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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경제학상, '소비·빈곤 연구' 앵거스 디턴 교수
노벨경제학상, '소비·빈곤 연구' 앵거스 디턴 교수 ⓒ EPA/연합뉴스

'"불평등이 경제성장 동력"... '좋은 불평등론'에 노벨상.'

지난 12일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앵거스 디턴 미국 프린스턴 교수가 선정되자 국내 보수 언론들은 '성장론자의 승리'라며 일제히 반겼다. 특히 디턴 교수가 <21세기 자본>으로 자본주의의 불평등 문제를 비판한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허구를 드러낸 주인공이라면 잔뜩 치켜세웠다. 과연 디턴 교수는 '경제성장과 불평등 옹호론자'일까?

불평등이 경제 성장 발판? 국내 언론 '아전인수' 해석

피케티 대 디턴 교수 대립각을 앞장서 퍼뜨린 곳은 <한국경제신문>(아래 한경)이다. <한경>은 지난해 8월 디턴 교수의 2013년 저서 <위대한 탈출>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출간했다.

<한경>은 14일 '"불평등이 성장의 발판"... '위대한 탈출' 피케티 허구 드러낸 역작'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지난해 <위대한 탈출> 출간이 '피케티 신드롬' 때문임을 스스로 인정했다. <한경>은 당시 학계에서 디턴 교수를 '피케티 대항마'로 내세워 <위대한 탈출>을 번역했고,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지난해 12월 이 책에 '시장경제상'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위대한 탈출>에서 피케티에 대한 비판은 찾아보기 어렵다. '자유시장경제' 싱크탱크인 자유경제원 현진권 원장이 저자 서문 다음에 끼워 넣은 '피케티 vs. 디턴, 불평등을 논하다'라는 글에서 둘 사이의 대립각을 세웠을 뿐이다.

정작 책 본문에서 디턴 교수는 피케티 이론을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활용했다. 디턴 교수는 지난 1929년부터 2012년 사이 미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가 꾸준히 증가했는데도 최근 들어 빈곤율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하는 모순이 발생한 원인을, 피케티와 에마누엘 사에스(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의 2003년 '소득 불평등' 연구에서 찾았다. 

디턴 교수, 피케티 연구 동조 "최상위 임금 연구 중요"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파리경제대 교수가 지난해 9월 19일 오후 서울 신라호텔에거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파리경제대 교수가 지난해 9월 19일 오후 서울 신라호텔에거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 ⓒ 권우성

디턴 교수는 피케티와 사에스 연구 결과 1, 2차 세계대전 이후 하락 추세였던 상위(1%~0.1%) 소득자의 소득 점유율이 1980년대 이후 상승세로 돌아선 데 주목했다. 디턴 교수는 "다수와 운이 좋은 소수 사이의 이 같은 뚜렷한 대조가 둘 사이의 명백한 모순, 즉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뤘는데도 빈곤 문제 해결에는 진전이 거의 없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고 밝혔다.

특히 디턴 교수는 "피케티와 사에스의 연구 결과는 특히 분배의 맨 위에 있는 소득 불평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꿨다"면서 "나는 엄청난 금액의 돈이 관련돼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최상위 임금에 특별한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피케티 연구에 동조하기도 했다.

또 <한경>은 피케티가 "자본주의는 부를 세습시켜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특성이 있다"고 본 반면, 디턴은 "자본주의 성장 과정에서 불평등이 생겨나지만 결과적으로 세계는 평평해진다"고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것처럼 보도했지만, 디턴 교수 역시 이 책에서 부의 집중과 기회 불평등에 상당히 비판적이다.

디턴 교수는 노동시장의 불평등을 지적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은 노동조합 회원 수와 정치적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중략) 정치게임에서도 밀려났다, 그리고 가난하지 않은 노년층은 그 수와 투표권, 정치 대표가 늘어나면서 점점 더 잘 살게 되었다"면서 "하지만 시장과 정치 양쪽에서 가장 성공한 집단은 바로 소득과 이익 분배의 꼭대기에 있는 집단"이라고 꼬집었다.

"불평등 심각한 위협... 부의 집중은 성장 기반 약화시켜"

디턴 교수가 에필로그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수백만 명이 죽음과 궁핍에서 구출되고, 불평등과 뒤에 남겨진 수백만 명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살기 좋아진 세상에 대한 긍정적 이야기"라고 밝혔지만 여기엔 '반전'이 숨어 있었다.

바로 이 책의 모티브가 된 영화 <대탈출>에서 수용소 탈주자 가운데 몇 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시 붙잡혔고 50명은 처형됐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면서 "우리의 대탈주는 다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디턴 교수는 "경제성장은 빈곤과 물질적 결핍에서 탈출하는 원동력"이라면서도 "성장은 부유한 세계에서 흔들리고 있"고 "거의 모든 곳에서 성장의 흔들림이 불평등의 확장과 함께 왔다"고 지적했다.

특히 "미국의 경우 현재와 같은 극단적인 소득과 부는 100년 이상 본 적이 없다"면서 "부의 엄청난 집중 현상은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파괴의 숨통을 막아 민주주의와 성장의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디턴 교수는 "그만한 불평등은 앞선 탈주자들이 뒤에 남겨진 탈출 경로를 막도록 장려할 수 있다"며 국가간, 계층간, 세대간 '분배 갈등'을 우려했다. 다만 "탈출 욕구는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쉽게 좌절되지 않을 것"이라면서 "미래의 탈주자들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설 수 있"고 "사람들이 자신 뒤의 터널을 막을 수도 있지만 터널을 파는 방법에 대한 지식을 차단할 수는 없다"는 조심스런 낙관론을 폈다.

디턴 교수가 국내에서 '불평등 옹호론자'로 왜곡된 데는 '불평등은 어떻게 성장을 촉발시키나'라는 한국판 책 부제도 한몫했다. 하지만 원제는 '건강과 부, 불평등의 근원'이다. 디턴 교수 역시 이 책에서 자신을 인도를 중심으로 '세계 빈곤 측정법'을 연구하는 빈곤, 불평등 연구자라고 밝혔을 뿐이다.

디턴 교수는 지난 12일(현지시간) 미국 프린스턴대 강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부자들 규칙에 나머지 사람들이 순종해야 하는 세태가 걱정스럽다"면서 "불평등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 자리에서 최근 성장 둔화와 이에 따른 저소득층의 피해를 우려하는 말은 있었지만 '불평등이 성장의 또 다른 기회'(한국어판 책 표지)라는 식의 발언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앞서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도 <오마이뉴스> 기고문(관련기사: 불평등이 성장 동력? '노벨 경제학상' 보도 유감)에서 "최근 연구의 동향은 성장과 평등성이 동반 관계에 있다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면서 "혹시나 디턴 교수의 주장을 우리나라에도 적용하려는 바보 같은 사람이 나올까봐 미리 못을 박으려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는데 국내 보수 언론이 딱 걸린 셈이다.


#디턴#노벨 경제학상#피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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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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