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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열흘 만에 집 밖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열흘 만에 집 밖으로 나가 보기 앞서 뒤꼍도 올라 봅니다. 환삼덩굴 하나가 유자나무 줄기를 감아서 오르는 모습이 보이지만, 아직 내 다리로는 유자나무한테까지 가서 환삼덩굴을 쳐 줄 엄두를 못 냅니다. 마당으로 내려설 뿐 아니라 뒤꼍을 오르고, 마을 어귀까지 걸을 수 있으니, 이만큼 걸을 수 있어도 고맙다고 느낍니다.

지난 열흘 동안 거의 이부자리에 드러누워 끙끙 앓았습니다. 오른무릎이 크게 다쳐서 오른무릎을 고치고 다스리느라 온 하루를 보냈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흐름은 지켜볼 수 있지만, 하늘에 구름이 얼마나 떴는가를 내다볼 수 없는 채 지냈습니다. 바람이 부는구나 하고 느끼지만, 맨몸으로 바람을 맞이할 수 없는 채 지냈어요. 열흘 만에 이 모두를 하고 보니 더없이 새롭습니다. 아기가 첫걸음을 뗀 듯이, 아이가 제 다리로 신나게 달릴 수 있듯이, 하늘도 바람도 구름도 들도 모두 새롭게 바라보면서 천천히 걸어 보았습니다.

 겉그림
겉그림 ⓒ 문학세계사
이 집에서 영원한 건 없다 / 사탄도 솔로몬 왕도 다 떠난다 / 지붕이든 천장이든 발코니든 / 금이 가고 부서지며 무너지니까 / 가난한 자의 집만 주저앉는 게 아니다 / 궁월 또한 마찬가지 (하빕 야그머이-영원한 건 없다)

어머니 날 낳으시고 / 젖 무는 법 알려 주셨다 // 밤이면 머리맡 / 뜬눈으로 날 잠재우시고 // 손잡고 한 발짝 두 발짝 / 걸음마 일러 주셨다 // 혀끝에 단어 한 마디, 한 마디 놓아 / 말 트이게 해 주셨고 (이라즈 미르저-어머니)

이란 시인 일흔한 사람 노랫가락이 깃든 시집 <백 년의 시간 천 개의 꽃송이>(문학세계사,2015)를 읽었습니다. 오른무릎이 몹시 아프고 몸살이 돌 적에는 그저 땀만 뻘뻘 흘리면서 앓고, 아픔이 가신 뒤에 큰숨을 돌릴 만한 겨를이 나면 한동안 오른손을 오른무릎 둘레를 살며시 감싸고 나서 시집을 천천히 읽었습니다.

이란에서는 시를 문학이 아닌 노래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저 노래하는 이야기인 시요,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인 시이며, 사랑을 노래하는 이야기인 시라고 해요. 이란말을 한국말로 옮긴 최인화 님은 '이란사람 삶노래·사랑노래'를 한국말로 옮기면서 이란말에 있는 남다른 가락을 살리지 못한 듯하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한국말을 이란말로 옮길 적에도 이와 같아요. 먼먼 옛날부터 전라도 시골마을에서 이어온 들노래를 이란말로 어떻게 옮기겠어요? 경상도 바닷마을 뱃노래를 이란말로 어떻게 옮길까요? 비록 두 나라와 겨레가 달라서 결과 가락까지 옮기지 못한다고 하지만, 시라는 틀에 담은 이야기는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시집을 읽으면서 시에 담은 삶과 노래와 꿈을 헤아립니다.

새장 속 앵무새가 건네는 신년 인사 / 현명한 자라면 단번에 안다 / 그저 흉내내기에 불과하단 것을 (파로히 아즈디-감옥에서 맞는 새해)

마음이 불탄 후에야 / 비로소 영혼을 울리는 말이 나온다 / 마음이 어떤지 궁금한가? / 말에 귀 기울여 보라 (네점 바퍼-사랑을 향하여)

오른무릎이 웬만큼 나았으니 걸음을 뗄 만합니다. 집에서 방과 마루와 부엌 사이를 이럭저럭 걸어서 오갈 수 있다 싶으니 대문 밖으로 나와서 마을을 한 바퀴 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래 걷지는 못 합니다. 마을 어귀 빨래터 울타리에 앉아서 다리를 쉽니다. 큰아이는 아버지하고 함께 걸어 줍니다. 아버지가 빨래터 울타리에 앉아서 다리를 쉬는 동안, 큰아이는 배롱나무 밑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춤을 춥니다.

아버지를 기다려 주는 여덟 살 아이를 바라보다가, 문득 이 아이를 처음 걸리려고 하던 일곱 해 앞서가 떠오릅니다. 높직한 계단도 씩씩하게 온몸을 써서 타고 내려오던 아이요, 누가 손을 잡아 주겠다면 싫다면서 뿌리치고 혼자 계단을 타고 내려오던 아이입니다. 집 바깥에서 처음으로 걷던 날도 어머니랑 아버지가 손을 잡지 말라며 뿌리쳤지만, 몇 걸음을 안 잡아 줄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씩씩하게 몇 걸음 걷도록 한 뒤 대견하다면서 품에 안았습니다. 이 예쁘고 튼튼한 다리에 조금씩 힘살을 붙여서 앞으로 더욱 멋지게 걷자고 속삭였습니다.

이제 여덟 살 어린이는 마흔 살 넘은 아버지더러 "다 쉬었어? 이제 다시 걸어도 돼? 기운 내요, 아버지!" 하고 외쳐 줍니다.

강가 사람들은 물 소중한 줄 알아서 / 절대 물 흐리는 법이 없다 / 그러니 우리 또한 / 물 흐리지 말자 (소흐럽 세페흐리-물)

밤처럼 위대한 그대 / 달빛이 있든 없든 / 밤처럼 위대한 그대 (아흐마드 셤루-나는 나무, 그대는 비)

 걸음도 잘 떼고 신나게 뛰놀 줄 아는 큰아이는 동생이 태어난 뒤 '인형업기' 놀이를 자주 했습니다.
걸음도 잘 떼고 신나게 뛰놀 줄 아는 큰아이는 동생이 태어난 뒤 '인형업기' 놀이를 자주 했습니다. ⓒ 최종규

이란 시집 <백 년의 시간 천 개의 꽃송이>를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백 해에 이르는 시간이라면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다'고 하는 시간이라고 할 만합니다. 천 개에 이르는 꽃송이라면 '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시간이라고 할 만합니다. 다만, 나무는 천 해뿐 아니라 오천 해나 만 해도 살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사람들이 집을 짓는 나무로 삼는 나무는 '천 해쯤 산 나무'예요. 꽃송이를 천 번쯤 피우면서 삶을 누린 나무가 바로 집을 든든하게 버티면서 오래도록 아름다운 숨결을 이어 주는 바탕이 되어 줍니다.

천 해를 묵은 나무를 베어서 집을 지으면, 이 나무가 자라던 자리는 어떻게 할까요? 네, 다시 나무를 심어요. 그리고, 천 해 동안 이 나무가 잘 자라도록 건사합니다. 오늘 '천 해 묵은 나무'로 집을 지은 뒤, 앞으로 천 해 동안 이 집을 알뜰살뜰 건사하도록 모두 힘을 쏟고, 앞으로 새로운 천 해 동안 새로운 나무가 자라고 나면, 천 해 뒤에 이 땅에서 새롭게 살아갈 뒷사람은 '새롭게 천 해 묵은 나무'를 베어서 '새롭게 천 해를 이을 집'을 짓고는, 다시 나무 한 그루를 심어서 새로운 천 해가 흘러서 새로운 뒷사람이 기쁘게 삶을 누릴 수 있는 터전을 가꿉니다.

시간이 많지 않다 / 어서 길을 나서야 한다 / 꽃과 나무에게 / 일일이 인사를 건네야 한다 / 세상 모든 샘물 가에 / 깨어 있는 정신으로 앉아 / 그 맑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 얼굴을 단장해야 한다 (알리 무사비 가르머루디-시간이 많지 않다)

어머니는 죽었으나 여전히 우리를 보살핀다 / 우리 생활 곳곳 어머니의 흔적이 꿈틀댄다 / 집 안 구석구석 어머니의 이야기가 묻어 있다 / 당신 추도식에서조차 일을 하느랴 여념이 없다 (샤흐리여르-어머니, 내 어머니)

시 한 줄이라면 모름지기 '백 해를 사는 사람'이 이녁 온 삶을 바쳐서 얻은 슬기를 그러모아서 '천 해를 잇는 살림'에 걸쳐서 흐를 만한 시 한 줄이어야지 싶습니다. 천 해 동안 부를 만한 노래이기에 노래인 셈입니다. 천 해에 이르는 삶이 녹아든 노래요, 천 해에 이를 삶을 북돋울 노래예요.

들일을 하며 부르던 들노래도, 숲에서 삶을 지으며 부르던 숲노래도, 마당에서 잔치도 벌이고 일도 하며 부르던 마당노래도, 집집마다 오순도순 아이를 돌보며 나누던 집노래도, 참말 모두 아름다운 사랑이 깃드는 노래입니다. 천 해뿐 아니라 만 해나 백만 해를 넉넉히 잇는 노래예요.

사랑 없는 삶은 그 자체로 죽음이다 / 매 순간 죽는다는 것, 참 어렵지 않을까? // 사랑 없는 삶은 웃음 잃은 입술이다 / 웃음 잃은 입술은 웃는 대신 울어야 한다 // 사랑 없는 삶은 끝없는 추락이다 / 사랑하지 않는 자에겐 사방이 지옥이다 (게이사르 아민푸르-수수께끼)

나 어렸을 적엔 / 물, 땅, 공기가 더 많았어 / 귀뚜라미는 / 밤마다 / 달빛의 음악에 맞춰 깊은 어두움 속에서 / 노래 부르곤 했지 (에스머일 호이-나 어렸을 적엔)

이란 시집 <백 년의 시간 천 개의 꽃송이>처럼 한국에서도 천 해를 흐를 만한 이야기를 담는 시가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담을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지난 천 해 동안 어떤 슬기를 그러모은 노래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오늘 우리가 새로 짓는 노래는 앞으로 천 해에 걸쳐 우리 뒷사람한테 어떤 슬기를 물려주려고 짓는 노래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인기가요가 되어야 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인기차트에 올라야 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앨범이 불티나게 팔려야 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방송에 자주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누구나 부르면서 웃을 만한 노래여야 합니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부를 만한 노래여야 합니다. 도시와 시골에서 어깨동무하며 부를 만한 노래여야 합니다.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 없이, 계급이나 신분에 따라 푸대접하는 일이 없이, 성차별이나 지역차별이나 온갖 차별 따위는 하나도 없이, 말 그대로 사랑하는 삶을 부르는 노래여야 합니다.

인파 속에서 고아 하나가 물었다 / 저기 임금님 머리에 반짝이는 게 뭐예요? // 누군가 대답했다 : 저게 뭔지 우린들 어찌 알겠니 / 다만 값비싼 물건인 건 분명하구나 // 꼬부랑 노파가 가까이 가 보더니 말했다 / 이건 내 눈물이자 자네들이 흘린 핏방울이야 (파르빈 에테서미-고아의 눈물)

내 작은 나무야, 너는 봄을 사랑하여라 / 샘물의 친구가 되고 개울물의 고통도 나누어라 / 네 그림자는 길지 않으나 / 산 높이 걸린 태양의 당당함을 가져라 / 푸르고 생생한 이파리들은 너만의 낱말 / 그 낱말들로 세월 높이만큼 우뚝 선 시가 되어라 (바흐만 설레히-내 작은 나무)

 걸음을 뗀 아이는 신집에 가서 제 발에 맞는 신을 고릅니다. 걸음을 뗄 수 있는 삶이란 스스로 하루를 짓는다는 뜻이 되겠지요.
걸음을 뗀 아이는 신집에 가서 제 발에 맞는 신을 고릅니다. 걸음을 뗄 수 있는 삶이란 스스로 하루를 짓는다는 뜻이 되겠지요. ⓒ 최종규

두 다리로 처음 걷던 날을 떠올립니다. 내가 어머니와 아버지 손을 잡고 처음으로 아장걸음을 떼던 날을 떠올립니다. 몇 년 몇 월 몇 일인지 또렷이 알지 못합니다만, 내 몸은 이를 또렷이 알리라 느껴요.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두 다리로 처음 걷고, 처음 뛰며, 처음 달리던 날을 떠올립니다. 걷거나 뛰거나 달리다가 넘어져서 울던 날을, 넘어졌어도 씩씩하게 다시 일어서던 날을, 차근차근 떠올립니다. 여기에다가 내가 다리를 다쳐서 자리에서 꼼짝을 못하고 날마다 깊은 늪에 빠지듯이 끙끙 앓으면서 괴로웠던 아흐레를 떠올립니다. 다시 일어서서 새롭게 걸음을 옮긴 오늘을 떠올립니다.

삶이 노래가 되고, 노래가 삶이 됩니다. 삶을 노래하면서 사랑이 깨어나고, 사랑을 깨우면서 삶을 노래합니다. 처음 걸음을 떼던 기쁨처럼, 새롭게 걸음을 뗄 수 있어서 싱그러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즐거움처럼, 스스로 짓고 스스로 씩씩하며 스스로 아름답게 나아갈 이 길에서 부를 노래를 마음으로 고요히 그립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책이름 : 백 년의 시간 천 개의 꽃송이
이란 시인 일흔한 사람 글
최인화 옮김
문학세계사 펴냄, 2015.8.25.
12000원



백 년의 시간 천 개의 꽃송이 - 오늘의 이란 시와 시인들

에스마일 셔루디 외 지음, 최인화 옮김, 문학세계사(2015)


#백 년의 시간 천 개의 꽃송이#이란 문학#시읽기#문학읽기#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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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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