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언론 <뉴스앤조이>가 뜨거워지고 있다. 더운 날씨만큼이나 달아올랐던 지난 여름의 동성애 관련 논쟁 이후로 가톨릭의 이단성 여부를 놓고 또다시 갑론을박이 치열하다.
장로교 합동 교단의 최고 의사 결정 회의인 총회에서 가톨릭의 영세를 세례로 인정하지 않기로 한 결의를 보도한 기사가 게재되자,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는 듯이 박철수 목사의 한국교회(특히 합동교단)를 향한 가슴을 찢는 예언자적 호소가 메인 뉴스로 올라왔다.
이어 역사 강사답게 심용환 기자 회원이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또 교회사적 맥락을 놓치지 않은 혜안으로 가톨릭이 이단이라는 합동 교단의 결의는 "비합리주의와 몰상식"이라며 박 목사를 거들었다.
특히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는 댓글들 중 일부는 마치 16~17C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전쟁을 시간을 거슬러 무의식 속에서 기억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상대를 향한 말끝이 날카롭다. 또한 역설적이게도 어떤 댓글들은 이미 3~4C에 가톨릭교회가 이단으로 정죄한 영지주의적, 또는 몬타누스주의적 경향을 보이며 가톨릭도 개신교도 다 거짓 교회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이 논쟁 속에 깊이 연루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솔직히 속 마음은 이미 게재된 두 글의 필자들과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격동하는 감정을 좀 다스리고 제3자의 입장에서, 또는 상식을 추구하는 한 시민의 입장에서 최근 합동교단 결의에 대해 몇 가지만 이야기 하고자 한다.
1. 가톨릭의 영세를 인정하지 않은 결정은 현실 인식과 주제 파악을 못한 어리석은 선택이다. 다시 말해, 남아있는 국내 선교의 가능성까지 포기하는 실용적이지 못한 처사라는 말이다.
합동 교단의 많은 대형교회들이 비윤리적, 종교적 타락상을 보이고 있지만 아직도 몇몇 작은 교회들은 지역 사회에서 모범이 되고 개신교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다. 어쩌면 그렇게 본질에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교회를 다니고 싶어하는 가톨릭 신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결정은 그러한 신자들의 '이사' 마저도 어렵게 만드는 벽을 쌓은 행위다.
2014년 한국갤럽은 1984년부터 2014년까지 30년간 한국인들의 종교와 종교 의식 변화를 비교한 '한국인의 종교 실태' 조사를 발표한 바 있다. 조사에 의하면 비 종교인이 가장 선호하지 않는 종교가 개신교라고 한다. 그 이유는 돈, 성, 세습 등 도덕적 문제가 크지만, 자기들만 진리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배타적 태도도 한 몫 했다. 가톨릭에 대한 호감도는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얼마 전에 발표한 합동 교단의 자체 보고서에서도 최근 2년간 교인 수가 30만 명이 줄었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가톨릭의 영세를 인정하지 않은 결의는 개신교 교회의 확장에 도움이 될 리 만무하다. 점점 일반인들의 호감도가 높아져가는 가톨릭에 기존 교인이라도 빼앗겨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에서, 또는 진리를 사수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그러한 결정을 내렸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런 배타성이 더욱 사람들의 피로도를 높일 것이다. 하여 합동 교회가 '장자교단'을 유지하려면 오히려 가톨릭의 영세를 인정하는 편이 더 낫다.
2. 2년 전까지만 해도 줄곧 인정해왔던 가톨릭 영세에 대한 태도를 이제 와서 바꿀 이유가 없다. 결국 스스로 일관성 없음을 드러내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총회에서 신학부에 맡겨 검토한 후에 결정하자는 안도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정치부 목사들과 대다수의 총대(의결권을 갖고 있는 목사)들이 밀어붙여 급하게 결의를 했다고 하니, 그 지적 수준의 낮음과 스스로 호칭하는 장자 교단으로서의 품위가 없음을 가히 짐작할 만 하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그 어떤 교회사 책도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서술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회사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도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최근 학계의 동향도 1) 동방기독교의 재발견(교리나 신학적 분위기가 많이 다름. 언어가 다르기 때문임), 2) 아미쉬, 메노나이트, 부르더호프 등 교회사의 비주류적 분파들의 공헌, 3) 예수의 신성만 인정하는 단성론을 받아들였던 이집트 콥트 교회나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철저히 분리했던 시리아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에 대한 개방적 이해 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 다양한 신앙과 방식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전통과 다른 교회들에 대한 귀 기울임이 필요하다는 신적 요구에 대한 겸손한 인식이다.
사실 이단(heresy)이라는 말도 원래는 '분파'라는 의미로 사용된 그리스어 하이레시스(άίρεσίς)가 기원이고, 초기 교회에 존재했던 여러 서로 다른 공동체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이레니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교부들을 거치면서 현재의 의미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 교리사 분야의 대가인 예일대학교의 Jaroslav Pelikan은 초대부터 현대까지의 교리사 연구인 5권의 방대한 책 <The Christian Tradition : A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Doctrine> (기독교 전통: 교리 발전의 역사)에서 이른바 '사도적 계승'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이단들과 정통 양자는 모두 (신앙의 악한들과 영웅들을 선험적으로 구별하는 방법이 있기나 한 것처럼 이단이니 정통이니 하는 말들을 사용하는 것은 오도할 우려가 있기는 하지만) 1세기로부터 6세기에 걸친 논쟁들 동안 오직 하나의 참된 가르침이 있을 뿐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물론 각자가 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서로 주장했다. 진리는 오직 하나 뿐이며, 그 고백에는 복수가 있을 수 없었다. … 무엇보다도 종교개혁 이후의 서방교회사에 있어서 이단과 분파를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구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단이란 시기 부적절(poor timing)의 산물일 수 있다는 이러한 발견은 비로소 현대의 역사 연구의 성과이다. 원시 교회는 명백한 교리의 일치에 의해 특징지어지지 않았다." (<고대교회 교리사> 박종숙 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재인용) 최근에, 이전에 알지 못했던 동방 기독교에 대한 사실들을 포함한 3권의 기독교 역사 책을 펴낸 세계적인 교회사 학자 옥스포드대학교의 Diarmaid MacCulloch 교수도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 한 바가 있다.
"<기독교의 역사>가 전례에는 없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보여주기를 희망합니다. 여기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있는 그대로 해석하고 이를 거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고였던지 마구잡이였던지 간에 과거에는 여러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만약 인간에게 운명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이 정해주신 길이라고 기독교인들은 주장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저는 그 의견을 존중하지만 이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경험한 것들은 경우의 다양성과 예기치 않은 일들의 연속입니다."성공회 출신 학자인 맥클로흐는, 심지어 그 동안의 교회사 서술에서 볼 수 없었던,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동일 본질"을 믿지 않는 콥트 교회, 시리아 교회, 영국보다 먼저 기독교가 전파된 중국 교회 등의 동방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모두 우리의 형제이지 않냐고 가톨릭과 개신교 교회에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다.(CLC에서 <3천년 기독교 역사>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
그 동안 장로교 합동 교단은 개신교의 장자 교단다운 성숙함으로 가톨릭을 형제 교회로 인정해 왔다. 하지만 2년 전부터의 총회의 결의는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퇴행적인 것일 뿐, 끊임없는 개혁과 성장을 추구하는 개신교 개혁주의 정신과도 부합하지 않는 모습이다.
3. 합동 교단이 그렇게 결의해봤자 이미 한국 사회에서는, 자기들만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정통이라고 알아주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하나님만 알아주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어쩌면 하나님도 이미 학을 떼셨는지도 모른다. 고립만 초래할 뿐이다. 이런 분위기를 왜 저들만 모르는지... 더 이상 말해서 무엇 하랴!
정리하면, 이번 합동 교단 총회에서 가톨릭의 영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총대들의 결의와 함께 가톨릭이 이단이고 이교라고 한 몇몇 목사들의 발언은 결국 스스로에게도 이롭지 못한, 명철보신(明哲保身)하지 못한 처사인 것이다.
맥클로흐는 "종교적 신앙은 광증으로 변질되기 쉽다. 그것은 인간을 어리석은 범죄자로 만들기도 하고 선, 창조성, 관용에서 최고의 업적을 이루게도 한다"라고 위의 책 서문에서 말한다.
무엇이 우리를 참되고 진실되게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