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은 가족의 명절이다. 한 해의 추수를 마치고 감사를 전하는 시간으로 시작한 이 명절은, 온 가족이 모여 칠면조 요리와 호박 파이 등을 함께 먹는 날이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매년 11월 4째주 목요일로 정해져 있으나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23개 주에서는 다음 날인 금요일까지 공휴일로 되어 있어서 공식적으로 가장 긴 연휴기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추수감사절 다음 날인 금요일을 일컫는 말, '블랙프라이데이'가 추수감사절의 전통적 의미를 퇴색하게 만든 원흉이 되었다.
'블랙프라이데이'는 1960년대 초 추수감사절 다음 날 쇼핑으로 인한 교통체증을 일컫던 게 어원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1년 내내 적자에 시달리던 소매업종이 '흑자'로 돌아서는 날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명이 더 많이 인용된다. 적자(赤字), 흑자(黑字)라는 용어는, 부기(簿記)에 손해가 나는 항목은 붉은 잉크로, 이익이 나는 항목은 검은 잉크로 적은 데서 유래한 말이다.
"블랙프라이데이엔 문 닫습니다" 놀라운 선택미국에선 추수감사절 다음 날부터 연말 쇼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즉, 블랙프라이데이부터 애프터 크리스마스(크리스마스 다음 날에도 큰 폭의 세일이 있다)까지의 약 한 달간이 소매업의 성수기가 된다는 말이다. 통계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통상 이 기간의 매출이 전체 소매업 매출의 적게는 20%, 많게는 40%를 차지한다고 말한다.
이 기간이 성수기인 만큼, 각종 세일과 미끼 상품으로 소비자를 끌어들이려는 기업들간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진다. 그러다보니 추수감사절 다음 날부터 시작하던 쇼핑 전쟁의 시간이 점차 앞당겨지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금요일 자정에 쇼핑센터 문을 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추수감사절 저녁에 세일 행사를 시작하는 게 이젠 일상이 되어 버렸다.
소비자들은 큰 세일 폭 덕분에 싼 값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고, 기업들은 더 많은 매출을 올려서 양자가 모두 이득을 보는 '윈윈'의 시대가 온 것인가? 그러나 고개를 조금만 돌려보면 세상 일이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게 된다. 모두들 가족과 모여 편안한 연휴를 즐길 때 문을 연 매장에서 밤새 일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메인, 로드아일랜드, 메사추세츠 등 3개 주에서는 대형 쇼핑센터가 블랙프라이데이 영업을 하지 못하도록 정하고 있으나 이것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의 오붓한 저녁 식사를 포기한 채 조금 더 싼 가격에 물건을 산 소비자들은 정말 이득을 본 것일까?
그런데 이 쇼핑 전쟁을 멈추기 위한 작은 움직임들이 시작되고 있다. 지난 27일(현지시간) 미국 내 가장 큰 아웃도어용품 전문 소매업체인 REI는 블랙프라이데이에 143개 매장 모두를 닫고 필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직원에게 유급휴가를 주겠다고 발표했다. CEO인 제리 스트리츠키는 "추수감사절 다음 날을 쇼핑센터 통로에서 허비하지 말고 자연을 즐겨라"라고 말했다. 이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으로 평가된다. 블랙프라이데이는 1년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힐만큼 매출이 큰 날이기 때문이다.
이런 결정이 가능했던 것은 REI가 이윤을 극대화해야 하는 상장된 주식회사가 아니고 일종의 협동조합 형태의 회사이기 때문이다. 다른 대형 소매업체들이 REI의 결정을 따라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가장 큰 사무용품 전문매장인 '스태이플스'도 추수감사절 당일에는 문을 열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해 REI의 결정이 일회성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정부 주도 블랙프라이데이... 누가 열매를 가져갔나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8월말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와 같은 전국적인 대규모 세일 행사를 개최하겠다고 발표했다. 실제 정부가 주도해 급조한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는 10월 1일부터 2주에 걸쳐 열렸다. 지난 주 기획재정부는 이 행사에 3만4000여 개 점포가 참여했고, 주요 업체의 매출이 전년 대비 21%가 증가했다는 자화자찬의 평가 보고서를 내놓았다.
백화점은 예정된 가을정기세일 기간이었고 참여 매장의 80%가 편의점이라는 비판은 차치하더라도, 왜 정부가 주도하여 이런 행사를 기획하고 조직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정부의 주장대로 내수 경기 진작을 위해 기획한 행사라면 매우 근시안적인 행사임에 틀림없다.
물건을 구입하는 소비자 대부분은 동시에 노동자다. 그들의 주머니가 채워져야 비로소 소비자가 된다. 분배없는 성장이 공허한 이유다. 정부 발표대로 이 행사가 그리 성공적이었다면, 그 열매는 누가 맛보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정부가 많은 유통업체 직원들을 강도 높은 노동현장으로 내모는 행사를 기획했던 것은 아닌지도 되돌아봐야 한다. 추석 연휴를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각 매장에서는 이 행사의 준비를 했을 것이고, 행사 기간 내내 몰려드는 고객을 상대하느라 지친 직원들이 대부분이었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