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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대 고개에서 출발해 현륭원까지 가는 정조대왕의 원행길. 현재는 수원의 8색길 중 7색길인 효행길이다. 도시화로 인해 본래의 길에서 벗어난 곳도 많지만 정조대왕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효를 느껴보는 길로, 자연적인 경관보다는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에서 답사를 하는 데 의미있다.

지지대고개에 있는 지지대비
▲ 지지대비 지지대고개에 있는 지지대비
ⓒ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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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대비를 보고 효행길을 출발하자마자 8차선 국도가 답사길을 가로막고 있다. 길 건너편 프랑스군 참전기념비가 있는 효행공원이 효행길로 이어지고 있는 것인데, 멀리 돌아서 가는 수 밖에 없다. 효행길을 답사하려면 효행공원에서 출발하는게 무난할 것 같다.

광교산 등산로와 갈라지는 산쪽으로 붙은 길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괴목정교를 만날 수 있고 괴목정교를 지나면 우측으로 느티나무 몇 그루가 있는데 이 느티나무로 인해 괴목정교란 이름이 생긴게 아닌지 생각해본다. 느티나무 있는 곳을 지나면 또다시 큰 대로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 길을 건너 노송지대에 접어들면 차량통행만 없다면 한적할만한 운치있는 노송길이 이어진다.

노송길을 지나면 효행길은 길을 잃고 도시를 헤매다가 만석거에 이르러서야 잠시나마 한적한 효행길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답사를 하다보면 자주 끊어지는 길 때문에 의미없고 지루해 얼마 가지못해 짜증이 날 만하다.

효행길을 답사할때는 정조대왕의 발자취를 따라, 당시의 필로(蹕路)를 생각하면서 길가에 세워졌던 표석(標石)이나 장승(長栍)이 있었던 위치를 찾아보며 답사를 해야 제대로된 효행길 답사가 될 수 있다.

정조대왕때 심은 소나무,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 효행길가의 소나무 정조대왕때 심은 소나무,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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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본 뎡리의궤'를 보면, 1796년 1월 정조대왕이 원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미륵현(彌勒峴)이란 고개 이름을 지지현(遲遲峴)으로 고쳤다. 왕의 행차가 머무르던 곳에 있는 축대를 지지대(遲遲臺)라 일컫고, 지지대부터 원소(園所) 동구(洞口)까지 일체로 표석을 세워 지명을 새기라 하고, 관길야(觀吉野), 대유평(大有坪), 만석거(萬石渠), 여의교(如意橋), 영화정(迎華亭)이란 이름을 명명했다.

만석거 표석은 유수인 조심태, 대유평은 도청인 이유경, 여의교는 책응도청 홍원섭이 써서 각각 돌을 깎아 새겨서 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나온다. 원행길 표석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찾은 것이다.

1796년 2월 2일 화성성역의궤의 내관(來關)편에 '정리의궤청에서 살펴볼 일'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현륭원에 행차할 때 가마길이 지나가는 땅의 경계가 되는 곳에 돌에 글을 새겨서 표로써 길옆에 세워두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하교 안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들어 시행하되 병조에서 임금님의 재가를 받고 내려 보낸 절목 중에 도로의 땅이름을 뒤에 부록으로 기록하여 공문으로 발송합니다.

그러니 뒤에 부록으로 들어있는 도로를 일일이 살펴서 각각 그 지방의 경계가 갈리는 곳으로서 제일 먼저 자리잡은 경계 위에 장소를 잡아서 돌을 세우되 그 땅 이름을 써서 그에 따르는 처소의 경계를 정하도록 할 것이며 거행한 전말을 우선 빨리 보고할 것을 공문으로 접수합니다.'

'지지대고개(遲遲峴), 지지대(遲遲臺), 괴목정(槐木亭), 진목정교(眞木亭橋), 만석거(萬石渠), 대유평(大有坪), 관길야(觀吉野), 영화정(迎華亭), 매교(梅橋), 상류천(上柳川), 하류천(下柳川), 황교(皇橋), 옹봉(甕峯), 대황교(大皇橋), 유첨고개(逌瞻峴), 유근다리(逌覲橋), 만년제(萬年堤), 안녕리(安寧里)'라고 열여덟 곳이 기록돼 있다.

정조대왕 원행길에 세워졌던 표석(복제품)
▲ 괴목정교 표석 정조대왕 원행길에 세워졌던 표석(복제품)
ⓒ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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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년 5월 10일 화성성역의궤의 이문(移文)편에 살펴볼 일 이란 기록이 나온다.

'가마길이 지나는 땅의 경계가 나뉘는 곳에 돌을 새겨서 표를 세우는 일을 하교하셨는데, 뜻을 받들어 도로를 일일이 살펴서 각기 지방관의 처음 경계가 나뉘는 곳에다 지명을 돌로 새겨서 세워 지명을 세운 곳을 따라 경계를 정하게 하며, 거행한 사실의 전말을 우선 보고서를 올리라고 하였는바 지금 공문의 말대로 돌을 새겨 표를 세웠습니다.

다만 뒤에 수록한 것 중에 차례가 바뀌어 있는 것과 다리 이름을 바꾼 것이 있으므로 아울러 바로잡아 뒤에 수록하여 보고서를 올리니 본소 문서 중에서도 이것대로 바로잡도록 하기 바랍니다. (정리의궤청)

진목정교(眞木亭橋) 여의교(如意橋)로 바꿈.
만석거(萬石渠), 영화정(迎華亭), 대유평(大有坪), 관길야(觀吉野) 이상은 차례를 바로 잡음.'

돌을 새겨 표로 세웠다는 이와같은 기록으로 볼 때 1796년 봄에 이미 18곳에 표석이 세워졌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런데 화성성역의궤의 또다른 기록인 재용(財用)편의 실입(實入)3에 표석에 대한 다른 기록이 나온다. 16덩이(지지현, 괴목정교, 여의교, 만석거, 대유평, 관길야, 매교, 상류천, 하류천, 옹봉, 소황교, 대황교, 안녕리, 유첨현, 유근교, 만년제 모두 16곳), 이상을 떠낸 값이 40냥.

이 기록으로 인해 필로에 세워진 표석의 수를 16개로 잘못 알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정조대왕 능행길에 있는 표석(복제품)
▲ 만석거 표석 정조대왕 능행길에 있는 표석(복제품)
ⓒ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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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1년 화성유수인 박기수의 주관으로 편찬한 '화성지(華城志)' '필로'에 의하면 원행길에 세워진 표석과 장승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세월이 흘러서인지 위 기록과 약간 차이를 보인다. 1899년 편찬한 '수원군읍지'의 '필로'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 책은 화성지를 저본으로 편찬한 것이니 화성지의 기록으로 살펴보겠다.

화성지 필로에 표석과 장승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효행길을 따라가 보자.

'지지현'에는 표석과 장승이 세워졌고, 10여보 아래 축대 대면에 '지지대'라고 새겼는데 정조대왕이 원행길을 마치고 환궁할 때면 이곳에 이르러 어가를 멈췄다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그 아래에 '주필대'라고 축대 대면에 새긴 것이 있는데, '어린이 풀잎 생태미술체험관' 맞은편 어디쯤에 있었을 것 같다.

조금 더 내려가면 '괴목정교' 표석이 있고, 그 아래 일용리(日用里)에는 장승이 세워져 있었다. 일용리에서 3리를 가면 '여의교', '만석거' 표석이 있고, 만석거에서 백여보 가면 '기하동'에 장승이 세워져 있었다. 이어서 '대유평', '영화역', '관길야' '매교'에는 표석이, '상류천' 에는 표석과 장승이 있었다. '재간현', '만화현', '건장동'에는 장승이 세워져 있었다. '하류천', '황교'에는 표석이 있고, '옹봉'에는 표석과 장승이, '대황교'에는 표석이, '능원소화소'에는 '화소'란 표석이 '유첨현', '안녕리'에는 표석과 장승이, '유근교', '만년제'는 표석이, 능원소동구에는 장승이 세워졌다.

지지현으로부터 능원소동구 까지 약 44리에 표석이 18곳, 장승이 11곳인데 약 5리마다 설치된 것이다.

처음에는 표석이 18곳에 설치되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표석이 없어졌거나 새로 만들어 세운 것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효행길에 남아있는 것은 몇 개 없지만, 표석과 장승이 세워졌던 곳을 지나면서 옛일을 상고한다면 답사길이 의미있게 다가올 것이다. 가을날 효행길을 걸으며 숨겨진 보물을 찾듯이 답사를 떠나보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e수원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정조대왕, #효행길, #괴목정교, #만석거, #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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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을 가슴에 안고 살면서 고전과 서예에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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