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가의 길 긴 여행을 마쳤다. 봄에 경주를 떠나, 여름은 사막에서 보내고, 가을에 로마에 도착했다. 길을 떠난 지는 다섯 달 만이고, 짝퉁 카세트테이프로 다큐멘터리 <실크로드> 배경 음악을 들으며 꿈을 꾼 지는 22년만이었다.
로마의 나보나 광장에는 판테온이 있다. 기원전 25년, 신을 위해 지어진 돔형 지붕이다. 이곳에 서서 나는 내가 태어난 나라의 경주 석굴암을 생각했다. 이곳의 돔형 지붕은 실크로드를 따라 경주까지 왔다. 우리는 늘 대륙에 갇힌 한반도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과거에도 우리 문화는 항상 이렇게 외부를 향해 열려 있었다.
드디어 실크로드 여행을 마무리하는 순간이다. 해가 길게 늘어지던 오후, 로마 시내를 벗어나 아피아가도에 도착했다. 기원전 312년에 만들어진 아피아가도. 우리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할 때의 그 '길'이다. 이 길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까맣고 편편한 돌들이 빈틈없이 맞물려 있고, 반들반들한 이 돌길 위에는 아직도 차들이 지나다녔다.
30여 년 전, NHK 다큐멘터리 <실크로드> 팀은 아피아가도를 지나며 이렇게 말했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이 실크로드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알았다. 그래서 오해는 전쟁을 낳고 이해는 평화를 낳았다. 오늘도 실크로드 취재팀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찾아보기 위해 이 실크로드를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 NHK 다큐멘터리 '실크로드' 中
이 길은 도시와 도시를 잇고, 군대를 이동 시켰으며, 또 사람과 물자를 끌어들였다. 그렇게 다른 세계의 문물들이 로마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비단이었다. 물론 이 거대한 실크로드를 통해 비단만 오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단은 동방에서 서방으로 간 최초의 주요 수출품이었다.
가볍고 광택이 나는 데다 몸을 휘어 감는 비단의 질감은 로마인을 매혹 시켰다. 베리우스 황제는 비단이 퇴폐 문화를 조장한다며 금지 시킬 정도였다. 혹자는 이 비단으로 인한 무역적자가 로마의 급작스런 멸망을 이끌었다고 보기도 할 정도로, 동양의 비단은 로마인의 삶에 깊숙히 들어와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로마 사람들은 중국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이 비단이 동쪽에서 온다는 것뿐 이었다. 이들은 동양인을 일컬어 세레스(seres)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 뜻은 '비단의 나라(Serica)에 사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이들은 비단이 나무에서 생산된다고 믿기도 했다. 아마 비단이 '누에'라는 벌레에서 나온다고 알려줘도 그들은 믿지 않았을 거다.
중국 남부에서 생산된 이 비단은 로마에 도착하기까지 극도로 험난한 지대를 넘었다. 낙타 대상들은 타클라마칸 사막, 고비사막, 천산산맥, 파미르고원, 힌두쿠시산맥을 지났다. 중앙아시아의 겨울은 극단적으로 춥고, 여름은 지독하게 뜨겁다. 하지만 낙타 대상들은 비단을 지니고 묵묵히 타클라마칸 사막, 고비사막, 천산산맥, 파미르 고원, 힌두쿠시 산맥을 넘었다.
하지만 낙타 대상들이 그 먼 길을 모두 가로지른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의 인생에 실크로드 왕복은 몇 번 되지 않을 큰 이벤트였을 것이다. 그들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오아시스 나라를 중심으로 중계무역을 했다. 비단은 수많은 작은 나라와 도시를 거쳐 로마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 점을 이은 것이 실크로드였다. 그렇게 오아시스에 점점이 박힌 거점들은 중계무역으로 발전하며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켰다. 그 문화가 다시 거미줄처럼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갔다. 이렇게 실크로드는 단순히 비단이 지나간 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길을 통한 기나긴 동서의 문명교류를 뜻한다.
그동안 이 길을 더욱 흥미롭게 만든 것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모험가의 모험담이었다. 그들은 낙타대상과 달리 실크로드 전체를 여행했다. 장건, 혜초, 현장, 이븐 바투타, 마르코 폴로, 스벤 헤딘 등 수많은 모험가들이 길을 열었다. 확실한 정보는 없이 소문만 무성한 세계를 향해 그들은 발을 디뎠다.
각자 길을 떠난 목적은 달랐지만 그들이 다닌 곳이 길이 되었다. 그리고 오직 살아남은 이들만이 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누가 살고 있는지, 어떤 모습과 풍습을 지니고 있는지, 얼마나 무서운 괴물이 버티고 있는지, 감히 정주민은 꿈꿀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실크로드는 모험가의 길이기도 했다.
바티칸에 칼을 들고 간 여자 이탈리아에 가면 잘생긴 남자가 많다더니, 거지도 모델이라더니 속았다. 로마를 아무리 돌아 다녀 봐도 잡지 화보에서 보던 남자들은 없었다. 대체 잘생긴 남자는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자, 친구들은 깔깔 웃었다.
"키 크고 잘생긴 남자를 보려면 북부로 가야 해."북부인 밀라노나 베네치아에 가라는 거다. 남부는 키가 작고 털이 많은 스타일의 남자들이 많고, 북부는 키가 훤칠하고 조각 미남이 많다고 한다. 사실 베네치아에 가서 마르코 폴로의 흔적을 찾아보려는 계획이었다. 마르코 폴로가 출항을 앞두고 바다를 바라보던 그 항구에 서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스탄불에서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포기했다. 잘생긴 남자도 못보고, 마르코 폴로도 못 만나고, 여러 가지로 아쉽다.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서 예정에 없던 바티칸과 바티칸 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그동안 실크로드를 여행하며 불교, 네스토리우스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그리스 정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와 만났다. 가톨릭의 총본산인 로마 바티칸은 실크로드의 다양한 종교 중 마지막 순례코스였다.
아침 일찍 바티칸으로 향한 날, 이미 입장하려는 줄이 길게 서있었다. 저 줄 끝에는 검색대가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기다리다가 갑자기 머리털이 삐쭉 섰다. 그러고 보니 카메라 가방 안에는 늘 가지고 다니는 휴대용 칼이 있었다. 10년을 함께 여행해 온 천 원짜리 접이식 칼이다. 주로 망고나 파파야를 깎아 먹을 때 쓰인다.
투르크메니스탄 호텔에선 침입자를 쫓아내는 데 쓰기도 했다. 칼이 접힌 채로 손에 쥐고만 있었지만, 이 칼이 있었기에 침입자 앞에 나설 수 있는 용기가 났다. 사실 여행을 하면서 실제로 치한을 상대로 칼을 쓸 일은 없다. 하지만 칼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긴 하다. 운이 좋게도 좋은 사람들을 주로 만났지만, 세상 모두가 착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길에 나서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싸구려 칼은 최소한의 보호장비였다.
물건에 애착을 두는 편이라 한참을 고민했다. 결국 내 차례가 오기 전에 얼른 쓰레기통에 칼을 던져 넣었다. 어차피 여행의 마지막이다. 칼을 버리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바티칸을 관람했다. 교과서에서 봤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있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고요한 슬픔과 함께 이제 모든 여행은 끝이 났다.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는 긴 여정이었다. 실크로드라는 이름과 달리 비단이 깔린 길을 꽃가마를 타고 지나가는 낭만적 여행이 아니라 생고생의 길이었다. 경주 석굴암에서 시작해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중국 천산과 파미르 고원을 지나,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로마까지 왔다. 나라가 바뀌면 사람도 바뀌고 무덤도 바뀌었다.
사막의 아이 무덤부터 황제의 무덤, 전설 속 왕비의 무덤, 배들의 무덤, 조로아스터의 조장터까지... 얼마나 많은 무덤을 지났을까. 한때 살아있거나 번성했던 것들은 이렇게 이야기만 남기고 사라지기 마련이다. 내가 지나온 이 오아시스 길들도 중국의 누군가 나침반을 발명한 후 해상교통이 발달하며 잊혀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 길은 19세기 러시아와 영국이 중앙아시아를 놓고 패권다툼을 벌이면서 다시 사람들의 기억에 떠올랐다.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다. 덕분에 이 길은 '실크로드'라는 이름도 얻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이름과 달리 당시 열강들이 휩쓸고 지나간 실크로드의 지역들은 모두가 쉽지않은 시간을 살게 된다.
영국과 러시아가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신장과 티베트 지역은 중국에 편입되어 지금까지 분리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다.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과 같은 중앙아시아의 나라들은 소비에트연방으로 부터 독립되긴 했으나 그때 그어둔 국경선때문에 아직도 민족분쟁이 지속되는 지역들이 있다.
카라칼팍스탄 공화국은 구소련의 목화재배를 위한 관개용수 사용으로 인해, 아랄해는 말라붙고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다. 각 열강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침략에서 독립하였으나 소련의 침공을 받고, 결국 탈레반의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실크로드의 주요한 길목이었던 시리아는 지난 2015년 8월, IS(이슬람국가)에 의해 팔미라유적이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실크로드는 다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천산을 넘어 중국에서 키르기스스탄으로 갔을 때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중국 주도의 도로공사현장이었다. 운전기사는 그들을 가리키며 "키타이( Китайский, 키타이스키 , 중국인)"라고 알려줬다. 산이 험한 타지키스탄에서도 이란이 만든 '죽음의 터널' 외에는 대부분 중국이 건설한 터널이 도로를 이어주고 있었다. 중국은 중앙아시아, 유럽을 육로로 연결하는 한편, 바닷길로 유럽, 아프리카, 남미까지 잇고자 한다. 과거 실크로드의 영광을 재연하겠다는 중국의 원대한 계획,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이번에는 미국과 이란이 핵협상을 맺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중국에 잠식되고 있는 이란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견제책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러시아 역시 실크로드경제지대 구축을 위해 애쓰고 있다. 인도 또한 최근 상하이협력기구(SCO)에 가입했다. 이제 영토가 아니라 자원을 중심으로 전세계가 다시 실크로드로 모이고 있다.
NHK 다큐멘터리 <실크로드>에서 언급했듯, 이 길은 번영의 길이기도 했지만 전쟁의 길이기도 했다. 서로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힘의 균형이 맞을 때 이 길은 새로운 부흥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는다면 전쟁으로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실크로드로 떠나는 모험을 시작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까지가 내가 실크로드를 여행하며 보고 들은 이야기 들이다. 이 길엔 밤새 유령이 속삭이는 타클라마칸 사막과 하얀 양파꽃처럼 애잔한 누란, 신의 정원에서 살고 있는 파미르 사람들이 있다. 세상을 정복한 티무르 대제였지만 애첩 비비하눔의 마음을 다른 남자에게 빼앗겼고, 서역을 정벌했던 이겼던 고선지 장군이었지만 단 한번의 패배로 동양의 종이를 서양에 전해주게 되었다.
이곳엔 세월이 흐르며 바다가 말라붙은 마을이 있고, 47년째 지옥의 불이 타오르는 사막도 있다. 악에 굴복하지 말고 끝까지 싸우라고 가르쳤던 조로아스터의 불은 아직도 꺼지지 않았고, 세상의 절반 이스파한에는 손님을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동쪽의 사람들은 석굴을 파서 불교사원을 지었고 서쪽의 사람들은 석굴을 파서 교회를 지었다.
아직도 길은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이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길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낯선 이에게도 기꺼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마 다른 누군가가 이 길위에 서면 또 다른 이야기를 품고 돌아올 것이다. 발굴하지 못한 이야기는 아직도 많고, 또 길을 따라 계속 변하고 있을 테니.
마지막 이야기-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 '사막에서 집을 지을 때는 장미기름과 타조 알을 넣어 반죽한대' 저 사막에는 장미기름과 타조알을 반죽해 만든 집이 있고, 사람열매가 열리는 왁왁나무, 머리가 둘 달린 공명새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실크로드는 확실하지 않는 정보로만 가득한 신비의 세계였다. 늘 저 너머에 누가 사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환상을 따라 여행을 했다. 다른 세상에 대한 환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곳에 발을 딛는 순간 환상은 수많은 조각으로 부서졌다. 모든 세상이 "네가 생각한 것은, 사실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해줬다. 환상은 사라졌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공명조는 못 만났지만, 그곳에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현실과 환상이 만나 더욱 견고한 세상을 만들어냈다. 여행은 그랬다. 수백 번 머리 속에 그리던 풍경을 마침내 마주해 다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다. 그 길을 다 걸은 후, 다시 돌이켜 봤다. 그 길에는 늘 환상에 달뜬 뺨을 유리창에 대고 식히던 14살 여자 아이가 있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파리로 향했다. 한국 여행객들이 명품 가방 쇼핑백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여행을 떠나기 전 생각했던 명품 가방의 논제로 돌아갔다. 저 가방을 가지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결론은 '소용없다'였다.
저 가방을 가진다고 내 삶이 저 가방처럼 반짝거리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청담동 며느리 룩'으로 치장한다고 해도 날 며느리라 불러줄 청담동 시어머니는 없다. 사실 저 가방 하나쯤 가진다고 문제 될 것은 없지만, 굳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싶지는 않다.
그랬다. 그렇게 많은 지역을 여행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났음에도 나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여행은 인생을 바꿔주지 않는다. 단지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 기억들이 내 영혼과 사유의 빈틈을 메워주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내 마음의 결은 서서히 내가 만난 사람들을 따라 변해간다. 우리가 여행에서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런 종류다.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간 문명의 교류와 그 속에 숨어있는 우리의 흔적을 찾아해맸다. 하지만 한편 이 여정은 내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새삼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고, 달라지지 않는 정체성을 다시 껴안는 길이다. 길을 떠난 동안은 늘 이방인이었다. 돌아가서도 마찬가지다. '안녕, 너는 어디서 왔니? 너의 출신은 어디니?' 다름에 대해 주어지는 질문, 이방인은 영원히 도망칠 수 없는 질문들. 하지만 내 정체성의 마지막 조각은 그 질문을 받음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실크로드에서 만난 세상은 모두 달랐다. 하나도 같은 삶이 없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그냥 그렇게 살아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서로의 마음만 확인할 수 있다면.
덧붙이는 글 | 이렇게 2014년 4월부터 10월까지의 여행 중, 실크로드- 경주, 중국,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로마의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실크로드는 단순한 무역로가 아니라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은 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는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고 또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 또 하나의 실크로드가 그려지고, 그 길이 다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