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교를 건너 새섬으로8시가 넘어 잠에서 깼다. 같은 방 룸메이트들은 아직 꿈나라다. 일어나 블라인드를 젖히고 창 밖을 살폈다. 비는 오지 않지만 왠지 축축해 보이는 날씨다. 최대한 조용하게 준비를 하고 게스트하우스 뒷문으로 나왔다. 이쪽으로 가면 천지연 폭포가 있다.
근처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사 먹고 어제 달리면서 알게 된 천지연 폭포 가는 길로 들어섰다. 20분 정도 걷자 가파른 내리막길이 보인다. 꼬불꼬불한 내리막길을 아슬아슬하게 내려오자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다.
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다. 길치의 고민이 또 시작됐다. 길이 헷갈릴 때마다 궁금한 것은 다른 사람들은 이게 정말 헷갈리지 않느냐는 거다. 사람들은 어떻게 딱 보면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감을 잡을 수 있을까. 그냥 서 있을 뿐인데 어떻게 동서남북을 헤아릴 수 있는 걸까. 어떻게 길을 잃고도 당황하지 않지? 나는 매번 길을 잃을 때마다 머리가 멍해지고 바보가 되는데.
이 세상엔 길치보다 길치가 아닌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 확신하고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가는 쪽으로 따라가 보기로 했다.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면 곧 아름다운 폭포수 앞에 서게 될 터였다.
자욱한 안개 속을 얼마쯤 걸었을까. 눈 앞엔 폭포수가 아닌 다리가 나타났다. 불현듯 많아진 듯한 사람들 무리가 다리를 건너 안개 속으로 사라져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 다리를 건너면 폭포가 있는 걸까. 다리 앞까지 걸어가 봤다. 다리는 바로 서연교였다.
어느 여행자에게서 서연교와 새섬에 대해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러니까 내가 따라온 사람들은 서연교를 통해 새섬으로 건너가려던 사람들이었던 거다. 뭐, 잘됐다. 온 김에 새섬에 한 번 들어가보자.
서연교는 서귀포항과 새섬을 잇는 다리이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다리'라는 의미라고 한다. 안개 덕분에 신비한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는 서연교는 공중에 둥실 떠 있는 돛단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제주 전통배인 '테우'를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테우를 타고 바다를 건너듯 서연교를 타고 새섬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왜 새섬의 이름은 새섬인 걸까? 혹시 새가 많아서? 그건 아니란다. 섬안에 억새풀인 새(茅)가 많아 새섬이라 이름 붙여졌단다.
새섬은 산책로였다. 1.2km에 달하는 산책로가 목재데크, 자갈길, 숲길 등으로 이어져있었다. 산책로를 걸으며 본 섬의 모습은 묘하고 독특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라산을 등반하면서 느꼈던 이국적인 정취가 이곳에서도 느껴졌다.
삼삼오오 함께 산책에 나선 가족단위 사람들이 많았다. 혼자 걷고 있는 사람은 나와 저 앞의 서양인 할아버지 한 명뿐인 것 같았다. 이런 분위기. 아침이고, 안개가 끼어 있고, 나른하면서 상쾌하고, 사람들 속에 있지만 유독 더 혼자인 것 같은 이런 분위기. 평소엔 이런 분위기가 쉽게 잡히지 않으므로 나는 음악을 통해 이 분위기를 한층 더 끌어올려보기로 했다.
이어폰을 꽂고 리처드 용재 오닐의 연주를 들었다. 안개처럼 애절한 비올라 선율이 귀를 통해 온 몸에 감겨 왔다. 그런데 너무 분위기를 잡았던 걸까. 걸음이 심하게 느려졌다. 사람들이 다 나를 추월해 간다. 한 명 빼고. 그럴려고 그런 건 아닌데 나는 새섬을 걷는 내내 서양인 할아버지를 졸졸 따라 걸었다.
새섬 산책을 끝내고 다시 서연교로 올라와 다리 중간쯤의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와 봤다. 바다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끔 꾸며진 공간이 나왔다. 아래로 내려오기 전에 봤던 할아버지는 다리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혹시 할아버지가 아직도 거기 있는가 싶어 올려다 봤지만 할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혼자였지만, 왠지 이제야 진짜 혼자가 된 기분이 들어 음악 볼륨을 높이고 대충 아무 데나 앉아 버렸다.
앉아서 할 일이라곤 바다를 보는 것뿐이었는데, 안개에 가려 바다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 나는 평생 볼 안개를 다 본 것 같다.
무언가를 보고 있으면서도 마땅히 보고 있지는 않은 흐릿한 상황. 이런 상황은 꽤 익숙하다. 목적이나 목표가 없으면, 꿈이나 의미가 없으면, 나는 금세 시무룩해진다. 하루가 재미없고, 움직임도 굼뜨다. 이럴 땐 어떻게든 스스로 움직일 동력을 만들어야 한다. 방법 중 하나는 저 멀리 어딘가 쯤에 상상 속 깃발 하나를 꽂아 놓는 것. 그럼 그것을 향해 가기만 하면 되니 마음이 편안하다.
하지만 마음만 편할 뿐이다. 목적지로 향해 가는 발걸음은 명쾌하지 않다. 안개처럼 흐릿한 잡념들이 목적지를 가린다. 그럼에도 목적지 즈음을 향해 걸을 뿐이다. 저기 어디쯤에 바다가 있듯, 깃발이 있듯, 목적지도 있을 거라는 사실 하나만 믿고.
믿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으므로, 에둘러 가야 할 때가 더 많다. 여러 방해물들이 옆구리를 찌르며 다가오니까. 갑자기 우르르 몰려드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한순간에 주위가 부산해졌다. 대가족 일행이 안개에 가려진 바다를 보려 내 눈 앞에 진을 치고 섰다. 일어나자.
천지연 폭포에서
15분 정도를 걸어 천지연 폭포 입구 쪽으로 왔다. 반갑게도 사라졌던 할아버지가 화장실 앞 벤치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물론 그럴 수는 없는 일. 대신 속으로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란다는 인사를 건네며 편의점, 빵집, 커피숍 그리고 제주 특산물과 바로 갓 짠 감귤 주스 등을 늘어놓고 있는 상점들을 지나 입구로 들어섰다.
'어? 왔던 곳이네?' 입구로 들어서니 예전에 이곳에 왔던 기억이 난다. 누구랑 왔었지?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친구들과 왔었나. 대학 1학년 때 동기들과 함께였나. 회사 다닐 때 가족들과 회사를 그만두고 친구들과 왔던 걸까. 누구랑이었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유일한 기억은 눈 앞에 보이는 숲길을 예전에도 걸은 적은 있다는 것. 숲길을 따라, 푯말을 따라 쭉 들어가니 저 멀리 드디어 폭포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사진 몇 장을 찍은 후 뒤로 물러나 물가 벤치에 폭포를 바라보며 앉았다. 명당 자리에 앉아 폭포를 오래도록 바라볼 요량으로.
어제도 폭포, 오늘도 폭포. 마음을 먹고 폭포에 정신을 집중하려던 그때, 어딘가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주위엔 사람밖에 없는데 이게 뭔 냄새가 싶어 코를 킁킁댔다. 코가 반응하는 곳에는 잘생긴 외국인 두 명이 서 있었다. 에이, 설마 저렇게 잘 생겼는데, 하며 코를 다른 쪽으로 돌리려 했지만 아무래도 이 사람들인 것 같다. 의심에 찬 눈으로 행색을 살펴보니 냄새가 날 만도 해 보인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여행을 하고 있길래. 둘 다 땀 자국이 그대로 얼룩이 되어 누렇게 변색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냄새를 풀풀 풍기며 그들은 폭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려니 하고 나는 다시 폭포로 시선을 돌렸다. 폭포는 여전히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폭포 앞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 다시 본 그 두 외국인 역시 여전히 폭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한 경쟁심이 일었다. 내가 그들보다 더 끈덕지게 폭포를 바라보고 싶다는. 코는 막혔는지 모르지만, 눈은 밝아 보이는 그 둘이 자리를 뜨면 그때 나도 일어나기로 했다.
계속 시간이 갔다. 계속, 계속. 그런데 저 둘은 말도 거의 주고받지 않으면서 뭘 저리 오래 보고 있는 걸까. 사진기를 들고 있는 것도 아닌데 눈에 도대체 얼마만큼의 폭포를 담으려고. 그런데 폭포는 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걸까. 사람들은 왜 돈을 내고 폭포를 구경하는 걸까. 그냥 물이 떨어지는 것뿐인데. 떨어지면서 그저 잠시 하얀 거품이 되는 것뿐인데. 그저 보기에 아름다워서인 걸까. 아니면 역시나 추락하는 그 자체 때문에?
김수영 시인의 시 <폭포>는 이렇게 시작한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지는 폭포. 그 기백, 그 용감무쌍한 정신을 닮고 싶어서 우리는 폭포 앞으로 모여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졌다. 두 남자는 시간의 흐름도 잊은 듯 점점 더 폭포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남겨두고 천지연 폭포를 나왔다. 나오면서 할아버지를 슬쩍 찾아봤지만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내려올 땐 내리막길이었던 길이 올라갈 땐 오르막길이 되어 있었고, 어렵사리 오르막을 오르다 잠시 서서 서귀포 항을 내려다봤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떠올랐다. 서귀포 항이 내겐 무진처럼 보였다.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 <무진기행> 중에서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채 그림같이 그 자리에 서 있는 항구. 항구를 둘러싸고 있는 안개에 몸을 숨기며 나는 항구에서 벗어났다. 오르막을 다 오르자 드디어 안개가 사라졌다.
외로이 홀로 서 있는 외돌개
게스트하우스에서 이곳 천지연 폭포로 오던 길에 보니 근처에 외돌개도 있는 것 같던데... 이미 조금 기운이 빠진 터라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이 됐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김에 보고 가는 게 낫겠지?
외돌개는 바다 한가운데에 외따로 우뚝 솟아있는 바위이다. 높이가 무려 20m에 달한단다. 외돌개를 보며 나는 확신했다. 외돌개가 유명해진 이유는 분명 외로워 보여서일 거라고. 그 오랜 시간을 홀로 그곳에 그렇게 서 있어야 했다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외로운 바위 앞에서 사람들은 즐겁게 사진을 찍었다. 나도 즐겁게 사진을 찍었다. 단체 관광객 중 한 명이 "학생, 사진 좀 찍어 줄래요?"라고 물어서 즐거운 마음은 더 커졌다. 학생처럼 공손한 자세로 사진을 찍어주며 나는 내가 더 고마운 듯 큰 소리로 웃기까지 했다. 외돌개까지 봤으니 이제 그만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자.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드러누워 한 생각. '오늘 저녁 땐 바비큐 파티가 있지. 그때까지 뭘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그녀를 봤다. '저 사람은 아직도 저렇게…'. 지난 새벽 세시에 술이 떡이 돼서 들어왔던 그녀. 술이 너무 취해 제 집인양 온갖 소음을 늘어놓던 그녀. 그녀가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다. 혹시…?
"저기요…, 저기요…?, 저기요…!""…네?…저요…?""괜찮으세요? 몸이 너무 힘들거나 그러신 거에요? 제가 약이라도…""아…아니에요. 그냥…쉬는 거에요. 피곤해서…""아, 정말 괜찮으세요? 어제 보니까 조금 무리하신 것 같던데.""아…아니에요. 그냥…피곤해서요.""아, 네. 그럼 됐구요."끔찍한 숙취를 겪고 있는 게 분명하다. 저승길이 눈 앞에서 아른거리겠지. 하긴 저 상태에선 뭘 한들 그다지 효과가 없을 것이다. 나라고 모를까. 그저 숙취엔 참고 또 참는 수밖에 없다. 그녀는 다음 날 아침까지 저러고 계속 누워있기만 했다.
기운을 차리기 위해 그녀와 함께 조금 더 누워 있다가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바비큐 파티를 하기 전에 이중섭 거리에 들러 조카 정인이 선물을 하나 사고 싶었다. 무언가 기억에 남는 선물을 주면 좋을 것 같아 둘러보던 중 캐리커처가 눈에 들어왔다. 조카 사진을 보여주니 토실토실하니 귀여운 캐리커처가 하나 탄생했다.
바비큐 파티에선 신나게 놀았다. 돼지 고기 무한 리필에, 맥주 무한 리필에. 이곳 게스트하우스에서 한 달째 묵고 있다던 장기수의 기적 같은 고기 굽기 실력에 탄복하며, 지하 선술집에서의 합창과 기차놀이에 열광하며, 우리는 여행자의 특권을 맘껏 누렸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아무 걱정 없이 즐겁고 신나게 이야기할 수 있는 특권. 약간은 무리를 해서라도 더 웃고 더 떠들 수 있는 특권. 그 누구와도 편견 없이 쉽게 친해질 수 있는 특권. 나를 드러내도 좋고, 드러내지 않아도 좋을 특권. 이 특권들을 등에 업고 우리는 실컷, 아주 실컷 놀았다. 신나는 밤이 늦게까지 이어졌다.
덧붙이는 글 |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