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떠드는 귀뚜라미 소리가 도시의 자동차 소음 못지않게 시끄럽다. 옛 어른들의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는 말씀이 실감난다. 그래도 가을을 알리는 선두 주자는 뭐니 뭐니 해도 귀뚜라미인 것 같다.
멀리서 아련하게 어미 소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며칠째 계속되는 울음소리다. 귀뚜라미 소리에 덧대어 밤낮없이 울어대는 소리에 약간 짜증 섞인 불평을 하는 내게 남편이 말했다.
"아마 새끼랑 헤어져서 그러는 걸 거야, 그러니까 불쌍하게 생각하고 좀 참아요.""예? 새끼랑 헤어져서 그런지 어떻게 알아요?""옛날에 우리 집에서 소 키울 때 보니까 송아지를 떼어서 팔면 어미 소가 저렇게 울더라고."남편의 말을 듣고 귀 기울여 소 울음소리를 들어보니 정말로 구슬프기 짝이 없다. 얼마나 쉬지 않고 울어대는지 밥은 제대로 먹을까 하는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틀째 되는 날 밤에는 소의 목소리가 변해서 꺽꺽거리는 울음소리로 들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어디를 향해 저렇게 울부짖을까! 젖이 불어서 새끼를 찾는 것은 아닐까!
"송아지 떼어서 팔면 어미 소가 저렇게 울더라고"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급기야는 세월호 참사로 생각이 옮겨갔다. 짐승도 떠나버린 새끼가 그리워서 저렇게 울부짖는데 하물며 사람은 오죽할까! 사람이 미련해서 당장 내 피부로 겪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남의 설움을 당사자처럼 함께 아파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곁에서 함께 부대끼지 않고서는 더 모를 일이다.
짐승은 묶여 있는 신세여서 괴로워하거나 울다가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포기하겠지만, 사람은 그리움에 사무치면 자신도 몰래 이별했던 곳이나 사건 현장을 찾게 된다. 그러면 다시 진정됐던 슬픔이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서 모진 가슴앓이는 멈출 줄 모른다.
우리 집에도 아픈 이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써 20여 일째 벌어지고 있다. 7월 중순께 병아리 여덟 마리를 깠는데 이유 없이 한 마리, 두 마리 죽기 시작하더니 이젠 세 마리 밖에 남지 않았다. 남편은 닭장 소독을 하고 물을 매일 갈아주고 약도 먹이고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어른들 말씀으로는 여름 병아리는 건지기 힘들다고 했다. 닭은 원래 열이 많은 짐승인데다가 성질이 급해서 더위를 참지 못한다고도 했다. 더구나 병아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더욱 견디기 어렵다고들 했으나, 고놈들이 우리 부부에게 준 기쁨을 생각할 때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우리 부부는 병아리가 태어나고부터는 하루의 대화나 소일을 병아리로 시작해서 병아리로 마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애착을 가졌다. 심지어 병아리 노는 모습이 하도 귀여워서 방에서 닭장이 잘 보이는 창가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서 책을 읽다가 병아리를 보다가 했다.
어미 닭이 세 마리 남은 병아리를 정성껏 거두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벌레나 지렁이를 잡아다 주면 먹기 좋게 잘라서 병아리들을 불러서 먹였다. 그리고 저는 땅을 헤집으며 또 먹을 것을 구하곤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착잡했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붉은 피를 가진 것들은, 몸에 따스한 온기가 있는 짐승은 키우지 말자고.
온 동네가 참깨 터는 소리로 타닥타닥
사흘째 되는 날 저녁, 귀뚜라미 소리는 여전한데 어미 소의 울음소리가 안 들린다. 체념했거나 지치거나 했나보다. 귀를 세우고 들어봐도 이젠 조용하다. 다음 날 아침나절 또 귀 기울여 들어봐도 안 들린다. 그 대신 온 동네에 참깨 터는 소리가 타닥타닥 난다. 리드미컬한 소리가 가라앉았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준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니 덜 마른 참깨 다발을 담에 기대어 말리고 있는 집, 마른 참깨를 터는 집, 집집마다 참깨농사를 마무리 하느라고 바쁘다.
한 집에 들어갔다. 그 집 역시 아주머니가 참깨를 털고 있었다. 아주머니께 네 식구가 1년 먹을 기름을 짜자면 참깨가 얼마나 있어야 되느냐고 물었더니 먹기 나름이겠지만 다섯 되 정도면 충분할 것이란다. 참깨 다섯 되를 주문하고, 아주머니가 털어서 플라스틱 함지에 담아 놓은 참깨의 검불을 함지째 키질했다. 검불이 잘 안 나가서 입으로 후후 불면서 키질을 하는 나를 본 아주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그런 건 어디서 배웠디야?' 하더니 선풍기를 들고 나왔다.
마당에 선풍기를 뭐 하러 가지고 나오느냐고 묻는 내게 '그런 게 있어'라며 돗자리에 참깨를 쫙 펴 놓고 선풍기를 틀었다. 긴 밀대로 참깨를 뒤적이자 선풍기 바람에 검불이 순식간에 날아가고 뽀얀 참깨가 말간 얼굴을 드러냈다.
옛말에 '힘쓰기보다 꾀쓰는 게 낫다'는 말이 있는데, 이 정도의 꾀라면 정말 지혜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미 소의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해서 세월호로 이어져서 병아리의 죽음까지 착잡하고 울적했던 마음을 참깨 다발에 다 부려 놓으려는 것처럼, 타닥타닥 나도 열심히 참깨를 털었다. 참깨 다발을 두드리다가 또 난데없는 생각이 든다. 아, 이래서 아녀자들이 속상할 때 북어를 패는구나!
언제 안으로 들어갔는지 아주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손을 멈추고 돌아보니 마루에 점심을 차려놓고 같이 먹자고 한다. 양푼에 푸성귀를 손으로 북북 찢어 넣고 직접 농사지어서 짠 참기름에 참깨까지 듬뿍 넣어 비벼 먹는 양푼 비빔밥은 일류 호텔에서 먹는 스테이크보다 맛있다.
참깨 터는 고소한 소리로 살아 있음을, 아니, 어미 소의 울음소리마저 우리가 살아 있음을 깨닫게 했던 어제였다. 이 모든 일들이 내일이면 돌팔매에 겹겹이 퍼져나가던 포물선이 멈춘 자리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밝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