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06년부터 시작된 KTX 해고승무원들의 투쟁이 어느덧 10년 가까이 다 되어갑니다. 34명의 해고승무원들이 한국철도공사를 상대로 낸 근로자 지위 확인소송에서 1, 2심 재판부는 이들이 "한국철도공사의 정규직"이라며 승무원들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2015년 2월, 대법원은 이들이 "한국철도공사 정규직이 아니다"라며 원심을 파기,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10월 23일, 고법 3차심리를 앞두고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글을 보내와 싣습니다. [편집자말]
KTX 여승무원들은 노동부의  불법파견 여부에 대한 재조사 결과 발표를 하루 앞둔 2006년 9월 28일 오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뒤, 몸에 쇠사슬을 묶고 국회진출을 시도했다. 몸에 쇠사슬을 묶고 국회 진출을 시도하던 KTX 여승무원들이 경찰에 가로 막히자 눈물을 흘리고 있다.
 KTX 여승무원들은 노동부의 불법파견 여부에 대한 재조사 결과 발표를 하루 앞둔 2006년 9월 28일 오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뒤, 몸에 쇠사슬을 묶고 국회진출을 시도했다. 몸에 쇠사슬을 묶고 국회 진출을 시도하던 KTX 여승무원들이 경찰에 가로 막히자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관련사진보기


1980년생. 그녀들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1980년생. 동갑. 비정규직. 해고자. 그녀들 세 사람의 공통점이다. 황이라는 부산지하철매표소에서 일하다 자동발매기가 들어오면서 해고됐고, 박지예와 그리고 또 다른 그녀는 KTX에서 해고된 여승무원이다. 우연이겠지만 해고된 시기도 비슷하다. 게다가 황이라와 박지예는 중학교 동기동창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안 건 KTX 해고 여승무원들의 복직을 촉구하는 부산역 집회에서였다. 마지막 순서에 여승무원들이 쭉 나와서 인사를 하는데 그녀들을 유심히 보던 황이라가 말했다.

"저기 끝에서 세 번째 까만색 옷 입은 사람, 내 중학교 때 친구 같은데.."

설렘과 걱정이 동시에 묻어나는 묘한 목소리. 머뭇거리는 황이라를 그녀들 앞에 데리고 가 사실을 확인한 건 나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가장 서러운 이름 해고자로, 가장 추운 자리에서 해후하는 게 아팠는지 황이라는 며칠을 심란해했다.

"지옌 내보다 착했는데. 지옌 내보다 공부도 잘했는데."

앓는 사람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근데 왜 비정규직이 됐을까. 근데 왜 해고됐을까'란 말이 뒤따라오는 게 자연스럽겠으나
비정규직이 된 거나 해고된 게 개인의 잘못이 아님을 그맘때 황이라는 이미 아는지라 자연스럽게 삼켰겠지.

부산지하철 매표소 해고자들은 몇 년을 치열하게 싸웠지만 결국 교통공사 내 비정규직 자리를 알선받는 조건으로 투쟁을 마무리했고, 그때까지 남아 싸우던 10여 명 중 그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서너 명은 아직도 비정규직이다. 11년째.

2011년, KTX여승무원들은 다행히 고법에서 승소판결을 받고, 복직해서 현장에서 만나길 기약하며 꿈에도 그리던 일상으로 돌아갔다.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게 판결이긴 하지만 그녀들의 삶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고법 승소 판결, 그녀들의 삶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대법원이 한국철도공사(이하 코레일)에 직접고용을 요구했다가 해고된 전 KTX 승무원에 대해 1·2심 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코레일의 노동자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린 가운데, 2015년 3월 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역 앞에서 KTX 승무원 조합원과 철도노조 조합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법원의 부당판결을 규탄하며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 아기 안고 다시 거리로 나온 KTX승무원 대법원이 한국철도공사(이하 코레일)에 직접고용을 요구했다가 해고된 전 KTX 승무원에 대해 1·2심 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코레일의 노동자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린 가운데, 2015년 3월 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역 앞에서 KTX 승무원 조합원과 철도노조 조합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법원의 부당판결을 규탄하며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결혼을 미루었던 친구들은 결혼을 했고, 출산을 미루었던 친구들은 아이를 낳았다. 몇 년간 유예되다시피 했던 경사가 해금에서 풀린 것처럼 주말마다 결혼시즌이 이어지더니, 이어서 첫 아이 돌시즌, 둘째 아이 돌시즌이 줄줄이 이어졌다.

얼마 전 일인 시위를 함께하던 친구에게 결혼했냐고 물으니, "고법판결 나고 했어요"하며
웃는다. 그 다음 주에 다른 친구에게 아이가 몇 살이냐고 물으니, "고법판결 나고 낳았으니
네 살이네요." 살다보면 몇 번의 커다란 분기점이 있는 게 인간사이지만 그녀들에겐 고법판결 전과 후가 그렇게 확연히 갈렸다.

오랫동안 선망했던 이른바 '평범한 삶'. 맘 편히 연애도 해보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아이 옷을 사고, 남편 넥타이를 고르고, 주전자를 사고, 집을 사고, 가계부를 쓰며 사라진 만 원을 찾아 몇 번을 계산하고, 대출금 상환계획을 세우며... 빡빡하지만 그런 삶. 그런 희로애락.

'희'와 '락'이 더 많아야 할 나이에 '노'와 '애'에 지배당하는 시간들이 얼마나 숨 막혔을까.
그런 삶으로 그녀들이 되돌아가게 된 건, 고법판결 덕분이었고, 그걸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했던 대답.

"고법판결 나고 낳았으니 네 살이네요."

법은 이래야 한다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수십 차례 재판을 받고 몇 번의 항소이유서를 썼지만 법이 내게 인간의 얼굴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최후진술을 할 때 마다, 항소이유서를 쓸 때 마다 빠뜨리지 않고, 법이 정의여야 하고, 약자들 편에 서야하고, 어쩌구저쩌구 해왔지만 그때 나는 비로소 법이 어떤 얼굴이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본 거 같았다.

아가, 얼굴도 모르는 아가

그렇게 살게 내버려 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아직은 이름조차 입 밖에 낼 수 없는 그녀도 살아 있겠지. 아마도 고법판결 이후 낳았을 그녀의 아이는 엄마 잃고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어른들은 그 어린 것에게 엄마의 부재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먼저 엄마란 말을 배우고, 그 엄마를 가장 먼저 불렀을 세 살짜리 아이에게. 비정규직이란 말도, 해고란 말도, 파기환송이라는 말을 알아들을 수도 이해할 수 없는 아이에게...

아가.
얼굴도 모르는 아가.
이름도 불러본 적이 없는 아가.
네가 자라 엄마 나이가 되면 너에게서 엄마를 앗아간 이 세상을 너는 어떤 얼굴로 바라보게 될까.

추석이 지나 부산 승무원 대여섯 명이 모여 저녁을 함께 먹는 자리. 늘 집회장에서, 그녀들의 단식농성장에서, 내 단식농성장에서, 그녀들의 고공농성장에서, 내 고공농성장에서 스쳐왔던 그녀들을 10여 년 만에, 가장 따뜻한 자리에서 듣는 눈물겨운 이야기들.

승무원 시절에 겪은 성추행 이야기, 무궁화호 표를 끊고 탄 승객이 자기가 내릴 역에 안 내려준다고 폭력을 휘두른 이야기. KTX를 탈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눈물이 흘러서 승무원들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는 이야기.

언제쯤이면 KTX를 타도 아무렇지도 않을까. 혼잣말처럼 그녀는 물었고, "이기면 괜찮겠지." 옆에 앉은 이가 대답했다. 태어나서 자란 이 나라가 징그러워서 외국에 나갔다는 그녀는 다시 출국했을까.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셨을 때 영사관까지 가서 분향을 했다 하니 옆에 앉은 이가 자기는 봉하마을까지 가서 조문을 하고 왔단다. 자기 주변에서 누가 죽은 게 처음이라 장례식장을 난생 처음 가봤다 했다.

"우리를 그렇게 만든 노 대통령이 니 주변이가?" 물으니 "불쌍하잖아. 그 사람도 바위에
올라가기 전에 얼마나 울었겠노."

억울하게 핍박받는 사람을 '주변'으로 인식하게 된 저 청춘의 삶. 부모님의 장례도 이른 나이에 친구이자 동지의 죽음은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몇 년 전부터 황이라는 한번씩 뜬금없는 소릴 하곤 했다. '지예 결혼했겠지' 고법판결 이후 나도 그녀들과 연락이 끊겼으니 굳이 내게 묻는 말은 아니다. 친구 누군가의 출산 소식을 들으면 '지예도 아이를 낳았겠지'로 자가발전했다. 그렇게 한번씩 궁금해하던 그녀들이 다시 만난 건 부산역 집회에서였다.

파기환송 이후 투신으로 목숨을 끊은 그녀의 죽음을 기리는 추모제. 사실 그 자리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 문화제의 성격을 정확히 몰랐다. 파기환송에 대한 규탄집회라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서 들은 그녀의 죽음. 그리고 다시 울며 해후한 황이라와 박지예.

그날 황이라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같은 시기, 같은 내용의 투쟁을 해야 했던 동갑내기 셋 중 하나가 그렇게 죽었다. 도대체 이 나라는 젊은이들에게 왜 이다지도 가혹한 걸까.

10월 23일 고법 3차심리

요새 황이라는 KTX 해고승무원들의 부산역 일인시위에 나간다. 그렇게라도 친구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란 걸 묻지 않아도 안다. 코레일 유니폼을 입고 지나는 이들을 볼 때마다 쓸쓸하게 얘기한다.

"저 사람들이 관심 가져주고 나서주면 내 친구가 복직할 수 있는데.."

복직해서 단 하루만이라도 지하철에서 다시 일하고 싶다는 황이라의 꿈.

10월 23일. 파기환송된 KTX 해고여승무원들에 대한 고법의 3차심리가 다시 열린다. 이승에서 한이 많으면 저승으로 가지 못한다던가. 그녀가 어디선가 지켜볼 재판.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절망과 고통이 끝나길 바란다. 남겨진 아이가 먼훗날 엄마를 떠올릴 때 울지 않기를. 자기를 두고 그렇게 떠나버린 엄마를 원망하지 않기를.

그녀가 이 나라로 맘 편히 다시 돌아오길.
그녀들과 가족들의 이 무서운 불안이 끝나기를... 부디...

○ 편집ㅣ홍현진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진숙님은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입니다.



태그:#비정규직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