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시크 왕족의 후손인 소피아 둔립 싱그(1876-1948) 공주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대녀(god-daughter)이자 여성 참정권 운동의 선구자였다. 소피아 공주는 영국 여성 참정권 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1858-1928)와 함께 여성 참정권 운동에 앞장서며 수많은 시위에 참여했고 영국의회 앞에서 데모를 이끌었다. 그녀는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기까지는 세금을 내지 않겠다며 대대적인 납세거부 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
심지어 1913년엔 당시 영국수상 허버트 에스퀴스(1852-1928)의 차량을 온몸으로 막고 격렬한 시위를 벌인다. 아울러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에 폭력을 가한 남성 경찰의 신분을 찾아내어 엄중한 처벌을 받도록 만든다.
그러나 영국 경찰과 당시 윈스턴 처칠 내무부장관은 인도 왕족의 후손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대녀였던 그녀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 결국 소피아 공주 등의 공헌으로 1928년 영국 정부는 여성 참정권 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100년 전 시위를 통해 잘못된 정부의 정책을 바로잡았던 소피아 공주. 그녀의 삶이 자유민주사회에서 헌법으로 보장된 시민들의 시위를 엄단하고 불허하는 21세기 박근혜 정부에게 주는 역사적 의미와 교훈은 무엇일까?
궁전의 공주에서 거리의 운동가로
소피아 공주는 인도 시크제국의 마지막 왕인 마하라자 듀립 싱그(1838-1893)의 셋째 딸로 영국에서 태어났다.
듀립 싱그 왕은 11살의 나이로 당시 인도를 식민지화 하고 있던 대영제국 때문에 어린 나이에 왕위에서 퇴위하게 된 인도 시크제국의 비극적인 마지막 왕이었다. 그 후 15살이 되던 해인 1854년, 싱그 왕은 영국으로 오게 되고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의 후원으로 삶을 연명하면서 나중에 독일 은행가의 딸인 밤바 뮬러(1848-1887)와 결혼한다.
1887년 모친의 사망에 이은 1893년 부친 싱그 왕의 사망 후 당시 17세였던 소피아 공주는 동생들과 부친의 유산을 물려받고 대모(godmother)인 빅토리아 여왕이 마련해준 햄프턴 코트 궁전에서 동생들과 기거하게 된다.
1907년 소피아 공주는 아버지의 모국인 인도를 태어나서 처음 방문한다. 평생을 영국의 궁전에서 살았던 그녀는 인도 방문 중 인도 독립 운동가들과 만나고 또 영국 식민지하에서 빈곤으로 고통 받는 많은 인도인들을 만나면서 큰 충격을 받는다.
이때부터 소피아 공주는 자신이 태어난 나라인 대영제국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고 인권 신장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는 삶의 목표를 세우게 된다.
영국으로 돌아온 소피아 공주는 1909년 런던에서 마하트마 간디(1869-1948)를 만나며 더욱 감동을 받는다.
그때부터 소피아 공주는 영국의 사회문제, 특히 여성의 참정권이 없는 것에 대해 영국 정부에 문제를 제기하며,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에멀린 팽크허스트와 함께 여성 참정권 운동에 투신한다. 상당한 재력이 있었던 소피아 공주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 자금을 지원하는 동시에 여성의 참정권을 부인하는 영국 정부에 대해서는 납세 거부 운동을 벌인다.
처음에는 영국 여성의 참정권 문제에만 관심을 갖던 소피아 공주와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점차 인도 등 영국 식민지 국가들의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주목하게 된다. 공주와 왕족이라는 명칭 때문에 그녀의 여성 참정권 운동은 많은 언론의 관심을 받는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이 마련해준 숙소인 햄프턴 코트 궁전 앞에 가판대를 설치하고,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만든 신문을 직접 판매하면서 그녀는 크게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1910년 11월 18일, 영국 역사에 '흑의 금요일(Black Friday)'라고 기록되던 그날. 소피아 공주와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런던의 의회 앞에서 다른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을 이끌며 대대적인 시위에 참여한다.
이날 시위를 진압하던 남성 경찰들은 여성 시위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고 심지어 성추행마저 저지른다. 이런 장면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소피아 공주는 가해자 경찰을 끝까지 찾아내어 결국 법정에서 처벌을 받도록 만들기도 한다.
1913년 그녀는 영국수상 허버트 에스퀴스가 탄 차량을 온몸으로 막으면서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줘라!"라는 포스터를 들고 시위를 벌인다.
이런 격렬하고 공격적인 시위에도 불구하고 영국 경찰과 당시 내무부장관 윈스턴 처칠은 인도의 왕족 출신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대녀였던 소피아 공주를 위해하거나 체포할 수조차 없었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시위에 앞장선 공주
1914년부터 1918년까지 1차세계대전 기간 중에 소피아 공주는 전쟁 중 부상당한 병사들을 위해 간호사로 자원봉사를 지원한다. 시크교도인 한 인도 부상병은 인도의 마지막 왕의 딸인 소피아 공주가 간호사 복장을 입고 병상에 누운 자신을 직접 간호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1924년 그녀는 인도를 두 번째로 방문했다. 인도의 독립 운동가들을 만나며 그녀는 대영제국에 대한 인도의 독립뿐만 아니라 인도 내의 여성 참정권 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 결과 소피아 공주는 인도 여성 참정권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
1928년 6월 14일. 여성 참정권 협회를 설립한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사망한 후 소피아 공주는 이 협회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여성 참정권 협회 대표로 선출되고 한 달 이 안 된 그해 7월 2일, 영국 정부가 국민 평등 선거법을 제정하면서 영국에서는 남녀 모두 21세 이상이면 보통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소피아 공주는 1907년 아버지의 나라 인도를 처음 방문하며 "여성의 인권 향상을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추구하기로 마음먹"은 지 20여 년 만에 마침내 그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1948년 사망하기까지 소피아 공주는 자기가 태어난 나라인 영국과 아버지의 나라인 인도사회의 불평등을 제거하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거리 시위에 늘 앞장섰다.
정부가 잘못된 정책을 펼 때 시위와 데모를 통해서 정부가 공정한 정책을 펴도록 만드는 것은 민주사회를 사는 시민의 의무이자 헌법으로 보장된 권리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이 12월 5일 제2차 민중총궐기대회를 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김현웅 법무부장관이 폭력시위를 엄단하겠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더욱이 그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복면시위'에 대해서도 "복면시위 금지법 통과 이전이더라도 양형 기준을 대폭 높이겠다"며 국민을 협박하고 있다.
'국민의 지팡이'가 되어야 할 경찰도 제2차 민중총궐기대회의 개최를 불허한다고 선포했다. 언제부터 자유민주국가인 우리나라에서 국민의 당연한 권리인 시위를 정부 맘대로 허가제로 바꿨는가? 헌법이 보장한 시위와 시위복장에 관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법무부장관과 경찰청장이 마음대로 침해하고 있다. 이에 대해 법원은 2차 민중총궐기가 폭력집회라고 단정할 수 없다며 범국민대책위 측의 손을 들어줬다.
정부가 잘못된 정책을 펼 때 납세를 거부하고 시위를 통해서 결국 공정한 정책을 펴도록 만든 100년 전 소피아 공주의 삶을 생각한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공주'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100년 전 영국에서도 허가한 시위를, 21세기에도 못하도록 국민을 협박하는 박근혜 대통령은 자유민주사회의 지도자로서 전혀 부끄러움을 못 느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