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자식이 군 대체복무 중에 병에 걸려 집안이 쑥대밭이 됐습니다."
설종기씨(60, 대전시 가수원동)가 힘없이 말했다.
그의 아들인 설태환(23)씨는 암 투병 중이다. 아들 설씨는 2010년 12월 천안에 있는 방위산업체인 대한정밀(주)에 산업기능요원으로 입사했다. 당시 18살이었다. 산업기능요원은 대체복무제도 중 하나로 현역 복무 대신에, 산업체에서 대체 복무하는 제도다.
설씨는 대전에서 작은 세탁소를 운영하는 아버지의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인력개발원에서 컴퓨터 응용밀링기능사, 컴퓨터응용 선반기능사 등 기계 분야 자격증을 취득했다. 대학 대신 산업기능요원으로 취업을 선택했다.
설씨는 회사에서 노즐 금형에 홀 가공을 하는 작업을 맡았다. 계약 근무시간은 주간 9시간. 야간 11시간이었다.
하지만 거의 매일 연장근무를 해야 했다. 주말 근무도 많았다. 2013년의 경우 1월부터 8개월 동안 휴일은 월평균 3일이었다. 작업 공간에서 기름 냄새도 심하게 났다. 그렇게 2년 9개월을 일했다.
암 판정 21살 청년 "부당 업무지시로 스트레스... 기름 냄새도 심했다" 그러던 2013년 9월 어느 날. 작업 도중 목에 멍울이 만져졌다. 병원 진단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뇌종양과 척수종양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다행히 악성은 아니라는 말에 안도했다.
설씨는 암 발병 이유로 회사의 작업환경을 의심했다. 회사의 지시로 휴일도 없이 일해야 했고, 항상 회사에서 기름 냄새가 심하게 났기 때문이다. 설씨는 "부당한 업무지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만, 병역 복무 기간이라 불만을 얘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설씨는 "입사 당시 신체검사에서도 별 이상이 없었다"고 강조했다.
설씨는 뇌종양 수술을 받았지만, 얼굴 한쪽이 마비되는 증세가 겹쳤다. 밥을 먹을 때마다 음식물이 흘러내렸다. 한쪽 귀도 청력을 잃었다. 목 부위와 얼굴 부위에도 종양이 발견됐다. 2년이 넘게 투병했지만, 앞으로도 몇 번의 수술을 받아야 할지 가늠할 수 없는 상태다.
설씨가 투병 중이던 지난해 1월. 사측은 일방적으로 설씨를 해고했다. 지병 치료로 근무복귀가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설씨는 충남지방노동위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했다. 같은 해 2월 26일, 설씨의 아버지와 사측은 지방노동위에 화해조서를 제출했다. 이 자리에는 지방노동위 조사관도 배석했다.
이상한 화해조서 "550만 원에 모든 진정 포기"?
하지만 화해조서 내용이 이상했다.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한 것인데 '2014년 1월 20일 자로 근로관계를 종료한 것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설씨의 위로금은 550만 원으로 돼 있다. 또 화해조서 마지막 항에는 "고용노동부에 제출한 모든 진정 건을 취하하며, 일체의 민, 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 위자료 550만 원으로 부당해고 구제도, 모든 형사 진정도 포기하겠다는 내용이다. '부당 해고'로 인정될 경우 받을 수 있는 3개월 간 임금에도 미치지 않는 액수다.
이에 대해 설씨의 아버지는 "당시 충남노동위원회 이아무개 담당 조사관이 화해 조서 문안을 직접 작성해 와 '사측과 산재가 인정되도록 적극 협조하기로 얘기가 됐다'며 서명을 종용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 조사관 말을 믿고 화해 조서에 서명했지만, 사측은 산재 신청을 거부하고 일체의 협조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담당 조사관에게 따지자 1000만 원을 대신 물어 주겠다고 하기까지 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중앙노동위 감사실에 이 조사관의 비위 여부를 조사해 처벌해 달라고 신고했지만, 문제가 없다고 회신해 왔고 담당 조사관은 곧 퇴사했다"고 밝혔다.
실제 해당 담당 조사관은 지난해 상반기 때 이른 명퇴를 신청해 퇴사했다. 중앙노동위 감사실은 지난해 7월 설씨에게 보낸 민원 회신을 통해 "노동위는 화해를 권고, 주선할 수 있고 조사관은 화해를 도모하는 조력자 역할을 한다"며 "당사자 간 직접 서명한 화해조서는 번복할 수 없다"고 동문서답했다.
근로복지공단 "종양은 스트레스, 업무상 과로와 무관" 산재 불인정 떠넘기기, 국방부→ 대전지방병무청→ 천안고용노동청
근로복지공단은 요양급여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근로복지공단은 지난해 3월 설씨에 대한 업무상 질병(요양급여) 신청 건에 대해 "뇌종양과 척수 종양은 업무상 과로 또는 스트레스와 상관관계가 없고 병을 유발할만한 유해인자에 노출되지 않았다"며 "업무 관련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정했다. 대다수 전문가들의 우리 몸의 세포가 잘못된 식습관, 스트레스, 환경오염 등으로 악화되고 있다는 견해를 무시한 판단이다.
근로복지공단은 그러면서도 "해당 작업장은 작업환경 측정 대상에 해당하지 않아 작업환경 측정은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설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재심의 청구를 준비 중이다.
그러는 사이 설씨에 대한 치료비만 수천만 원에 이르고 있다. 설씨의 아버지는 "지금까지 최소 6000∼7000만 원을 치료비로 지출했다"며 "이후로도 얼마가 들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설씨는 치료비마저 조달하기 어렵게 되자 국방부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국방부는 대전지방병무청에 민원을 떠넘겼다. 대전지방병무청은 지난해 7월, 다시 천안고용노동지청에 설 씨를 포함 당시 근무 중이던 4명의 모든 산업기능요원에 대해 근로기준법 위반여부를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지방노동청 "2년 6개월 동안에만 409시간 초과 근로"천안고용노동지청 조사결과 사측인 대한정밀(주)은 근로자에게 1주간에 12시간(당사자 간 합의 경우)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는 근로기준법상 연장근로 제한 규정(53조 1항)을 위반한 것으로 나타났다.
설씨의 경우 조사 기간인 2011년 2월부터 2013년 8월(2년 6개월)까지만 모두 409시간을 초과 근로했다. 또 다른 산업기능요원들인 성아무개씨는 7개월 동안 201시간, 권아무개씨는 3개월 동안 54시간, 박아무개씨는 2개월 12시간을 초과 근로한 것으로 조사됐다. 4명에 대한 초과근로시간만 모두 676시간에 이른다. 군 대체 복무 중이라는 지위를 악용, 산업기능요원들을 혹사한 것이다.
고용노동청천안지청은 이 같은 조사결과를 근거로 지난해 12월, 대전지검 천안지청에 사건을 송치했다. 관련법(병역법시행령)에는 근로기준법을 위반해 벌금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경우 산업기능요원지정업체 선정을 취소하도록 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에는 연장근로 제한 규정을 위반한 사업자에게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검찰 "잘못 뉘우치고 있다"며 벌금형 없이 '기소유예'
하지만 검찰은 보름 만에 사측 대표에 대해 벌금형도 없이 기소유예(범죄가 특히 경미하여 기소하지 않는 처분)를 결정했다. 피해자에 대한 별도 조사도 없었다. 검찰은 기소유예 처분 이유에 대해 "범죄 사실은 인정되지만, 동종 전과가 없고, 피의자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특히 "당사자들 간에 화해가 성립된 사실도 참작했다"고 덧붙였다.
반면 설씨의 아버지는 "검찰에 서면을 통해 회사 측과 작성한 화해조서는 속아서 작성한 것으로 화해가 성립되지 않았다고 사정을 알렸다"고 말했다. 그가 당시 검찰에 보낸 탄원서에는 이 같은 사정이 잘 담겨 있다. 그는 이어 "이후 검찰에서도 '조정할 의사가 있느냐'는 전화 문의도 있었다"며 "그런데 갑자기 피해자 의견도 듣지 않고 터무니없이 기소유예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소유예 결정을 한 사실도,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 한참 뒤에 서류를 떼어보고서야 알았다"고 말했다.
검찰이 당사자 간 화해가 성립되지 않은 점을 알면서도, '화해 성립'을 이유로 업체에게 사실상 죗값을 묻지 않은 것이다.
그는 검찰은 물론 국방부와 고용노동청 천안지청의 태도도 이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국방부는 민원을 지방병무청에 넘긴 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고용노동청 천안지청은 검찰의 기소유예 결정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병무청에 기소유예 처분 결과를 통보한 것도 2개월이 후인 지난해 2월 말이다.
피해 가족 "남은 건 빚더미... 어디에 하소연해야 하나"해당 업체에는 아직 산업기능요원 6명이 근무 중이다.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내년부터 2년간 추가 산업기능요원 배정만 제한될 뿐이다.
설 씨의 아버지는 "군 대체 복무 중에 병을 얻었지만 남은 것은 암세포와 끝 모를 투병 과정, 누적된 수천만 원에 이르는 빚뿐"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대통령께 '붕괴하고 있는 저의 가정을 살려 달라'고 탄원까지 해봤지만 다른 기관에 민원을 넘기는 게 전부였다"며 "회사, 국방부, 고용노동청, 근로복지공단, 검찰 어디에서도 할 일이 없다고 하니 어디에 하소연해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측 관계자는 "위자료 550만 원과 직원들이 성금 100만 원 등 모두 650만 원을 설 씨에게 전달했다"며 "우리 회사로 인해 재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더는 해 줄 게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