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10월에도 제주도에 왔었다. 혼자 하는 첫 여행이었다. 하지만 여행 같지 않은 여행이기도 했다. 재미있게 놀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편히 쉬지도 못했다. 혼자 여행을 한다는 사실에 기가 눌려 4일 내내 긴장만 하다 끝났다. 위치도 확인하지 않고 예약한 호텔은 서귀포시 토평동에 있었고, 그곳에 묵는 내내 강정 마을을 제외하곤 근처 이중섭 거리만 들락거렸다.
첫날, 이중섭 거리를 찾아가며 나는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에 푹 빠져있었다. 무엇이든 혼자 척척 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혼자 하는 여행 앞에서 나는 마치 처음 하루를 맞는 사람처럼 서투르기만 했다. 혼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혼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샌드위치를 먹고, 혼자 미래를 계획하는 일과 혼자 여행하는 일은 달랐다. 이중섭 거리를 찾아가는 데 손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긴장한 발목은 단단히 굳었다.
이중섭 거리에 도착해 다른 여행자들처럼 카페에 들러 음료수를 마시고, 이중섭 생가, 이중섭 미술관에 들렀다. 예술가들이 한 판 펼쳐놓은 예술품도 구경했다. 시간은 흘렀고, 어느새 어스름이 졌다.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서툴기만 했던 하루의 여행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튿날에도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먹고 나갈 채비를 했다. 목적지는 어제처럼 이중섭 거리. 정방폭포를 지나쳐 큰 도로로 나왔다. 한 번 왔던 길이라 이중섭 거리로 이어진 골목길로 쉽게 접어들었다. 그때 한 여행자가 내게 말을 붙여왔다. 이중섭 거리로 가려고 하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코앞에 있는 이중섭 거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그 여행자가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나는 나도 그리로 가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행자는 반가워하며 같이 가도 되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같이 걸었다. 처음 보는 사람과 함께 여행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제 한 번 와봤던 곳이었지만 나는 처음 온 척하며 여행자의 속도에 맞춰 다시 한 번 이중섭 거리를 둘러봤다. 이중섭 생가, 미술관도 또 갔다. 걷는 중간 이야기도 나눴다. 유아 교육과를 나와 어린이집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그녀는 돈이 어느 정도 모였다 싶으면 여행을 한다고 했다. 제주도도 이번이 네 번째 여행이란다.
어느덧 오후가 되자 그녀가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나는 당연히 좋다고 말했다. 우리는 해물 뚝배기를 먹었다. 그녀는 수줍은 표정으로 조곤조곤 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화 몇 마디 나눠봤을 뿐인데 솔직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집에선 돈도 모으지 않고 여행만 다니는 그녀를 나무란다고 했다.
친구들이 명품 가방을 하나, 둘씩 늘려갈 때 자기는 천 가방을 들고 다니며 여권에 도장만 늘려왔다고 했다. 우리는 마치 10년을 본 친구처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긴장한 나완 달리, 여행을 여유롭게 즐길 줄 아는 그녀 덕분일 거였다. 해물 뚝배기를 깨끗이 비우고 나는 그녀와 헤어졌다.
정방폭포에 가다
그땐, 정방폭포를 지나치기만 했다. 이번엔 정방 폭포가 꼭 보고 싶었다. 며칠 전 한 여행자가 보여준 사진 때문이었다. 사진 속 정방폭포는 매우 아름다웠다.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던 끝에 찾아낸 폭포의 아름다움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혹시 나도 오래도록 보고 있으면 그토록 아름다운 폭포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중섭 거리 근처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부리고, 바로 정방 폭포로 향했다.
정방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기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에게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진을 찍는 대신 폭포를 바라봤다. 유유히 흐르던 물줄기가 절벽을 만나자 이를 악물고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어느 하나 죽지 않고 무사히 떨어져 다시 바다로 흘러들었다. 살아남겠다고 이를 악물고 떨어지는 물줄기들이 마치 우리네 모습 같았다. 살게 될지, 죽게 될지 모르는 시간을 이겨내면 우리 역시 폭포수처럼 다시 유유히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살아남은 물줄기가 바다로 흘러드는 모습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오면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나는 오늘 폭포의 아름다움을 본 걸까.
정방 폭포에서 나와, 그때 그 여행자를 만났던 골목을 지나, 이중섭 거리 초입에 섰다. 2년 전의 서툴렀던 나와, 비슷하게 서투른 지금의 내가 동시에 이중섭 거리로 들어섰다. 그때와 같은 경로로 둘러볼 참이었다. 이중섭 생가에 들렀다가, 생가 뒤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미술관으로 가본 후, 다시 거리로 나와 예술가들의 예술작품들을 보면 될 터였다.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
이중섭은 1916년에 태어나 1956년에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 화가이다. 소를 그린 화가로 가장 많이 알려졌고, 캔버스뿐만이 아니라 시험지, 합판, 은종이 등 다양한 재료에 그림을 그린 화가로도 역시나 많이 알려졌다. 그의 향토적인 그림은 그를 민족 화가, 국민 화가로 불리게 했다.
처음 이중섭 화가의 소 그림을 보고 그 넘치는 힘에 압도당했었다. 화가의 강렬한 힘이 소의 눈을 통해 내게 전해져 왔다. 나는 그림을 볼 줄 모르지만, 이중섭 화가의 그림에선 힘과 천진난만함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곳 서귀포에 1년 남짓 머무르며 남긴 몇 점의 그림 중 <서귀포의 행상>을 봐도 천진난만함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튼실하게 익은 과일을 따고 놀며 배부르고 기운찬 하루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은 날개를 단 듯 자유로워 보인다. 이중섭 화가에게 제주도는 유토피아와 다름없었던 걸까.
하지만 힘차고 천진난만한 그림과는 달리 이중섭 화가는 지난한 삶을 살았다. 그 마지막도 여간 쓸쓸하지 않았다. 영양실조와 간염에 시달리다 홀로 숨을 거둔 뒤, 3일 후에야 친구들에게 발견되었다.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에서 이중섭의 평생지기이자, 이중섭의 시신을 수습했던 친구 구상이 떠올린 죽기 직전 이중섭의 모습은 '자학'이었다. 식음을 거부했고, 가족들과도 연락을 끊었다. 그렇게나 사랑했던 일본인 아내의 서한을 물리치길 반복했다. 너무 굶어 꼴딱꼴딱 숨이 넘어가는 그를 억지로 붙잡아 매 우유나 주스를 먹이는 것이 병 치료의 전부였다.
이제는 민족화가요, 국민화가요, 천재 화가라 불리는 이중섭은 살아생전 친구 구상에게 이렇게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세상을 속였어! 그림을 그린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놀고 다니며 훗날 무엇이 될 것처럼 말이야." -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중에서이중섭은 해방 후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왔다. 부농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부산으로 온 이후로는 밥을 벌어 먹고 살 능력을 잃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만 그려오던 사람이었다. 이미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지만, 전쟁 통의 조국에선 그림으로 쌀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유리걸식 같은 생활을 이어갔다. 어쩔 수 없이 아내와 두 아들만 일본으로 보냈다. 이중섭 본인은 겨우 생명을 부지했다. 친구 구상은 당시 이중섭의 참혹한 상황을 "거처에 아무 마련도 없고 능력도 없이 죽기까지 6년간 그는 어쩌면 용케도 버텼다는 느낌마저 든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중섭은 그림만은 절대 놓지 않았다. 구상은 이렇게 말했다.
"중섭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잣집 골방에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에서도 그렸고,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종이, 담배갑, 은종이에다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제주도·통영·진주·대구·서울 등을 표랑전전(漂浪轉轉) 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중에서이중섭이 다양한 재료에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는 가난해서였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의 은종이 그림은 미술 재료의 확장이라는 의미로 현재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 수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림 완성에 대한 강박감과 세상에 하나 보탬이 되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더해져 그는 스스로 곡기를 끊었고 그렇게 죽어갔다. 하지만 그가 남긴 수백 점의 그림들은 가난과는 거리가 멀다. 사랑과 행복, 이데아가 그의 그림에 넘쳐 흐른다.
나는 조금 덜 서투른 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아담한 이중섭 생가를 지나쳐 미술관으로 들어왔다. 무료입장이 아님에도 나는 매번 올 때마다 이곳 미술관에 들른다. 왠지 이중섭 거리에 왔으니 그의 그림을 몇 점이라도 봐야 할 것 같아서이다. 하지만 미술관에 올 때마다 그림이 왜 이리 없을까 싶기도 했다. 위의 책에서 친구 구상에 의하면 유화, 수채화, 크로키, 데생, 에스키스 등 약 200점의 그림과 은종이 그림이 약 300개가 남아 있다고 하는 데 말이다. 이중섭의 많은 그림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그래도 역시나 좋은 이중섭의 그림을 보고 거리로 나왔다. 메인 거리는 한적했지만, 그 옆 골목에선 젊은 예술가들이 본인들이 만든 작품을 전시하거나 팔고 있었다. 이중섭은 살면서 이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이나 했을까. 자신의 뜨거운 예술혼이 자기 죽음 뒤에도 이토록 오래도록 사람들의 가슴에 전해질 줄을. 이중섭은 죽기 전 사회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괴로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가 지니고 있던 예민한 양심, 뜨거운 정신, 결기, 사랑, 우정 그리고 진정한 애국심은 후대의 우리에게 한 줄기 빛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번 여행에선 매번 이런 식으로 배가 고파왔다. 괜찮다가 한순간에 참지 못하게 배가 아팠다. 나는 얼른 미리 생각해 두었던 떡볶이집으로 달렸다. 우도에 함께 갔던 중국인 친구 양이 먹었다던 떡볶이를 먹기 위해서였다. 떡볶이집은 올레 시장 안에 있다고 했다. 다행히 금방 찾았다. 떡볶이 1인분과 김밥 한 줄을 게눈 감추듯 해치웠다. 든든해진 배를 안고 밖으로 나와 올레 시장 중앙에 길게 놓인 벤치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이젠 뭘 할까. 게스트하우스에서 제공하는 심야 관광이 취소됐다는 메시지를 방금 받았다. 달리할 게 없을 땐 달리기가 있지.
카페, 야외 바비큐장, 지하 선술집까지 갖추고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몸을 풀고 우선 아무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10분쯤 달리니 조그마한 공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30바퀴쯤 뱅글뱅글 돌자 9km가 채워졌다. 숨을 헐떡거리며 공원 내 벤치에 벌렁 드러누웠다. 보기 흉할 것 같아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누워 있으니 미친 사람처럼 웃음이 났다.
등대에 등을 기대고 팔자 좋게 앉아 있던 게 어제의 일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틀 연장 이런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몰래 조금 더 웃다가 일어났다. 게스트하우스를 향해 걸었다. 확실히 2년 전보단 덜 서투른 여행자가 된 것 같았다.
덧붙이는 글 |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