 본인 혼자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 유형생활을 치르도록 하는 형벌이다. 유배지에서 거주제한을 받는 형벌로 왕족이나 고급관리들에게만 적용한 형벌이며 유배지에서도 거주지를 강제로 제한하였기에 두문불출이라고도 불렀다. 처와 첩은 동거할 수 없고 결혼하지 않은 자녀와 동거할 수 없으나 부모와 결혼한 자녀의 상봉이 허락되었다. 본향안치(本鄕安置) - 본인의 고향에서만 유배생활을 하도록 하는 가벼운 죄인의 안치 제도유배공원에 기록된 자료에 의하면 고려 의종 2년에 정수개가 최초로 흑산도에 유배되어 왔으며 조선조까지 130여 명이나 유배되어 왔다. '절도안치'에 해당하는 이들의 유배 이유를 보면 당론이 가장 많고 간언과 상소가 두 번째로 많아 정치적 이유가 가장 큰 것으로 여겨진다.
유배의 고통을 해양생물 백과서적 집필로 승화시킨 정약전손암 정약전은 다산 정약용의 형으로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천주교인이란 명목으로 흑산도로 유배됐다. 정약전은 섬사람들의 토착지식을 자신의 학문 세계로 끌어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자산어보>라는 위대한 작품이 탄생했다.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1814년 집필하였고, 3권 1책의 편집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정약전은 비늘의 유무를 기준으로 인류(鱗類)와 무린류(無鱗類)를 나누고, 갑각류인 개류(介類)와 기타 해양동식물을 포괄한 잡류의 4류 등을 포함해 총 5류의 해양생물 체계를 종합적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이들의 하위범주를 다시 비슷한 종끼리 묶어 226종으로 세분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통해 삼강오륜으로 대변되는 윤리적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들쥐가 전복을 엿보아 엎드려 있다가 전복의 꼬리로부터 등으로 오르는데, 이때 전복은 쥐를 업고 도주한다. 조수가 밀려오면 쥐는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이것은 마침 사람을 해치려는 도적에게 하나의 귀감이 될 것이다"
"두 날개에는 가는 가시가 있어서 암놈과 교미할 때에는 그 가시를 박고 교합한다. 암놈이 낚시바늘을 물고 엎드릴 적에 수놈이 이에 붙어서 교합하다가 낚시를 끌어올리면 나란히 올라오는데, 이때 암놈은 먹이 때문에 죽고, 수컷은 간음 때문에 죽는다고 말할 수 있는바 음(淫)을 탐내는 자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전복을 먹으려던 들쥐는 전복의 계책에 속아 죽고, 여색을 탐닉하던 홍어는 도망치지 못해 죽는다. 정약전은 전복을 먹으려는 들쥐를 도적에, 색을 탐닉하던 홍어를 색광에 비유해 삼강오륜의 윤리적 가치를 강조했다.
구한말 애국지사 면암 최익현
최익현은 구한말 사상가이자 의병장이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체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흑산도에 유배당했다. 유배된 면암은 흑산면 진리에 '일신당'이라는 서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고 천촌마을 지장암에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 洪武日月)이란 글씨를 손수 새겨 독립된 대한민국임을 강조했다.
유배당한 사람들은 섬사람들과 가까이 하며 주민들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책상에서 공부만 하던 정약전이 물고기의 생태를 연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주민 속에 숨어있었던 인재 장창대의 도움을 받아 역작을 완성했다.
정약전이 살았던 집 주변에 조성된 유배문화공원으로 올라가는 돌담은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 이곳을 방문했던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인 K씨는 다듬어진 골목길에 분개해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정약전이 살았던 당시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인데 이렇게 네모 반듯하게 다듬어진 돌담을 보러 오는 건 아니잖아요? 담당 공무원들이 업자에게 발주만 하고 감독을 안 하니 업자들 편할 대로 만들어놓은 것 아닙니까?"절해고도로 유배되어온 사람들의 생활고는 어땠을까 생각하며 그들의 생활상을 간직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