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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세상에 태어날 때 당신만 울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날 때 당신만 미소 짓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이 울도록 그런 인생을 사십시오."(책 <너무 멀리서 찾지 마라> 286쪽)

김수환 추기경께서 생전에 한 말이라고 합니다. 정운스님은 지난 5월, 청도 운문사에서 입적하신 스님, 흥륜스님의 입적을 이 말에 기대어 추모하며 책을 맺습니다.

정운스님이 눌린 누룽지 <너무 멀리서 찾지 마라>

<너무 멀리서 찾지 마라> (지은이 정운 / 펴낸곳 (주)조계종출판사 / 2015년 8월 31일 / 값 13,800원>
 <너무 멀리서 찾지 마라> (지은이 정운 / 펴낸곳 (주)조계종출판사 / 2015년 8월 31일 / 값 13,800원>
ⓒ (주)조계종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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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멀리서 찾지 마라>(지은이 정운, 펴낸곳 (주)조계종출판사)는 저자인 정운 스님이 <불교신문> '불교 교리'코너에 2년간 연재했던 내용을 다듬고 보충해 펴낸 신간입니다.

음식에 맛이 있다면 책에는 감상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 감상이 어떤 음식을 연상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필자가 떠오른 음식은 누룽지입니다.

그때는 주전부리거리도 참 만만치 않았습니다. 국수를 하는 날은 국수를 썰다 조금 남겨주는 꼬랑지를 얻어 구워 먹는 게 최고의 간식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가장 흔하고 맛나게 먹었던 주전부리는 아무래도 누룽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무쇠 가마솥에 불을 때 밥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밥을 다 푸고 난 솥바닥을 보면 누룽지가 두툼하게 눌어 붙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목 길게 빼고 꼴깍거리며 침 삼키고 있는 동심 무시하고, 물을 한두 바가지 새로 넣고 숭늉을 우려내는 날도 있지만 어떤 때는 일부러 남겨 두는 날도 있습니다.

손바닥보다도 큰 누룽지, 커다란 주걱으로 쓱쓱 밀어낸 누룽지는 엄마표 누룽지입니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아직 설거지를 하지 않는 솥바닥을 숟가락으로 닥닥 긁어 꾹꾹 눌러 뭉치는 주먹 누룽지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쌀밥 누룽지도 맛있지만 콩알도 듬성듬성 씹히고 보리알갱이도 심심찮게 들어가 있는 잡곡밥 누룽지면 더 맛있습니다. 동심을 부자로 만들어 주는 부자맛입니다. 숟갈로 퍼먹는 밥에서는 알갱들이 잘 구분되지 않지만 누룽지로 먹을 때는 콩, 보리, 쌀 알갱이가 한 알 한 알 구분돼 씹는 맛도 훨씬 재밌습니다.

어느 날 원효가 대안을 만나기 위해 굴로 찾아갔다. 그런데 대안은 없고 너구리 한 마리가 죽어 있었는데 새끼 너구리가 죽은 어미 곁에서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원효는 죽은 너구리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아미타경>을 염하였다.

이때 대안이 들어와 원효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원효가 죽은 너구리에게 염불을 해 주고 있다고 하자, 대안이 이렇게 말했다. 

"이 새끼 너구리가 경을 알아듣겠소!"
그리고 동냥해서 얻어온 젖을 너구리에게 먹이며, 원효에게 말했다.
"이것이 너구리가 알아듣는 <아미타경>입니다." - <너무 멀리서 찾지 마라> 35쪽

맞습니다. '소귀에 경 읽기'란 말이 있습니다. 알아들을 리 없는 소귀에 대고 아무리 좋은 말을 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소통'과 '눈높이 교육'은 오늘만의 화두가 아니라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최소한의 지혜이자 실천덕목임을 알 수 있습니다. 

70여 편의 글, 하나하나 마다 맛있네

책에 실린 70여 편의 글 하나하나 마다 알갱이 같은 맛이 있습니다. 누룽지로 먹을 때 씹히는 콩, 보리, 쌀 알갱이처럼 감상으로 되씹히는 맛이 한 꼭지 한 꼭지 구분되며 구수한 맛으로 조화를 이룹니다. 글 대부분은 부처님 말씀은 물론 한·중·일 역대 선승·선인들이 남긴 어록에 정운 스님이 마음(생각)을 불 때 눌린 누룽지 같은 내용입니다.

"그대들은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말사 주지가 되지 마라." - <너무 멀리서 찾지 마라> 130쪽

이 말은 청정한 승려로 추앙받고 있는 일본 하쿠인(白隱, 1685∼1766)에게, 개인 의사는 묻지도 않고 본사에서 대법회 법사로 임명하자 이를 거부하고 제자들에게 남긴 말이라고 합니다.

어떤 스님들, 주지자리를 놓고 어떤 거래를 해 법적처벌을 받은 일부 스님들에게는 서슬 퍼런 불호령처럼 들릴 말입니다. 지난달 말, 용주사 일주문을 막아서는 데 동원된 스님들에게는 가슴을 뜨끔하게 하는 양심의 소리로 들릴 말이라 생각됩니다.

좋은 글, 좋은 가르침,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을 골고루 담고 있는 좋은 책을 너무 멀리서 찾지 마십시오. <너무 멀리서 찾지 마라>에서 마음이 구수해지는 좋은 글, 마음을 부자로 만들어 주고 어리석음을 깨칠 수 있는 좋은 가르침을 닥닥 긁어가는 감상으로 주먹누룽지를 챙기듯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 <너무 멀리서 찾지 마라> (지은이 정운 / 펴낸곳 (주)조계종출판사 / 2015년 8월 31일 / 값 13,800원>



너무 멀리서 찾지 마라 - 경전과 선사들의 일화에서 배우는 앎과 삶

정운 지음, 조계종출판사(2015)


태그:#너무 멀리서 찾지 마라, #정운, #(주)조계종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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