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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장] 아쉬웠던 '민중총궐기', 2008년 '촛불' 교훈 잊었나

며칠 전, 여성농민운동을 하며 홀로 농촌에서 두 남자아이를 키우는 한 선배가 가슴 아픈 사연을 SNS에 올렸다. 지난 14일 민중총궐기 개최 후 아이가 학교에 갔는데 친구들이 시위를 '폭동'이라며 '시위 지랄도 병이다'라는 말을 내뱉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욱하는 마음에 아이가 주먹다짐한 모양이다.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그 선배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는데, 선생님의 말씀이 충격적이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공부에 관한 얘기를 하면 '어차피 비정규직 될 건데요, 뭘'이라는 답변이 돌아온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중1 학생들도 훤히 아는 한국 사회의 절망적 현실. 민중총궐기는 그 절망을 뚫고 나올 '송곳' 같은 기획이었다.

민중총궐기에 참가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민중총궐기' 광화문 통하는 길목마다 '차벽' 지난 14일, 서울에서 민주노총 등 53개 노동·농민·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당시 서울 세종로네거리에 이중차벽을 설치했다.
▲ '민중총궐기' 광화문 통하는 길목마다 '차벽' 지난 14일, 서울에서 민주노총 등 53개 노동·농민·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당시 서울 세종로네거리에 이중차벽을 설치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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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촛불 집회 이후 최대 규모의 인파인 약 10만 명이 지난 14일 민중총궐기에 참가했다고 한다.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참석한 천주교 시복식에 20만 인파가 운집했던 것에 비교하자면 이 숫자가 얼마나 많은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날의 대규모 집회가 '각자 싸우지 말고 함께 싸우자'는 취지에서 연초부터 노동·농민·빈민 단체의 교감 속에 기획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이날 집회 참가자의 80~90%는 노동자·농민·빈민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폭정에 피해를 당한 각 대중단체의 회원들이 '한날한시에 모여 총력으로 궐기하는 자리'. 그것이 바로 애초의 민중총궐기 기획이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참가자는 대중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제 돈 20만 원씩 들여서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할 수 있었겠는가?

누군가는 왜 '민중'에 '총궐기' 같은 촌스러운 단어를 쓰느냐고 한다. 요즘 한참 인기 좋은 '국정교과서 반대' 구호만 외치지, 왜 이것저것 갖다 붙여서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하지 못하느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강행되기 이전에 이미 각자의 요구안을 들고 상경 버스를 예약한 사람들이었다. 각개격파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함께' 힘으로 돌파하기 위해, 짧은 소매를 입었을 때 이미 상경을 약속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주최 측이 그들을 중심으로 집회를 준비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노동자, 농민, 빈민. 그들도 평범한 시민이다. 집회 참가자는 이제 '동지들, 앞으로 갑시다'라는 한마디에 단체별로 일사불란하게 진격하는 과거의 시위대가 아니었다.

나는 들었다. 앞에서 사력을 다해 차벽을 넘어서려는 시민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붙어달라"며 살수차 사정권 밖의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집회 사회자의 목소리를. 그것은 원망 섞인 절규에 가까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참가자들은 주저했다. 위력적인 차벽과 살인적인 최루액 살수를 앞세운 공권력 앞에 그들은 주눅 들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 걸음 앞으로 가면 연행과 구속, 나아가 죽음에 한 걸음 다가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주최 측은 우회해서라도 광화문 광장 진출이 가능하다고 예상한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차벽과 대치 상황이 장시간 고착되는 경우에 따른 '플랜B'가 없어 우왕좌왕했다. 그동안 지방 참가자들은 귀경 버스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했고 다수의 참가자는 '후방'에서 관망해야 했다. 전방의 돌파만을 믿고 후방의 너른 공간에서 장시간 진행될 프로그램을 준비하지 못한 것은 주최 측의 큰 패착이었다.

2008년 촛불의 추억 떠올릴 때 아니다

 2008년 6월 10일, 서울 세종로네거리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2008년 6월 10일, 서울 세종로네거리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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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2008년 촛불집회의 교훈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당시 집회를 '축제 같은 시위', '촛불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를 분석하는 논문마저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지적을 하는 분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2008년 촛불집회가 학자들의 분석 대상으로까지 된 것은 주최 측이 참가자들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면서부터였다는 점이다. 당시에 촛불집회의 참가자 수를 사전에 집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만큼 당시 집회는 대중적이었고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민중총궐기의 참가자 수는 이미 지난 13일에 주최 측이 집계해 언론에 공표했다.

학자들이 분석하고 우리가 기억하는 2008년의 촛불은 참가자 집계가 불가능했던 그 시점부터다. 2002년의 미선·효순이 추모 촛불집회에 대한 기억도 같다. 당시 장갑차 사건이 벌어졌던 6월 13일부터 6개월간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진행된 일들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듯이, FTA라는 단어가 생소할 때부터 노동자·농민단체가 모여 한미FTA를 반대하기 위해 집회를 열어왔던 기억도 모두 사라진 듯했다. 그러니 우리는 축제 같은 좋은 시절만 기억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난 몇 년간 시민들은 2008년 촛불집회를 떠올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국정원 대선개입, 세월호 참사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모습은 과거 촛불집회 당시와 다르지 않았다. 시민들은 촛불을 들었고 몇 달 동안 평화 집회를 우선시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촛불을 손에 든 시민들의 목소리는 차벽에 가로막혔고, 정부는 잔혹하게 외면했다. 그렇게 배우고 또 배웠다. 촛불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래서인지 지난 14일, 민중총궐기에 참여한 시민들은 차벽을 넘고 싶어 했다. 아마 전방의 시민들도, 후방의 시민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 같다. 이 시대에 차벽은 그 자체로 물질화된 적대의 대상이다. 시민들에게 차벽은 그 자체로 '노동 개악'이었으며 '농산물 개방'이었고 '역사쿠데타'이자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흔한 경찰 버스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일차원적이라고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억울한 마음 세상에 들어주는 사람 하나 없으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그들의 심정을 안다면 더는 비웃지 못할 것이다.

행위가 아니라 분노를 보자

집회 당시 무대설치에 사용된 철골 구조물을 뜯어 휘두르는 시민도 있었다. 수백 명의 시민들은 밧줄에 매달려 버스를 당겼다. 십자가처럼 팔을 벌려 고압의 살수를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는 시민이 있었다. 그리고 사경을 헤매는 한 농민이 있다.

저 광화문 광장에 발을 딛는 게 뭐가 중요하냐고, 차벽과 싸울 것이 아니라 서울 곳곳을 돌면서 사람들에게 왜 모였는지 잘 알리는 게 낫지 않았겠냐는 말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집회가 좀 폭력적이었던 것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중요한 충고이고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차벽을 넘어서고자 하는 그들의 분노를. 국가가 국민을 외면하는 것이 얼마나 잔혹한지 지난 수년간 느끼며 쌓여왔던 분노를. 국가가 국민에게 이토록 잔혹할 때 국민은 어떻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지, 그것이 바로 이번 민중총궐기를 통해 온몸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 편집ㅣ김준수 기자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민중총궐기 참여단체 관계자입니다.



#민중총궐기#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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