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史觀): 역사를 보는 관점나는 어릴 적 군인이셨던 부친을 따라 자주 이사를 했다. 또래들과 친해질 만하면 헤어졌고,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부모님이 '한국사 전집'을 사주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 역사책은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구이자 상상력과 지식의 원체험이었으므로 깊은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중·고등학교 주입식 교육 환경에서도, 역사 시간은 비빌 언덕이었다.
경쟁의식과 의무감을 떨치고,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즐기듯'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면 자연스레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을 수 있었고, 공부의 본질은 결국 경쟁이 아닌 삶 자체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7차 교육과정에 따라 배웠는데, 당시 국사 교과서는 '국정교과서'였다. 노무현 정부 때다. 하지만 주변 역사학도들에게 물어보니, 노무현 때와 12일 정부가 일방적으로 선포한 국정은 결이 다르단다. 딱히 노무현 지지자도 아닌 동국대 사학과에 재학중인 김상현 학우는 말한다.
"예전 국정교과서가 장인이 긴 시간 깎아서 그 질만큼은 확실히 보장되는 방망이라면, 지금의 국정교과서는 장인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날림으로 만드는 거칠거칠한 방망이죠."편향 없는 역사는 불가능,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가 문제
국정교과서 시행도 배경이 중요하다. 정부·여당이 '사상의 계엄 정국'을 방불케 하는 말들을 쏟아내며 국정교과서 전환을 밀어붙였는데, 그럴수록 박 대통령 부친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김무성 대표 부친 김용주의 '친일 의혹' 덮기가 아니냐는 사람들의 의문만 커졌다.
정부·여당 측 핵심 주장들을 살펴봤고, 비록 한 명의 인문학도일지언정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번드르르한 말들을 쏟아내지만, 알맹이는 역사에 대한 온갖 몰이해가 뒤범벅된 '사념체'(死念體)였기 때문이다. 뭐가 뒤범벅됐을까?
[첫째] 정신승리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역사학계 90%가 좌편향"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건 자신의 사관이 학계에서 설 자리가 없을 지경으로 '설득력 없다'는 자기고백일 뿐이다. 그는 진중한 학술적 토론으로 자신의 사상의 유효성을 증명할 의사가 없기 때문에, 절대다수의 학자들을 '편향'으로 격하하며 정신승리한다. 이건 편향이 아닌가.
역사가 E.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가는 언론인과 닮았다고 했다. 기자가 중요하다 생각하는 사실들을 '선택하고 배열'할 수밖에 없듯, 역사가도 그렇다. 정부·여당 측에서 연일 5.16과 식민지배의 재평가를 주장하는 걸 봐도, 객관적 역사란 없다. 그들에게는 5.16과 식민지배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편향도 가능하다.
[둘째] 자기모순이다. 정부·여당이 겉으로 객관과 중립을 표방해도, "긍정사관"과 "자학사관"을 구분 지으며 본능을 숨기지 못한다. 국정교과서에 경제성장과 근대화의 비중을 늘리는 게 '긍정적'이고, 과거를 비판적으로 보는 게 '자학적'이라는 것부터가 이미 가치관을 드러낸다. 결국, 중립이란 말만큼 알맹이 없는 말도 없다.
핵심은 군사독재와 식민지배를 경제발전과 지나치게 연결 짓는 주장들이 '배만 부르면 장땡'이라는 천박함을 기본으로 깔고 간다는 데 있다. 먹고 사는 문제는 물론 중요한 인간적 문제이지만, 인간은 그냥 동물이 아닌 "붉은 뺨을 가진 야수"라는 게 중요하다(니체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중).
인간은 누군가가 모멸감을 주면 울분에 차 뺨이 붉어지는 유일한 존재다. "인정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했던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 열사나,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던 건 나의 존엄함이다"라고 했던 대한항공 박창진 사무장을 떠올리면 된다. 우리는 배만 부르면 장땡인 가축이 아닌 거다.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이야말로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식민지배와 군사독재는 모멸감의 역사다. 남의 나라에 침략해 물자와 사람을 수탈하고, 민주주의르 주장하는 똑똑한 사람들 거슬린다고 수없이 죽인 역사다. 경제 성장 뒤에는 도시 노동자와 농민들의 희생도 있었다. 그 불평등 후유증이 지금 '헬조선'을 만드는 와중에, '끼니 해결' 운운은 행복에 필요한 조건일망정 충분한 조건이 아니다.
결국 '모멸감'이 중요하고, 민초들은 독재자·침략자 출현을 경계해야 한다. 과거를 비판적으로 보고 거울삼는 건 자학사관이 아닌, 민초들을 날카롭게 만드는 최소한의 죽창 즉 '자기방어 사관'이다. 긍정이라는 물타기로 이뤄지는 '집단 정신승리'사관은 민초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다. "역사가 삶에 봉사해야지 삶이 역사에 봉사하는 게 아니다." (니체 <반시대적 고찰> 중)
[셋째] 망상이다. "5.16 혁명이 없었다면"(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나라가 잘못됐을 거라는 상상은 역사라기보다는 판타지 소설이다. 헬조선의 유구한 나라님, 회장님 신화와도 통하는 '박정희는 반인반신' 신화다. 인구 수천만의 땅에서 박정희만 신격화하는 '금수저 사관'이다. 이런 환상은 인물중심 사관이기 때문에, 지도자의 공로는 과대계상하며 노동자들의 공로는 과소계상한다.
가령 경제과실 분배 문제에서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생산성을 엄혹히 따지지만, 회장님의 업적은 '기업가정신'같은 신비주의적 환상으로 수렴되며 미화되는 현상이 지겹게 반복된다. 박정희에 대한 신비감도 걷어내야, 우리가 삶에서 주인으로 설 수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이제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로 더 과감하게 바꾸자. 이왕 객관적 역사랄 게 없다면, 어떤 사관이 우리 삶에 봉사하는지가 중요하다.
'금수저 사관'은 우리를 들러리로 만든다. 역사교과서에서 박정희 경제정책의 비중이 약하고 또 약해야 하는 건, 그가 경제발전의 영광을 독차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경제발전 신화의 주인공은 박정희가 아니라 익명의 수많은 산업화 세대다. 아직도 박정희라는 신을 영접한다면, 그 신부터 죽여라! 그래야 우리들의 삶의 실질이 개선된다. 우리가 이제 신이다. 옛 신은 죽었다. 아니, 죽어야 한다.
주인역사와 노예역사
어쩌자고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후진적 국정교과서를 도입하는 걸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단지 이 모멸감 주는 상황을 떨칠 작은 행동 하나씩이 모두에게 시급할 뿐이다.
"자유시장경제를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국정교과서를 찬성할까? 기본 이념에 어긋나는데... 그분들이 실제로 만들고 싶은 것은 절대왕정과 봉건 노예제 아닐까? 노예를 만들고 부릴 자유 정도가 그들의 바람이 아닐까 싶다."(suh********)"국정 역사 교과서는 뭔 개소리냐? 여기가 북조선이냐 헬 조선이냐"(ora******)"학교를 가면 주입식 교육의 노예가 되고 사회의 기계 부품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sain*****)"국정 교과서가 의도하는 게 헬조선의 영구화는 아닐까"(hom**********)이런 목소리들이 나오는 이유는 국정교과서가 '삶의 노예화'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딱 한 걸음만 더 내딛자. 누가 우리에게 사관을 주입해 노예화될 것을 걱정하기보다, 우리가 나서서 사관을 결정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다. 즉 옛날 정치인·옛날 이야기 중심의 기존 틀을 넘어서서, 옛날 정치인·옛날 이야기도 우습게 보며 민초 중심으로 몫을 더 챙기자는 거다. 우리는 그럴 자격이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 아이들이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게 해주자.
나는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돌아와 예전 식으로 국정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해도 반대다. 하지만 정부·여당의 '금수저 사관'식 국정교과서로의 전환은 더 반대다. 중요한 건 사관에 반영된 가치관이다. 가치관은 곧 철학이다. 우리가 교학사 근현대사 교과서나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는 건, 거기에 반영된 철학들이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본질적 모습에 위배되기 때문에 반대하는 거다. 그렇다면 국정교과서는커녕 유럽처럼 주입식 교육을 철폐하고 철학교사를 대폭 임용하자는 주장까지 이미 야당 쪽에서 먼저 치고 나왔어야 원래는 시대정신에 맞는 것이다.
국정교과서로의 전환을 쿠데타 벌이듯 학계를 무시하고 밀어붙인 정부·여당의 행보는 역사의 퇴행이다. 나도 이를 막기 위해 작은 행동이라도 보태겠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역사책의 가장자리에만 위치했다. 이제 우리가 역사의 주인이 되기 위해, 작은 행동 하나씩을 보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