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군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 고 허원근 일병의 죽음은 결국 누구의 책임도 묻지 못하게 됐다.
10일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허 일병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금 청구소송에서 군의 부실수사 책임을 인정한 항소심 판결을 확정했다. 다만 허 일병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판단하지 않았다. '단정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석연찮은 죽음... 자살-타살 계속 뒤집혀
욱군 7사단 3연대 1대대 3중대에서 근무하던 허 일병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은 1984년 4월 2일 오전 11시경이었다. 그는 중대본부 내무반 근처 폐유류고 뒤에서 가슴에 2발, 머리에 1발의 총상을 입은 채 숨져 있었다. 당시 육군은 세 차례에 걸쳐 허 일병이 자살했다고 결론 내렸다. 1990년 육군 범죄수사단, 1995년 육군본부 법무감실의 재조사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2000년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의문사위) 판단은 달랐다. 허 일병의 아버지 허원근씨의 진정으로 조사를 개시한 의문사위는 2002년 9월 10일, 허 일병은 누군가의 총에 맞아 숨졌다고 발표했다. 1984년 4월 1일 밤 내무반 술자리에서 시비가 붙은 과정에서 허 일병이 오른쪽 가슴에 M16 소총을 맞고 쓰려졌다는 것이었다. 의문사위는 중대장 등이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내무반을 물청소하고, 허 일병을 폐유류고 뒤로 옮긴 다음 왼쪽 가슴과 오른쪽 머리에 M16 소총으로 두 발을 더 쏘았다고 했다.
국방부는 의문사위가 그해 8월 20일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자마자 곧바로 특별조사단을 꾸렸다. 그리고 의문사위 최종 발표 한 달 뒤, '내무반에서 총기사고는 없었다'는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2002년 11월 28일 내놓은 최종 결론 역시 기존과 똑같았다. 군이 계속 허 일병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말하자 의문사위도 재조사에 들어갔다. 이들의 결론도 그대로였다. 2004년 6월 28일, 의문사위는 다시 한 번 허 일병이 누군가의 손에 총을 맞고 숨졌다고 발표했다.
유족들은 의문사위 결과를 바탕으로 국가배상금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36부·재판장 김흥준 부장판사)는 3년가량 심리한 끝에 허 일병의 죽음을 타살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 허 일병이 머리에 입은 총상이 치명적이었지만 제일 먼저 맞은 것으로 보이고 ▲ 그의 왼손에 남은 상처는 목숨을 끊기 위해 총을 휘둘렀다기보다는 총구를 막으려다 찢어졌다고 보기가 자연스러우며 ▲ 시신이 발견된 폐유류고 주변에 피나 뇌 조직이 흩어진 흔적이 거의 없었고 ▲ 허 일병은 휴가를 불과 하루 앞두고 있던 점 등을 볼 때 그가 누군가의 총에 맞아 숨졌다고 봤다.
1심과 심리 기간은 비슷했지만 항소심 재판부(서울고등법원 민사9부·재판장 강민구 부장판사) 결론은 달랐다.
재판부는 ▲ 이 사건 관련자들의 의문사위 진술은 조사관들의 유도 심문 결과라 믿을 수 없고 ▲ 만약 허 일병이 머리에 총을 맞아 숨졌다면 굳이 가슴에 다시 총을 쏴서 자살로 위장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 현장에서 골편 등 두부총상의 흔적 일부가 나오긴 했고, ▲ 누군가 죽은 허 일병을 옮긴 흔적이 시신에 남지 않은 점 등도 허 일병의 자살 가능성을 뒷받침한다고 결론 내렸다.
항소심 재판부는 그러나 당시 군 수사기관이 총기사고의 핵심 요소인 총기 감정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허 일병이 실제로 그런 상처를 혼자 낼 수 있는지 등은 조사하지 않는 등 현저하게 부실한 수사를 했다고 지적했다. 또 국가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며 1심이 정한 국가배상금 9억2000만 원 가운데 3억 원을 지급하라고 했다.
그날 M16 소총 방아쇠는 누가 당겼을까
남은 것은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었다. 2년 동안 고심한 끝에 대법원은 항소심의 판단을 유지했다. 하지만 허 일병이 도대체 왜 죽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는 어정쩡한 결론이었다.
대법원은 법의학자들의 소견,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만으로 허 일병이 타살당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허 일병의 총상이 모두 살아있을 때 생겼다고 할 수 없고, 그가 가슴에 총상을 입은 채 머리에 다시 총을 쓰는 자세가 가능한지 등은 의문스럽다며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인정하기도 어렵다고 봤다.
31년 동안 8번의 조사가 이뤄졌지만 끝내 누가 M16 소총 방아쇠를 당겼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이 사법부의 최종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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