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읍내로 마실을 가서 '소고기 설도'라는 고기를 조금 장만했습니다. '설도'라는 이름은 언제나 낯설고, 이 이름이 어디를 가리키는가 하고 이야기를 들어도 이내 잊습니다. 한국말사전을 찾아보면 '설도'라는 낱말은 아예 안 나옵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아야 비로소 '泄道'라는 한자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泄道'라는 고기는 소에서 어디일까요?
인터넷에서 찾아본 백과사전에서는 예전에 '구녕살'이나 '밑살'이나 '비역살'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한국말 이름이 '먹는 것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듣기에 안 좋다'고 해서 한자말 이름으로 바꾸어서 쓴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泄道'라 하든 '비역살(밑살, 궁둥살, 구녕살)'이라 하든 "궁둥이 쪽에 있는 사타구니 살"을 가리킵니다. 어떤 이름을 쓰든 소고기 가운데 한 곳을 가리킬 뿐이에요.
가만히 보면, 고깃집이나 푸줏간에서는 '앞다리'나 '뒷다리'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나, '전지(前肢)'나 '후지(後肢)'라는 이름을 쓰기도 해요. '전지·후지'는 듣기에 좋은 이름일까요? 알아들을 만한 이름일까요?
"태워 줄까? 수학여행?" "……. 따돌려졌어요." "늘 그렇지만, 혼자 여행이 최고지. 차 돌릴까? 저거 너네 학교 차 맞지?" (10∼11쪽)
'언니는 막 피어난 꽃의 싱싱하고 분명한 향기보다, 은은하고 포근한 말린 꽃향기가 나는 사람 … 어느 사진작가 집을 방문했을 때 집에 가득했던 매화나무. 꽃차를 즐겨 만드는 언니를 위해 시골의 야생국화를 꺾어다 준 남자. 내가 마신 건, 사진을 찍어내듯 소중하게 말려져 봉인된 기억들이었어.' (43, 48쪽)오늘 아침에 '밑살구이'를 합니다. 아이들이 먹기 좋도록 처음부터 알맞게 썰어서 굽습니다. 밑살이라고 하는 고기를 먹은 일은 퍽 드물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곁님이 아기를 배거나 낳아서 몸을 돌보며 미역국을 끓이던 무렵 밑돈을 살뜰히 모아서 모처럼 한 번 밑살을 장만해서 쓰곤 했어요. 밑살을 구워서 먹은 일은 마흔 해 남짓 살며 아직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처음으로 밑살구이를 아이들하고 먹었어요.
조주희님이 빚은 만화책 <키친>(마녀의책장,2010) 넷째 권을 읽으며 아침으로 먹은 밑살구이를 가만히 떠올립니다. 네 식구는 밑살 사백오십 그램쯤을 한 끼니로 깨끗이 먹습니다. 이만 한 무게라면 고깃집에 가서 먹으려 할 적에 돈을 꽤나 써야 했겠지요. 집에서 구워도 돈은 꽤 치른다고 할 만하지만, 나와 곁님으로서는 처음이요 아이들로서도 처음인 새로운 고기구이입니다.
자, 그러면 처음으로 먹어 본 밑살구이는 어떤 맛이었을까요? 자주 먹을 수 있다면 참으로 즐거웁겠네 싶도록 맛있더군요. 밑살구이를 하면서 불판 둘레에 고구마랑 당근을 함께 구워 보았는데, 고구마구이와 당근구이도 맛있습니다.
'뭐야, 짜증나게 탈북자가 뭐야. 전학생은 늘 한방으로 처리했는데. 쳇, 어쩔 수 없지. 없는 사람 치자. 뭐, 자기도 알아서 조용히 하잖아.' (58쪽)"내 어머닌 5년 전 함께 국경 넘다 강물에 빠져 죽었다. 내 아버진 2년 전 공안에게 붙들려 북조선으로 끌려갔고. 니 아나? 네 어머니, 아버지." (68쪽)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으면서 오늘 짓는 이 밥 한 그릇은 우리 아이들한테 어떤 맛으로 스며들면서 어떤 이야기가 될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설거지를 하면서 오늘 지은 이 밥 한 그릇을 비운 우리 아이들은 어떤 기쁨을 몸이랑 마음에 담으면서 씩씩하게 놀까 하고 돌아봅니다.
밥이랑 국만 단출하게 차리기도 하고, 마당에서 뜯은 풀을 신나게 올리는 봄밥도 있고, 카레나 짜장을 하기도 하고, 부침개를 한다든지 달걀말이를 하기도 합니다. 손이나 품이 가는 밥은 잘 안 해 버릇하는데, 아이들은 늘 고맙게 밥상을 받습니다.
웃고 떠들고 놀며 딴짓도 실컷 하며 수저를 쥡니다. 큰아이는 왼손 젓가락질이랑 숟가락질을 하겠다면서 늘 용을 씁니다. 작은아이는 한 숟가락 뜨고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면서 놀고, 또 한 숟가락 뜨고 다시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면서 놉니다.
이 아이들은 앞으로 스무 살이 되거나 마흔 살이 되면 저마다 어떤 밥을 손수 차려서 하루를 즐길 만할까 궁금합니다. 앞으로 나는 이 아이들이 차린 밥상을 받을 날이 있을 텐데, 그때에 이 아이들은 어떤 밥으로 기쁜 아침이나 저녁을 베풀어 줄는지 궁금합니다.
"완이 엄마, 여기서 뭐 해?" "정말, 이유식이 맛이 없네요. 이런 걸 먹으라고 주다니. 아줌마, 전 엄마 노릇 못하겠어요. 아이 하나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는 엄마라니. 으흐흑, 흐흑." "아이고 이를 어째, 진정해. 아니, 대체 맛이 어떻기에. 음, 좀 맹탕이네. 소금 좀 치면 나으려나." "네? 책에서 이유식엔 소금 치지 말라고. 알레르기 반응 살피면서 야채부터 고기로 하나씩." "에이, 그게 다 뭐야. 아기도 맛있어야 먹지. 고기 야채, 다 때려넣고 양념해서 끓여. 우리 애들은 그냥 짠 국에 밥 말아 키웠구만." (96∼97쪽)조주희님이 빚은 만화책 <키친>은 밥 한 그릇하고 얽힌 삶을 차분히 보여줍니다. 맛있는 밥이든 맛없는 밥이든, 고단한 제삿상이든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잔뜩 차려입고 멋부리면서 먹는 밥이든, 사람들이 저마다 다 다른 삶을 누리며 다 다른 밥을 지으면서 마주한 삶을 만화로 엮어서 넌지시 보여줍니다.
밥 한 그릇에서 웃음이 솟고, 밥 한 그릇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밥 한 그릇으로 하하하 웃는 동안 기쁨이 솟고, 밥 한 그릇을 마주보며 뚝뚝 눈물을 흘리다가는 새롭게 마음을 다잡습니다.
"정말 당신이 마음에 들었어요. 가까워지고 싶어요. 다시 만나고 싶고.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두부조림 좋아해요. 해 주시면 더없는 영광이겠고, 이런 분명한 의사표시, 뭐가 나쁜가요?" (133쪽)날마다 밥을 지으며 생각해 보면, 내가 지은 밥이 나로서는 가장 맛있습니다. 어릴 적에 어머니가 지어 주신 밥은 늘 고마웠습니다. 이웃하고 밖에서 사다가 먹는 밥은 내 품과 겨를을 아껴 주어서 새삼스레 반갑습니다. 이웃집에 나들이를 가서 받는 밥 한 그릇은 집집마다 다르면서 새로운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기에 재미있으면서 사랑스럽습니다.
나중에 아이들이 지은 밥을 받는다면, 이때에는 어떤 마음이 될까요? 아마 온갖 마음이 골고루 어우러지겠지요. 그야말로 밥 한 그릇에 삶이요 사랑이요 꿈이요 노래요 웃음이요 눈물이요 기쁨이요 아련함이요 그리움이요 놀라움이요 해님이요 달빛과 같다고 할 만합니다.
'엄마, 아빠는 3년 전, 고향으로 돌아가 초보 농사꾼이 되었습니다. 어릴 적, 우리 식구들은 읍내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런 완벽한 시골 생활은 처음인 것이었죠. 다시 말해, 아이들에게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최고의 외가가 생긴 겁니다.(167쪽)여름엔 상추와 오이, 고추를 뚝뚝 꺾어다, 수돗가에서 흙만 씻어내고는 된장에 찍어 먹거나 매실 소스를 쳐서 샐러드를 해먹습니다. 금방 땄기 때문에 시원하고 청량한 감칠맛이 한가득합니다.'(172쪽)수수한 밥 한 그릇으로 수수한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만화책 <키친>이 사랑스럽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밥 한 그릇에서도 저마다 다르면서 새로운 꿈이랑 사랑을 넌지시 보여주는 만화책 <키친>이 즐겁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날마다 밥을 짓고 밥을 먹으며 밥을 나누는 만큼, 수수하면서 새로운 노래는 어느 집에서나 따사로이 흐르리라 생각해요.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기우는 저녁입니다. 저녁에도 오붓하고 조촐한 밥상을 잘 지어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키친 4>(조주희 글·그림 / 마녀의책장 펴냄 / 2010.10.29. /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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