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마리아 엘레나'를 찾아가는 여정의 시작은 칠레 산티아고에서 본 한 다큐멘터리에서 시작되었다. 처음 이 다큐멘터리에 대한 소개를 보았을 때 '마리아 엘레나'라 불리는 한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한 여인의 이름을 딴 마을의 이야기였고 칠레 초석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는 하나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마을이었다. '세계에 마지막으로 남은 초석장 마을이라는 타이틀을 단 '마리아 엘레나'는 그렇게 나에게 알고 싶은 곳이 되었다.

'하얀 금'이라 불리던 칠레 초석

칠레 북부의 평원은 하얀금이라 불리던 초석의 땅이었다.
 칠레 북부의 평원은 하얀금이라 불리던 초석의 땅이었다.
ⓒ 홍은

관련사진보기


칠레 초석에 대한 역사를 잘 알았을 리 없다. 이 다큐멘터리는 나에게 그 역사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1880년부터 1930년 칠레 북부 안토파가스타와 타라파카 지역은 칠레 초석이라 이름하여진 질산 나트륨 성분이 함유된 광물로 '하얀 금'의 시대라는 호황을 누린다.

1879년 남미 태평양전쟁의 원인은 바로 이 광물이 포함된 아타카마 지역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었다고도 한다. 전쟁 승리 후 칠레 북쪽 아타카마 지역에 수백 개의 초석장을 생겨났고 초석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광산촌을 형성하여 살았다.

하지만 이 호황은 반세기를 넘기지 못했다. 1913년 노벨 화학상 수상과 세계 1차대전 화학무기 개발로 알려진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의 암모니아 생성법 발견은 이 광물과 직접적인 경쟁이 되었고 그 수요가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초석장들은 하나 둘 문을 닫고 광산촌의 사람들도 마을을 떠나면서 현재 북쪽의 초석장과 그 마을들은 유령마을로 남게 되었다. "마리아 엘레나"를 알아요? 마리아 엘레나를 찾아가기 위해 정보를 찾았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 그 초석장. 지금은 유령마을 아닌가? 거기는 왜 가려고?"

주로 이런 반응이었다. 북쪽으로 가까이 가면 좀 알 수 있으려나 하고 산 뻬드로에 도착하자마자 만나는 사람마다 물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현지 여행사들도 그 마을에 대해 물어보는 여행자는 내가 처음이라며 왜 거기를 가고 싶어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거의 포기하고 있을 즈음, 산 뻬드로에서 투어 중 만난 버스 운전사 아저씨가 처음으로 반가운 답을 주셨다.

"나도 가본 지 오래됐는데 정말 가 볼 만해. 거기 있는 모든 것이 역사야."

그리고는 대충 글로 공부한 초석장의 역사를 다시 정리해주셨다. 운전사 아저씨와 이야기중인 것을 듣고 있던 칠레에 살다가 오스트리아로 오래 전 이민가셨다는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와 말을 덧붙인다.

"우리 아버지가 북쪽 초석장에서 일했지. 칠레 역사에서 초석장은 아주 중요해. 어머니 말씀이 당시에는 거의 노예처럼 일했다고 해. 글 배우는 것도 금지되어 있어서 몰래 숨어서 글을 배워야 했지."

화폐대신 지급되었던 피차와 물건을 바꿀수 있는 종이.
 화폐대신 지급되었던 피차와 물건을 바꿀수 있는 종이.
ⓒ 홍은

관련사진보기


실제로 초석장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이민자들이 그 시기에 노동자로 들어왔고 많은 초석장이 급여를 현금으로 주지 않고 '피차'라는 토큰 같은 것으로 지불했다. 이 토큰은 초석장 마을 안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화폐 대용이었는데 실제로 초석장 마을 안에 있는 모든 가게들은 초석장 회사의 소유였다. 결국 회사는 돈을 지불하고 다시 그 돈을 수거하는 형식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초석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노예와 같은 삶이었다고 한다. 이에 분노한 일꾼들이 큰 파업을 벌였는데 1907년 12월 이키케의 도밍고 산타 마리아 학교에 노동자들과 가족들을 모두 가두고 사살한 사건이 역사적으로 크게 남아있다. 무려 30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학살되는 참사였다. 이후 '산타 마리아 칸타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드디어 만난 '마리아 엘레나'

다큐멘터리 하나로 가고 싶었던 마리아 엘레나의 입간판
 다큐멘터리 하나로 가고 싶었던 마리아 엘레나의 입간판
ⓒ 홍은

관련사진보기


자세한 정보는 결국 얻지 못한 채, 이 마을을 기억하는 몇 사람들의 지원에 힘입어 미지의 마을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의 목적지는 북쪽 도시 이키케였는데 내 표를 본 차장 아저씨가 한 번 더 확인을 하신다. 산 뻬드로를 출발하여 버스는 3시간 남짓 그야말로 건조한 평원(팜파)을 달린다.

무슨 마을 같은 것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길을 그렇게 달리다 보니 '마리아 엘레나'라는 이정표가 나오고, 얼마 가지 않아 아치형의 마을 입간판이 나왔다. 마을에 들어서서 보이는 첫 풍경은 언뜻 5년 전 스페인에 오기 전 잠시 머물던 우리나라 북쪽 도계 탄광마을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버스에서 내려 버스 매표소 직원 아가씨에게 혹시 이곳에 잘 곳이 있는지부터 물었다. 숙소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일정을 달리 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여기 방들이 다 찼어. 스페인 사람들이 인근 태양열 건설 때문에 일하러 와서 빈방 찾기 힘들 거야."

몇 군데 전화를 하니 역시나 방이 없다. 점심시간이라며 버스 사무실 문을 닫고 마을의 마당발 아나 할머니 가게에 데려다 주었다. 마리아 엘레나에서 큰 살롱을 운영하시고 계셨는데 역시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침 점심식사 중이시던 할머니는 뽀로토(칠레 콩스프) 한 그릇을 내어주신다.

"여기도 이제 사람들이 춤추러 안 와. 한때는 북적 북적했는데…."

제법 넓은 홀을 둘러보는 나에게 아나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방구하기는 틀렸다 싶어 짐을 살롱에 맡기고 마을을 돌아보기로 했다.

하이메 아저씨와의 만남

초석장의 기계들과 초석을 나르던 기차는 모두 멈췄다.
 초석장의 기계들과 초석을 나르던 기차는 모두 멈췄다.
ⓒ 홍은

관련사진보기


막상 마을을 나서니 가이드북도 없고 뭘 어떻게 봐야 할지도 애매했다. 그냥 광장 근처를 어슬렁 거리며 버스에서 봤던 집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한 생수 트럭 아저씨가 멈추어서더니 왜 왔는지 물으신다. 다큐멘터리 본 이야기를 시작으로 왜 마리아 엘레나에 왔는지 설명하니 군청에 가서 '하이메' 씨를 찾아 보라고 하셨다.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은 마을 끝에 위치한 군청 계단에서 하이메 아저씨를 기다리며 앉았는데 괜히 웃음이 나왔다. 다큐멘터리 하나로 시작된 대책없는 길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도착해 있구나라는 생각에 스스로 대견하기도 해서였다.

잠시 후 군청 문으로 들어서는 하이메 아저씨는 놀랍게도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를 하신 분이었다. 아저씨는 멀리서 찾아온 손님이 귀찮지는 않으신 모양이었다. 직접 가이드를 해주시겠다고 선뜻 나서셨다. 마리아 엘레나에서 30분 남짓 떨어진 바닷가 마을에 살다가 23살에 이곳 라디오 방송국으로 스카우트되어 오셔서 지금까지 마을 라디오 일과 군청일을 하고 계셨다.

"50년을 이곳에서 지냈지만 이 건조한 평원에 적응하는 건 여전히 힘들어. 하지만 나에게 마리아 엘레나는 제2의 고향이고, 내 청춘의 모든 것이지."

마을의 본래 이름은 고야 노르떼(북쪽 고야)였다. 1925년 이곳 초석장 설립자가 그의 아내 메리 엘렌이 죽자 이를 기리며 초석장과 마을의 이름을 마리아 엘레나로 바꿨다. 근처에 고야 수르, 페드로 발디비아, 호세 프란시스코 베르가라(아래 프란시스코) 등 총 4개의 초석장이 있었는데 현재 프란시스코는 전면 문을 닫았다. 고야 수르는 초석장만 운영이 되고, 마을은 없어진 상태.

페드로 발디비아도 마을은 이미 철수되고 초석장도 최소한의 운영만 남기고 11월 말에 문을 닫을 예정이라 거의 700여 명의 실업자가 생길 예정이라고 한다. 마리아 엘레나는 초석장은 문을 닫았지만 마을은 유지되고 있는 유일한 곳으로 고야 수르와 페드로 발디비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주해 살고 있다.

유령마을로 변한 초석장 '프란시스코'
 유령마을로 변한 초석장 '프란시스코'
ⓒ 홍은

관련사진보기


그 중 가장 먼저 문을 닫은 프란시스코 초석장과 마을은 마리아 엘레나에서 30분 남짓 평야를 달려 도착할 수 있었다. 가는 길에 보니 평원 가운데 각각 초석장으로 가는 안내표지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도착한 곳은 오랜 유물인양 공터에 언젠가는 집이었을 벽들이 남아있었고 당시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더 이상 새로운 무덤이 생겨나지 않는 묘지인 셈이다. 단지 가끔 이곳에 묻힌 가족을 찾아오는 옛 주민들의 발걸음이 있을 뿐이다.

"고야 수르 초석장에 살던 한 가족이 일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어. 그리고 시간이 흘러 문득 다시 자신의 고향이 보고 싶어서 마을을 찾아 왔는데 이미 마을이 없어진 거야. 초석장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가장 안타까운 일은 자신의 고향이 없어지는 거지."

하이메 아저씨는 가끔 머리가 복잡하면 이곳에 와서 바람을 쐬고 간다고 했다. 평원의 고요함이 좋다고 했다. '하얀 금'을 캐던 도시의 흔적 위로 그렇게 바람만이 남아 있었다.

결국은 사람을 만나는 여행

마리아 엘레나의 가이드가 되어준 하이메 아저씨와 가족
 마리아 엘레나의 가이드가 되어준 하이메 아저씨와 가족
ⓒ 홍은

관련사진보기


아저씨 덕분에 할아버지가 중국인이었던 이네스 할머니 댁에 머물 수 있었다. 당시 초석장에는 많은 중국인 이민자들이 와서 일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아시아 사람이라고 자기 친척 만난 듯하다며 반가워해 주셨다.

저녁 초대까지 해주신 아저씨는 이 모든 여정의 시작이 되었던 '마리아 엘레나' 다큐멘터리 DVD와 본인이 직접 쓰신, 마리아 엘레나와 함께한 개인의 이야기를 담은 <라디오의 기억>이라는 책 한 권을 선물해 주셨다.

한 마을의 역사를 찾아 왔지만 내가 만난 것은 현재의 마리아 엘레나와 그 현재의 시간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작은 동네라 하루 사이에 인사할 사람들이 많아진 마리아 엘레나를 떠나는 길이 아쉬웠다.

다른 사라진 마을처럼 이 마을도 언젠가는 사라지지 않을까라는 나의 우려에 "마리아 엘레나는 계속 될 거야. 그래야 해." 아저씨는 확신인듯 바람인듯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남은 초석장 마을. 다시 돌아왔을 때 여전히 반가운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칠레 초석장, #마리아 엘레나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흙, 예술치료, 스페인 문화&언어, 글쓰기로 삶의 형태를 만들어갑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