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무성한 잡풀 같은 세상살이, 서비 최우수 선생에게 묻는다 -이상옥의 디카시 <서비정(西扉亭)>지지난 주 금요일 경남 고성 학동마을을 찾았다. 고성문화원에서 주최하는 '정해룡과 함께하는 고성 인문학 이야기'의 여정을 찾아 나선 길이다. 고성의 여러 곳을 찾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고성 학동마을 서비정에 관한 일화이다.
옛 담장과 옛집들이 잘 어우러진 학동마을학동마을은 전주 최씨 집성촌이다. 꿈에 하늘에서 학이 내려와 이곳에 알을 품고 있는 현몽을 해서 학동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학동마을은 옛 마을의 정취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옛 담장이 옛집들과 잘 어우러져 있어, 등록문화재 제258호로 등재된 바도 있다.
마을 돌담길을 따라 끝까지 가면 서비정이 나온다. 서비정은 바로 최우순(崔宇淳, 1832~1911)의 곧은 정신을 기려 세운 정자이다. 최우순 선생은 7세 때 이미 한시를 지어 주변을 놀라게 했을 만큼 당대 존경받는 유학자였다.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이후 경술국치를 당하자, 왜놈의 나라가 있는 동쪽을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뜻으로 아호를 청사(晴沙)에서 서비(西扉 서쪽 사립문)로 바꿔 부르고, 집의 사립문을 서쪽으로 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천지가 바뀌어 종묘사직은 망하고, 머리와 발이 뒤바뀌어 삼천리 강토에 편안히 있을 곳이 없으니 나는 어디로 돌아갈까. 이에 호를 바꿔 서비로 부르니 지금부터는 서쪽에서 기거하며 서쪽에서 침식을 하며 서쪽에서 늙어 서쪽에서 죽을 것이다." 경술국치를 강행한 일제는 민심 무마책으로 전국 명망 있는 유림에게 일왕의 은사금을 주었다. 최우순 선생에게도 은사금을 주려고 했으나, 선생은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완강하게 거부했다. 결국 일제는 헌병을 파견하여 선생을 연행하려고 하자, 스스로 독약을 먹고 절명한 것이다. 그날이 1911년 3월 19일 향년 80세였다.
최우순 선생의 우국충절을 기려 세운 서비정
이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의 유림과 지사들이 그의 우국충절을 기려 세원 곳이 바로 서비정이다. 우리가 찾은 서비정에는 잡풀이 무성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서비정 입구 큰 소나무 한 그루만큼은 최우순 선생의 그 높은 기개와 우국충정의 높은 정신을 표상하듯 울울창창하다.
덧붙이는 글 | 디카시는 필자가 2004년 처음 사용한 신조어로, 이제는 채호석 교수가 쓴 <청소년을 위한 한국현대문학사>(두리미디어, 2009)에 새로운 시문학의 한 장르로 소개되어 있을 만큼 대중화되었다. 디카시는 스마트폰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날시)을 순간 포착(영상+문자)하여, SNS 등으로 실시간 순간 소통을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