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덕방이라는 게 지금은 생소하지만 예전에는 동네 사랑방이자, 소식통이었어요. 지역에서 분쟁이 발생하기 쉬운 토지거래 등을 중재해주던 역할을 했죠. 그런 일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오가며 고민을 나누기도 하던 공간이었고요. '이 문제는 건넛마을 아무개를 찾아가면 해결할 수 있다' 등의 정보가 모이고 교류하던 곳이지요. 예전에 진짜 그런 역할을 했다고 문헌에 기록돼있습니다. '우리동네문화복덕방(아래 문화복덕방)'도 그런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동네 소식이 모이고, 동네에서 필요한 것을 내어줄 수 있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요. '마담뚜'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요?"라정민(28) '문화복덕방' 기획자를 지난 9월 23일 인천광역시 연수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만났다. 서구 가좌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문화복덕방은 이날 시립박물관에서 '소통과 조화, 함께 만들어가는 우리 동네'라는 주제로 열린 포럼에서 사례를 발표했다.
시시콜콜 일상 공유하는, 우리 동네 문화복덕방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시민 문화예술교육 활동 지원 사업인 '시시콜콜'로 시작한 문화복덕방은 지난해와 올해, 2년 간 지원 사업에 채택됐다.
'시시콜콜'이란 시간(時)과 장소(市)에 구애받지 않는 교류(call)와 협업(collaboration)을 의미한다. 문화예술활동은 특별한 남의 것이 아닌, 시시콜콜한 일상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할 때 의미가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람책'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와 시간을 적어 두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대출을 신청합니다. 반대로도 가능하겠죠. 어떤 이야기가 궁금해 적어두면 그걸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책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궁금한 걸 묻고 답하며 실컷 떠들고 노는 거죠."휴먼라이브러리인 사람책은 덴마크의 사회활동가 로니 에버겔이 고안한 프로그램이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며 고정관념이나 오해, 편견을 깨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사람책 소통 방법론은 세계 70여 개 나라로 퍼져나갔다. 사람책은 말 그대로 사람이 책이 돼 자기가 가진 가치와 철학, 삶의 방식을 들려주는 책이다.
"동네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던 차에 사람책을 생각했고, 문화복덕방 사업을 시작했습니다"문화복덕방은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동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보려고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학교나 시장, 도서관에서 만난 서구 가좌동 주민 468명은 영화 관람·운동·여행·음악 감상 등을 하고 싶어 했다.
"지난해 9월부터 올해 2월까지 사람책 17개를 진행했어요. 올해 들어서는 6개를 했습니다. 청소년들이 원하는 사람책을 중심으로 진행했죠. 사람책은 기본적으로 저희 사무실이 있는 가좌동 주민들을 대상으로 찾았습니다."라씨는 반응이 좋았던 사람책으로 요리사를 꼽았다.
"남인천고등학교 조리과학과를 다니는 친구들이 요리사 사람책을 만났어요. 우리 동네 일식집 사장님과 제빵사, 호텔 셰프를 만났는데 목표가 명확한 친구들이라 관심이 많았죠. 사람책으로 활동하신 분들도 청소년들과 의미있는 만남이 좋았다고 하셨습니다."동네 일식집 사장님과 '진로상담', 세대갈등 없는 마을
한 번 맺은 사람책 관계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학생들은 사람책으로 활동한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에 찾아갔고, 차를 마시며 진로 상담을 하기도 했다.
"바둑을 두는 사람책이 있었어요. 바둑을 좋아하는 청소년이 생각했던 것보다 동네에 많더라고요. 예전에 초등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주산 배우는 게 유행했듯이 한때 바둑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죠. 아이들이 잘 하더라고요. 올해는 바둑대회를 열어 '동네 바둑왕'을 뽑아 볼 생각입니다. 청소년 리그와 성인 리그로 나눠서 운영할 생각인데, 바둑은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기제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에는 리그 우승자들의 결승전을 해 바둑왕을 선발할 예정입니다". 대개 아이들은 어른들을 '꼰대'로 생각해 이야기를 들으려하지 않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의견을 묵살하는 경우가 많다. 소통의 부재는 관계의 단절을 불러온다. 그러나 문화복덕방에서는 어른과 아이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아이들은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할 때면, 태도가 좋지 않죠. 원하지 않는 얘기는 들으려하지 않고요. 그런데 원하는 걸 얘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니까 그들의 얘기를 경청합니다. 사람책이 갖고 있는 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고요. 사람책들도 아이들이 원하는 걸 알고 있고 자신의 말에 집중하니, 아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잘 설명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죠."자연스레 소통하며 이들은 하나가 된다. 어른과 아이들이 두터운 관계를 맺기까지에는 동네에 있는 20대 청년들이 큰 역할을 했다. 청년 10여 명이 문화복덕방 기획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청소년인문학도서관 '느루'는 2011년에 동네 청소년들과 어른들이 함께 만든 공간이다. 가좌동 청소년들의 필요와 어른들의 공감대로 만들어진 '느루'는 처음부터 청소년들의 의견과 주도로 만들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청소년 60여 명이 '청소년 공간 건축학교'에 참여해 공간을 디자인했으며, 매달 청소년 운영위원회를 개최해 '느루'의 활동과 계획을 스스로 결정하고 실천한다.
'느루'에서 성장한 청소년들이 청년들이 되고, '느루'가 좋아 모인 청년들이 문화복덕방 활동을 하고 있다. 라정민씨도 3년 전 느루에서 '이야기책 만들기' 강사로 참여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느루 자원봉사자들이 문화예술로 동네이야기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로 이야기책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우리 동네에는 가좌시장이라는 재래시장이 있는데 인천에서 규모도 크고 잘 유지되고 있는 시장 중 하나죠. 동네 시장의 얘기를 담은 '예샘이 시장에 가다'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고, 지난해에는 '우당탕탕 푸른샘해결단(아래 해결단)'이라는 책을 아이들과 만들기도 했습니다."해결단에 참가했던 아이들은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도 '해결단'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모였다. 얼마 전 마을잔치를 하는데 해결단 회원들이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쓰레기 치우기나 안내, 접수 등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아이들 또한 이런 활동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성장한다.
라씨는 지난해 사람책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올해 사람책을 확장하는 게 목표였다면, 내년에는 청년들이 지역에서 무언가 일을 하며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모델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세대를 넘나드는 문화복덕방을 만들려고 하는데 쉽지는 않습니다. 워낙 요즘 청년들의 삶 자체가 피폐하잖아요.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하죠. 그래도 재밌을 만한 것들을 찾아 계속 시도하고 만들어 갈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