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간다. 들에서 시작된 가을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다. 누렇게 익은 황금벌판이 콤바인의 서슬 푸른 칼날에 잘려나간다. 빈 들판의 허허로움을 달래려는 듯 산은 형형색색의 고운 옷을 갈아입을 채비를 한다.
한낮의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는 오후.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산자락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가을 들길의 여유로움옅은 안개가 내려앉은 지난 토요일 오후다. 감나무에서 손에 닿은 노란 감 몇 개를 따고 있는데, 핸드폰 소리가 요란하다. 주말 행사가 있어 출장 다녀오는 아내다.
"나, 금방 도착해요. 도착하면 들길 자전거 타는 거 어때요?"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요즘은 해가 짧아져 직장에 다니는 아내와 함께 자전거 타는 게 어렵다. 해가 떨어지려면 시간 반 정도는 남은 것 같다.
감을 한 접 남짓 땄다. 노란 감이 가을색이다. 땡감이라 칼로 깎아 곶감을 만들면 간식으로 그만이다.
아내 차 들어오는 소리가 반갑다. 나는 물병을 챙기고, 카메라를 챙겼다.
"당신, 카메라는 왜?""오늘 낙조 사진 한 방 찍을까 해서. 해무가 끼어 해넘이가 볼 만할 것 같은데.""그럼, 굴암돈대로 가볼까요?""어쩜 내 생각과 같을까!"돈대에서 해넘이 구경? 색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아직 서쪽 하늘에는 해가 많이 남았다.
가을 추수가 한창이다. 고개 숙인 벼이삭이 바람에 출렁이며 황금색 물결을 이룬다. 황금들판이란 말이 어울린다. 들판 색깔로 보면 요즘이 그야말로 농번기이다. 그런데, 간간히 들리는 콤바인 기계음이 들릴 뿐, 한가하다. 세상이 바뀌어도 이렇게 바뀌었을까?
자전거 전용도로에 들어섰다. 아내의 자전거페달에 더욱 힘이 실린다. 뒤 따르는 내가 벅차다. 어느새 굴암돈대 이정표가 보인다. 아내가 서쪽바다 해를 바라보다 멈춰 선다.
"여보, 해 떨어지려면 아직도 여유가 있어요. 우리 좀 더 달립시다." "그럴까. 그런데, 지는 해는 엄청 빠른 거 알지? 맘 놓다가 낙조를 놓치는 수가 있어!"역사적 의미가 있는 굴암돈대 우리는 평소 달리던 건평항까지 내달린다. 해무에 걸린 붉은 해가 오늘따라 멋지다. 등허리에 배인 땀은 산들산들 부는 바닷바람에 씻겨나간다. 상쾌한 기분으로 날아갈 것 같다.
돌아오는 길이 바쁘다. 굴암돈대에서 해넘이를 여유있게 감상할 수 있을까? 마음이 급하다. 지나쳤던 굴암돈대 표지판에 도착한다. 여기서 돈대까지는 130m. 짧은 길이지만 경사가 급하다.
다행히 해가 지려면 여유가 있다. 여러 번 다녀간 돈대이지만, 오늘따라 더 멋져 보인다. 굴암돈대는 도로가에서 멀지 않은 곳이고, 인근에 부대가 있어 돈대 코앞까지 차로 갈 수 있다.
강화돈대는 조선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때 천혜 요새인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에 놀란 조정은 해안경비를 위해 축조한 것이다. 효종은 성의 축조와 군량 보충을 강화하였고, 숙종은 인조 때부터 유사시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진과 보를 증설하고, 각 진과 보에 돈대를 설치하여 분담하여 경계토록 하였다.
강화에는 50여 개의 많은 돈대가 있다. 돈대는 지금으로 말하면 해안지역을 감시하기 위한 초소이다. 적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소규모 군사기지라 할 수 있다. 대개는 시야가 탁 트인 높은 평지에 돈대를 쌓았다.
강화돈대는 숙종 때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가 총책임자였으며, 당시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가 모든 현장 작업을 총지휘하여 축조하였다.
무거운 돌을 나르고 축조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수천 명의 어영군(御營軍)과 이보다 훨씬 많은 승군(僧軍)이 동원되어 채석에서 축조까지 약 반년 만에 이루어진 지금으로 말하면 국책사업이었던 셈이다.
무거운 돌을 운반하고, 다듬고 축성하기까지 동원된 사람들의 수고와 부역의 희생은 얼마였을까? 손이 부르트고 등이 휘어졌을 노고가 느껴진다.
숙종이 내린 비망기(備忘記)를 보면, 그 당시 임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강화도는 이 나라의 보장처(保障處)라는 것이다. 봄 기근이 심할 때 뜻밖의 위급에 대비하기 위해서 민중을 동원하여 돈대를 설치하는 일로 농토를 침범하고, 어지럽혀 농사에 지장을 초래하게 되어 민망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강화도 돈대 축성에 민초들을 축성에 직접 동원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겪었을 아픔을 배려한 비망기가 마음에 와 닿는다.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을 엄히 단속하고 주민을 위로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니 특별히 근시(近侍)를 보내서 진휼하는 뜻을 선포하고, 아울러 금년의 전조(田租)를 면제해 준다. 또 1만에 가까운 승군들도 멀리 와서 공사에 임하고 있으니 마땅히 진념(軫念)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쌀 1백석과 3승포(三升布) 20통(桶)을 특별히 지급하니 승장(僧將)이 받아서 균일하게 나누어 주도록 하라. 역군 중에 만일 소란을 피우거나 마을에 폐를 끼친 자가 있으면 군법으로 다스리고 결단코 용서치 않을 것이니 모두에게 알리도록 하라.'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8호인 굴암돈대(屈岩墩臺)는 반달모양의 형태이다. 원래는 원형의 형태였으나 변형되었다고 한다. 아마 지금의 직선의 석축이 개축되면서 잘려나가 반원형태가 되지 않았나 싶다. 굴암돈대는 남쪽으로 송강돈대(지금은 선수돈대라 부른다)와 건평돈대와 함께 정포보(井浦堡) 소관이었다.
가을 빛깔 같은 노을에서 행복을돈대 입구에 들어서자 먼저 와서 석양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부부로 보이는 분들의 뒷모습이 다정하다. 석양을 바라보며 무슨 이야기들을 할까? 우리는 두 분 이야기에 방해될까 먼 거리에서 노을을 바라본다.
사푼사푼 걸으며 돈대의 여기저기를 살핀다. 대포를 올려놓은 포좌는 4문이 있다. 한 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많이 훼손되어 있다. 무성했을 잡초를 뽑아 정돈된 관리를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폐타이어바퀴로 계단을 만든 돈대 위에 오른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소중한 문화재에다 이게 웬일이야? 문화재 보수도 중요하지만, 격에 어울릴 수 있게 해야지, 참내!" 문화재는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여 선조들의 뜻과 숨결을 느끼고, 소중한 가치에서 역사를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
낙조의 풍광이 장엄하다. 떨어지는 해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하늘과 바닷물을 붉은 빛으로 물들인다. 가을빛 속 저녁노을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자연의 놀라운 조화에 고개가 숙여진다.
바닷물 속의 소용돌이에 먹이를 찾는 새떼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노을과 조화를 이룬다.
우리 발자국 소리에 석양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겼을 젊은 부부가 우리를 보고 밝은 웃음을 보낸다. 혼자 보기 아까운 풍광을 함께 나눌 수 있어 반가운 모양이다.
아내가 내 카메라를 뺏는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다정하게 나누세요. 보기가 참 좋았어요. 저희도 사진 한 방 찍어주세요? 두 분처럼 포즈를 취할게요. 돈대와 지는 해를 함께 나오도록요!"
나의 어설픈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은지 자꾸 다정한 모습을 취하라 한다. 어느새 우리는 낯선 이와 다정한 이웃이라도 된 듯 서로 번갈아 사진을 찍는다. 돈대에서의 석양노을처럼 불그스레한 미소를 담으면서….
돌아오는 길, 아내는 떠오르는 해는 찬란함으로 눈이 부시지만, 석양 노을의 찬란함은 누구나 마주하고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우리의 노년도 누구에게나 편안함을 줄 수 있는 저 노을빛을 닮았으면 참 좋겠다.
덧붙이는 글 | 굴암돈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98번지
강화도 외포리포구에서 선수포구로 향하는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건평항을 지나 문화재 안내표지가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