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순이 손길살림순이는 어릴 적부터 늘 살림순이였습니다. 여덟 살인 요즈음에도 살림순이요, 동생이 막 서서 걸으려고 용을 쓰던 무렵에도 다섯 살짜리 살림순이였으며, 동생이 아직 우리한테 오지 않던 두어 살 적에도 멋진 살림순이였습니다.
아이들하고 복닥이며 사느라 '예전에 찍기만 하고 깜빡 잊은 채 지나친' 사진이 퍽 많은데, 어느 날 문득 예전 사진을 살피다가 마당에서 빨래를 주워서 다시 너는 모습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동생이 마당에서 기다가 서다가 하면서 빨랫대에 있던 옷가지를 집어서 바닥으로 던지니, 살림순이는 이 옷가지를 씩씩하게 주워서 다시 빨랫대에 얹었어요. 참으로 대단하지요. 요즈음도 이렇게 멋진 살림순이입니다.
빨래터 치우러 가자가을이나 겨울에는 한낮에 빨래터에 갑니다. 아침은 아직 선선하고 저녁에는 쌀쌀하거든요. 해가 하늘 높이 올라올 무렵 드디어 밀수세미를 어깨에 척 걸치고 대문을 나섭니다. 나락을 곱게 어루만지는 따끈따끈한 가을볕이 우리 머리카락도 따끈따끈하게 쓰다듬는 기운을 느끼면서 고샅을 걷습니다.
오늘은 어떤 신나는 놀이를 하면서 빨래터에서 놀면 재미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빨래터랑 샘터에 낀 물이끼를 걷으러 갑니다. 나도 아이들 뒤를 따라갑니다. 아이들은 늘 앞장서서 저만치 달려가려 합니다. 사진기를 목에 걸고, 한손에는 밀수세미, 다른 손에는 바가지랑 작은 수세미를 들고 빨래터로 갑니다.
단출하게 아침밥밥을 볶고, 멸치를 종지에 담고, 배추를 씻고, 동글배추를 잘게 썰어서 버무립니다. 달걀도 삶아서 잎접시에 놓습니다. 간장도 올려 볼까. "얼마 못 차렸지만 맛있게 먹자"고 말할 수 있으나, 이렇게 말하기보다는 "오늘 아침도 즐겁게 먹자"고 말합니다.
한 가지를 올리든 두 가지를 올리든 기쁘게 먹자고 생각하면서 웃음으로 노래합니다. 밥상맡에서 함께 조잘조잘 떠들고 노래를 할 적에 사진 한 장을 찍을 마음이 솟습니다. 밥을 먹는 자리에서 서로 방긋방긋 웃으며 수저질을 할 적에 사진 한 장 새롭게 찍을 마음이 자랍니다. 단출하지만 우리 몸을 살리는 밥 한 그릇이라 여기며 슬쩍 사진 한 장을 찍어 봅니다.
바람개비를 돌리자바람이 불면 바람개비가 빙글빙글 돌지. 바람이 안 불면 입으로 후후 바람을 일으키지. 입으로 바람을 일으키다가 머리가 빙글빙글 돌면, 마당으로 나가서 신나게 이리저리 가로지르면서 온몸으로 바람을 타면 되지. 우리가 달리는 만큼 바람이 불고, 우리가 달리는 동안 바람이 찾아오고, 우리가 달리는 사이 바람이 살풋 머리카락을 간질이고 이마를 간질이면서 흐르네. 이 바람으로 바람개비가 돌면 파라라 파라라 바람개비 날갯짓을 구경하려고 온 마을 나비가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너희 곁에서 춤을 춘단다. 바람개비를 돌리면서 실컷 땀을 흘리자.
사각사각 연필 노래우리 삶은 어디에서나 노래라고 느낍니다. 그래서 삶은 삶노래이고, 이 삶노래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는 사진노래가 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우리 사랑은 언제나 노래라고 느낍니다. 내 마음속에서 흐르는 사랑노래요, 네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사랑노래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노래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으면 사진노래로 거듭나는구나 싶습니다. 사각사각 연필 구르는 소리만 들리는 마루에서 글 한 줄로 새록새록 자라는 노래를 헤아립니다. 노래가 있어서 삶이 있고, 노래를 부르기에 삶이 즐거우며, 노래를 사랑하면서 삶을 사랑하는 사진을 고마우면서 기쁘게 찍을 수 있습니다.
나락물결 곁에 가을유채꽃유채꽃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좋아하는 봄유채꽃이 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가장 모르는 가을유채꽃이 있고, 마지막으로 겨울유채꽃이 있어요. 가을유채꽃은 이름 그대로 가을에 피어요. 유채나 갓은 흔히 봄에 피어서 여름을 앞두고 모조리 시들어 죽는다고만 알려졌으나, 한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어 찬바람이 살몃살몃 찾아들 적에 조용히 잎을 내밀고 꽃대를 올려서 노란 꽃송이가 나락하고 함께 한들거립니다. 가을유채꽃이 저무는 겨울에도 햇볕이 포근하면 어느새 하나둘 고개를 내밀다가 눈을 맞고 아이 추워 하며 벌벌 떨어요. 가실(가을걷이)을 앞둔 논 귀퉁이에 살그마니 고개를 내민 가을유채꽃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이 가을유채꽃은 며칠 뒤 가실을 할 무렵 모두 잘렸습니다.
가을 깊은 범나비 애벌레이제는 나비가 왜 우리 집 마당에서 춤을 추는지 압니다. 나비는 우리한테 알부터 애벌레를 거쳐서 번데기와 나비로 거듭나는 몸짓을 곱게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도 곁님도 아이들도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후박나무며 초피나무며 모과나무며 감나무며 유자나무며 동백나무며 뽕나무며 석류나무며 무화과나무며, 나무에 따라 다 달리 찾아드는 나비가 있는 줄 알려주고, 어느 애벌레는 모시잎만 먹고 어느 애벌레는 갓잎만 먹는 줄도 알려주려고 찾아와서 춤을 춥니다. 제법 쌀쌀한 가을날에도 나뭇가지에서 톡 떨어져 평상에서 꼬물꼬물 기는 애벌레를 가만히 지켜봅니다. 참으로 멋진 이웃으로 함께 지내는 숨결입니다. 언제나 새롭게 사진을 찍도록 이끌어 주지요.
누나가 읽어 주지큰아이는 글을 스스로 깨우친 뒤 그림책이든 글책이든 소리를 내어 읽기를 즐깁니다. 이러다 보니 작은아이는 "이게 뭐야? 읽어 줘." 하는 말을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묻기보다는 으레 누나한테 묻습니다. 이때에 큰아이는 "그래, 누나가 읽어 줄게." 하고 말하면서 차근차근 읽어 줍니다.
큰아이는 책순이로 놀면서 동생한테 글을 읽히는 책동무가 되고, 작은아이는 누나 곁에서 글이랑 그림이랑 책을 함께 바라보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받아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큰아이는 어릴 적에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받은 사랑을 제 동생한테 고이 물려주는 셈입니다. 작은아이도 이 사랑을 고이 받아서 나중에 누군가한테 물려줄 테지요.
꽃밭 숨바꼭질아이들은 숨바꼭질을 할 적에 머리만 살짝 숙이면 제가 안 보이는 줄 아는 듯합니다. 가만히 보면, 나도 이 아이들만 하던 어린 나이에 이렇게 숨바꼭질을 했구나 싶어요. 내가 밖을 안 보면 남도 내가 안 보이리라 여겼어요. 고개를 살짝 내밀다가 히죽히죽 웃고는 살짝 고개만 숙이는 다섯 살 작은아이는 숨바꼭질을 할 적에 맨 먼저 잡힙니다. 그래서 일부러 못 찾은 척하면서 옆으로 비껴서 걷고, 꽃내음을 큼큼 맡다가 아이를 둘러싸고 빙빙 돌면 "나 여기 있는데?" 하면서 아이가 스스로 나서서 잡혀 줍니다. 사진을 찍으려면 연출을 할 까닭이 없이, 그저 놀면 됩니다.
시골아이 웃음노래아이들은 그냥 걷기만 해도 웃음을 터뜨립니다. 웃을 일이 무엇이 있나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웃을 일이 따로 없어도 얼마든지 웃을 만합니다. 웃음은 그냥 터뜨리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도 웃고, 업혀도 웃고, 배고파도 웃고, 배불러도 웃고, 졸려도 웃고, 자다가도 웃습니다. 들길을 천천히 걷다가도 웃고, 들길을 달리면서도 웃습니다.
아이들은 천천히 자라면서 웃음꽃을 먹습니다. 웃음꽃을 먹으면서 씩씩하게 나아갑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마음껏 앞으로 갑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시골마을에서 우리 집 두 아이는 온 마을이 울리도록 웃으면서 재미나게 걷습니다. 나는 아이들하고 함께 이 길을 걸으며 사진 한 장을 고마이 얻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