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굴과 나는 동지다. <무한도전>을 볼 때만. 토요일, 제굴은 일어나자마자 친구 만나러 나간다. 늦어도 오후 5시쯤에는 집으로 온다. 씻고, 이른 저녁을 먹고, 의관정재를 한 다음에 소파에 앉는다.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보며 본방송을 기다린다. 사람 신경을 건드리는 전문기술자 꽃차남이 울며 떼를 써도, 제굴과 나는 뜨거운 동지애로 이겨낸다.
그러나 나와 제굴의 견고한 연대도 꽃차남과 시후(꽃차남 친구, 우리 집 위층에 산다)의 맹공에는 무너진다. 그날도 그랬다. 토요일 오전 내내 시후네 집에 가서 논 꽃차남은 오후에는 시후와 같이 내려왔다. 우리는 일곱 살 남자 '두 분'에게 "저녁밥 빨리 먹자"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먹히지 않았다. 하필이면 '두 분'은 <무한도전>시작하자 지시를 내렸다.
"밥 줘요. 배고파!" 나는 재깍 "엄마는 불혹이 넘어서 귀가 잘 안 들려"라고 했다. 이제 제굴이가 "아까 먹으라고 했어? 안 했어?" 할 차례였다. 그러나 제굴은 순순히 일어나서 부엌으로 갔다. 정육점에서 사다 놓은 돼지고기 등심으로 수제돈가스를 만들었다. 따로 돈가스용 소스도 만들었다. 밥도 곰돌이 모양 틀에 넣어서 두 개를 만들었다.
시후와 꽃차남은 제굴이가 차려준 밥상을 보고 "우리, 레스토랑 온 것 같지?" 하며 좋아했다. 깨가 뿌려진 곰돌이 밥과 파슬리 가루가 뿌려진 곰돌이 밥 중에서 어떤 게 더 맛있냐고 물었다. 제굴은 흐뭇한 얼굴로 동생들의 돈가스를 썰어주었다. 일곱 살 남자 '두 분'이 장식으로 해 놓은 야채와 방울토마토를 걷어내도 혼내지 않았다.
"엄마, 나 진짜로 주니어 세트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돈가스랑 밥이 있으니까 양이 꽤 많은 편이었거든요. 애들이 다 먹으니까 기분 좋죠. 애들이니까 야채는 당연히 안 먹어요. 야채는요, 야채 맛을 알았을 때 먹는 거예요. 나도 진짜 나중에 그 맛을 알았어요."
제굴은 태어나서부터 입이 짧았다. 잠도 안 잤다. 당연히 살집이 없고, 키가 작았다. 반에서 가장 작은 아이가 제굴이었다. 사람들은 "너는 밥 안 먹고 살아? 왜 이렇게 말랐어?"라고 물었다. 남편과 나는 제굴이가 초등학생 되고 나서도 한참동안 밥을 떠먹여줬다. 그랬던 제굴은 오전 6시 30분에 일어나 혼자서 고기반찬을 만들어먹고 학교에 간다.
"너 그렇게 밥 안 먹으면 죽는다고! 푹푹 좀 먹어. 알겠냐고?" 제굴이가 밥상 앞에서 꽃차남에게 하는 말이다. 태어나 백일 만에 몸무게 10kg이 넘었던 꽃차남. 돌 때 오이고추를 아삭아삭 깨물어 먹고, 두 돌 때는 성인여성 두 명(엄마와 이모)이 먹는 것보다 밥을 잘 먹던 꽃차남은 변했다. 지난여름 내내 "안 먹어. 맛없어"라고 했다. 오랜만에 꽃차남을 만난 사람들은 나한테 보약이라도 해 먹이라고 당부했다.
우리 식구는 꽃차남이 밥 안 먹는 이유를 찾아야 했다. 머리를 맞대고 아름답게 의논하지는 못 했다. 나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밥을 안 먹는 건데?" 짜증을 내고 말았다. 남편은 꽃차남이 아침에 마시는 150ml 짜리 과일 주스를 못 먹게 했다. 제굴은 꽃차남이 밤에 한 개씩 먹는 75g 짜리 포도맛 푸딩을 못 먹게 했다.
"꽃차남아, 뭐 먹고 싶어?"남편이 출장 가서 없는 평일 날 밤에 제굴은 물었다. 꽃차남은 "피자"라고 말했다. 제굴은 좋아하지 않는 피자,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는 피자 만들기에 나섰다. 원래 피자 도우를 만들 때 밀가루 반죽을 이스트로 발효시켜야 한다는데 제굴은 곧바로 익반죽을 했다. 얇게 펴서 도우를 만드는 게 생각보다 힘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들었단다.
제굴은 반죽이 부풀어 오르지 말라고 다 만든 피자 도우에 포크로 구멍을 냈다. 그러고 나서 그 위에 토마토소스를 골고루 뿌리고, 양송이와 양파, 치즈를 올렸다. 제굴은 "엄마, 빨리 와서 사진 찍어요" 하고 나를 불렀다. "오호!" 감탄사가 나왔다. 근사했다. 우리는 오븐에서 익어가는 피자를 구경했다. 다 됐다고 '땡' 소리 나자마자 식탁에 앉았다.
"엄마, 파는 게 훨씬 맛있어요. 맛이 좀 허전하지 않아요? 그렇죠?""맛있어. 진짜 '엄지 척'이야. 엄마는 원래 피자 한 조각 밖에 안 먹는데 두 조각이나 먹었잖아. 꽃차남도 맛있다고 잘 먹었고.""아니에요. 뭔가 부족해. 근데 무슨 맛이 모자라는지 모르겠어요." 그날 밤, 꽃차남을 재운 나는 제굴이 방으로 갔다. 피자가 맛있다는 건 빈말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제굴은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와 <소년이 온다>가 어렵다고 끝까지 못 읽었으면서 <진격의 대학교>는 읽고 있었다. "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 좋아요"라면서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 대학의 자화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을 재미있다고 읽었다.
정규수업만 받는 제굴은 오후 5시 반에 집에 온다. 유치원 끝나고 놀이터에서 노는 동생을 데리고 온다. 친구들과 딱지치기나 잡기놀이를 하는 꽃차남은 제 형을 봐도 데면데면. 이 '의좋은 형제'는 놀이터에서 집까지 오는 3분을 활용해서 꼭 싸움을 한다. 제 형보다 한 발짝 먼저 집에 들어오는 꽃차남은 유치원 가방을 팽개치며 말한다.
"강제굴, 꿀돼지! 형형이 한 건 다 맛없어!" 제굴은 하해와 같은 마음을 갖고 싶으나 아직도 질풍노도에 휩싸이는 열일곱 살 청소년. 열 살이나 많은 형님한테 무례하게 구는 동생의 행동을 봐줄 수는 없다. 꽃차남과 똑같이 무례하게 맞선다. 어느 때는 말로, 어느 때는 동생의 몸을 '터치'하는 행동으로. 꽃차남이 분하다고 우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서 제굴은 부엌에서 음식을 한다.
어느 날 오후, 제굴은 엄마가 먹다 만 가래떡을 보고서는 냉장고를 뒤졌다. 쇠고기 등심까지 있으니까 흥이 났다. 등심을 다져서 양파, 간장, 후추, 다진 마늘을 넣었다. 떡도 조그맣게 잘라서 넣었다. 그걸 동그랗게 빚어서 프라이팬에 지졌다. 향기로운 떡갈비 냄새를 맡고 꽃차남이 부엌으로 왔다. 형제는 먼저 맛을 보고는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 사 먹는 떡갈비 맛이 나요. 잘 된 것 같아. 먹어 봐요.""(고기를 안 좋아하는 나는 병아리 눈물만큼만 먹으면서) 좋아. 근데 너는 꽃차남 입맛 찾아준다면서 너 먹고 싶은 것만 하는 것 같다.""아니에요. 꽃차남도 잘 먹어요. 근데 다음에는 고기를 안 갈아야겠어요. 씹는 맛이 없어."
꽃차남의 식성은 여전히 본 궤도에 오르지 않았다. 어쩌다 하루씩만 잘 먹었다. 제굴은 실컷 음식 했는데 동생이 안 먹으니까 짜증난다면서, "안 먹으면 너만 손해야"라고 했다. 뭐 먹고 싶으냐고 따로 묻는 일도 그만두었다. 그래놓고도 꽃차남이 구운 새우는 잘 안 먹는다면서 새우를 베이컨으로 감싸고 마늘 기름에 구웠다.
제굴은 어릴 때에 자기가 맛있게 먹은 음식들을 되짚어봤다. 엄마랑 이모, 고모를 따라간 레스토랑에서 몇 가지 음식을 시켜놓고 나눠먹던 게 맛있었다. 그때 먹은 음식 중에서 특히 맛있던 쇠고기버섯 리소토를 해 봤다. 어느 날은 돈가스를 만들고, 스파게티도 오븐과 가스레인지에 나눠서 했다. 샐러드도 해서 그릇에 곱게 담았다.
"일부러 레스토랑처럼 해 봤어요. 갖가지 메뉴를 해 본 거야. 한꺼번에 음식을 여러 개 만들면, 얼마나 힘들까 알아보고 싶어서요. 바쁘더라고요. 돈가스도 계속 체크하고. 스파게티도 두 종류로 하니까 힘들고요. 진짜로 식당에서 일하면 장난 아니겠어. 근데 엄마랑 꽃차남이 다 먹으니까 기분은 좋았어요."
먹을 때는 평화. 먹고 나면, 우리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제굴은 식탁을 치우지도 않고, 스마트폰으로 만화영화 <심슨>이나 <시사인>을 본다. 나는 "강제굴, 음식 하겠다는 애 맞아?"라고 되묻는다. 제굴은 유유자적, 밥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60분. (어쩌다 한 번씩) 기다리지 못 하는 내가 대신 치운다. 그러면서 말한다.
"제굴아, 어떤 부모가 자식 망치는 줄 알어? 자식 일을 대신 해 주는 부모야. (웃음) 엄마는 지금 식기세척기를 돌리는 게 아니라 내 소중한 아들을 망치고 있다고!" 제굴은 슬픈 눈으로 나를 보며 "엄마보다 정육점 아저씨가 나를 더 잘 알아요"라고 한다. 엄마는 고기 한 근에 얼마인지 아느냐고. 아저씨는 사장이니까 아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나는 제굴에게 말려들지 않게 정신을 바짝 차린다. "엄마는 고기를 안 좋아해서 모르지"라고 말한다. 제굴은 그럼 돈가스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별로"라고 한다.
"거 봐요. 엄마는 그러니까 나에 대해서 잘 몰라. 돈가스를 모르는 사람은 나에 대해서 모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