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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60년대 일방적인 TV가 주목을 끌면서 대중의 우상화가 되는 파시즘현상이 보이자 이에 저항하기 위해 쌍방적인 비디오아트를 창안한다. 예컨대 모니터에 마이크를 대고 말을 하거나 노크를 하면 이미지가 그려지는 '참여TV'가 그것이다. 비디오아트는 이런 발상에서 이 세상에 나왔고 이로써 인간을 TV의 주인으로 되돌려줬다 -기자 말

여섯, 실현 불가능한 비디오아트 창시... 미개척지 예술을 향한 도전정신

백남준 I '두 대의 TV에 입력된 소리의 파도_수평/수직(Sound Wave Input on Two TV set Horizontal/Vertical)' 1963. TV화면에 전자파로 그린다는 개념의 첫 전시를 재현하다. '추방(Expel)'이라는 단어가 뒤로 보인다
 백남준 I '두 대의 TV에 입력된 소리의 파도_수평/수직(Sound Wave Input on Two TV set Horizontal/Vertical)' 1963. TV화면에 전자파로 그린다는 개념의 첫 전시를 재현하다. '추방(Expel)'이라는 단어가 뒤로 보인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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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콜라주가 회화를 대신하듯 음극관이 캔버스를 대신한다"라고 했는데 이는 전자 붓으로 TV모니터에 그리겠다는 착안이다. 과연 이게 가능할까? 그러나 백남준은 '현대의 종이'라는 믿었던 비디오로 이미지혁명을 시도했고 마침내 성공한다. 그러면서 "전위예술은 쓰레기폐물이 될 수도 있지만 인정받으면 유무형 엄청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비디오아트가 어떻게 시작됐을까. 백남준의 직접설명을 들어보자.

"비디오아트의 기원은 첫째, 가로와 세로로 이뤄지는 '직조'에서 왔고, 둘째, 저 바깥 빛이 만든 색채의 이미지가 황홀한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왔고, 셋째, 태양의 반사광인 '달빛'에서 왔다. '눈부신 날, 라인 강의 물결을 세라'에서 그 달빛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기원은 가로와 세로로 이뤄지는 '직조'라는 개념인데 이를 더 쉽게 설명하면 이건 바로 백남준 비디오혁명을 상징하는 모니터에 수직선과 수평선을 그을 수 있다는 의미다. 전자 붓 개념으로 보면 되는데 요즘 많이 쓰이는 스마트 폰 전자펜의 기원이다.

두 번째 기원은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나온다. 이에 대해 보충설명을 하면 백남준은 처음 유럽에 가서 그들의 문화수준에 크게 실망한다. 그런데 하나 감동을 받은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중세고딕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였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눈부시고 황홀한 빛에 반했고 그걸 오색 찬연한 전자 빛으로 변형해 비디오아트를 탄생시켰다.

세 번째 기원은 달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달은 가장 오래된 TV'도 그렇고 백남준의 위성아트도 달을 의미한다. 이는 북방계 몽골의 샤머니즘과도 관련이 있다. 백남준이 '월인천강지곡'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달은 앤디 워홀이 애용한 '복사이미지'와는 다르게 쉼 없이 변화는 '생성이미지'를 연출하기에 백남준이 더 좋아했는지 모른다.

백남준은 첫 전시 <음악의 전시: 전자텔레비전>에 대해서도 '수직적 구도(plan)'와 '수평적 나눔(partition)'이 상호매개(intermediation)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하는데 이 역시 모니터에 수직선·수평선을 긋는 것과 관련이 있고 이거야말로 비디오아트의 진원지다.

그리고 1963년 첫 전시에서 백남준은 장치된 TV13대를 선보였지만 실제 비디오를 활용한 건 1965년부터다. 그해 백남준은 '소니'가 미국에 첫 수출한 비디오카메라를 예약 구입했고 10월 4일 '카페오고고'에서 맨해튼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침 교황 '바오로6세'가 미국방문 중이라 이를 비디오에 담았다. 이렇게 해서 비디오가 미술사에 처음 등장한다.

이렇게 볼 때 TV와 비디오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다. TV는 이미지를 일방적으로 받는 '수상기'인 반면 비디오는 주도적으로 이미지를 편집할 수 있는 '제상기(製像機)'이기에 이를 결합하니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TV는 평생 우리를 공격해 왔다, 이제 우리가 반격할 차례다"라는 한 백남준의 말이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서 열리는 '백남준 그루브_흥(興)'전 벽에 붙은 대형사진으로 비디오아트에 대해 "나의 실험적 TV는 완전범죄를 가능케 한 최초의 예술작품이다"라고 한 그의 해설이 붙어있다
 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서 열리는 '백남준 그루브_흥(興)'전 벽에 붙은 대형사진으로 비디오아트에 대해 "나의 실험적 TV는 완전범죄를 가능케 한 최초의 예술작품이다"라고 한 그의 해설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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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는 이렇게 TV가 독재자처럼 대중을 우민화하는 문제를 극복하게 그걸 반격하는 기능을 갖춤으로써 사회변화의 도구도 된다. 백남준은 이 점에 대해 "나의 실험적 TV는 완전범죄를 가능케 한 최초의 예술작품이다"라고 멋진 재해석을 내놓았다.

미학자 진중권은 "백남준보다 '앤디 워홀'이 먼저 비디오를 썼고, 백남준에 앞서 '볼프 포스텔'이 TV모니터를 설치했고 퍼포먼스나 위성중계 역시 백남준이 처음 한 것은 아니나 그 누구도 백남준처럼 TV를 주제로 삼아 철저하고 일관되게 미디어를 사용한 작가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는 역시 백남준이다"라고 평가했다.

휘트니미술관 편 <현대미술사>에서 보면 백남준의 전자아트를 "60년대 미국에서 '하이테크욕망'과 '반전사상'과 '권위에 대한 반항'과 같은 반체제 속에서 나왔다"고 평했는데 이는 사회문화적 측면이다. 진중권은 미술사적으로 '20세기 전반은 피카소, 20세기 후반은 워홀, 20세기 전체는 뒤샹, 21세기는 백남준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결론 내렸다.

여기서 기억할 한 가지는. 독일 평론가가 한 말 "그는 테크놀로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걸 우습게 만듦으로써 인간화했다"에서 알 수 있듯이 백남준은 테크놀로지의 인간화 시도를 작품에서 항상 빼놓지 않는다. 1993년 휘트니 전 때 30년 된 그의 로봇 K_456를 해체시키면서 "내 아들은 장가도 못 갔는데..."라는 여운을 남기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일곱, 돈보다 축제가 먼저인 르네상스인간... 무욕·무상행으로 향연을 낳다

백남준은 1977년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라고 말을 했는데 역시 돈보다 축제를 우선시하는 그의 철학이 담긴 말이다. 우리가 진정 자유를 얻으려면 무욕의 경지로 가서 소유보다는 향유를 삶의 최고 가치로 둬야한다고 뜻이리라. 그래야 진정 축제를 즐길 수 있다는 주장인데 이게 바로 그의 예술론과 직결된다. 아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서 열리는 '백남준 그루브_흥(興)'전 벽에 붙은 대형사진으로 하단에 테크놀로지의 인간화와 축제의식의 소중함을 담은 백남준 문구가 보인다
 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서 열리는 '백남준 그루브_흥(興)'전 벽에 붙은 대형사진으로 하단에 테크놀로지의 인간화와 축제의식의 소중함을 담은 백남준 문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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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페스티벌이지요, 쉽게 말하면 잔치예요. 왜 우리의 굿 있잖아요. 나는 굿쟁이예요. 여러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도록 부추기는 광대나 다름없어요. 나의 예술 철학은 관념을 무너뜨리자는 거지요. 수직이 아닌 귀납이에요. 획일성을 막기 위해 자유스런 작업을 하죠. 민중이 춤을 추도록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이지요."

백남준은 자본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걸 무력화하는 방안으로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는 예술을 추구했다. 그때 정말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말이다. 일종의 '무상행(無償行, 무보상행위)'인데 '칸트'가 말하는 '무목적적 합목적성'과 같은 개념이다.

그에게 왜 평생 그렇게 많은 퍼포먼스 했냐고 물어보면 '돈을 벌지 않는 예술'을 하기 위해선데 거기엔 진리를 꿰뚫어보는 눈이 있다고 말한다. 백남준은 예술기금을 많이 받아도 원래부터 돈이 목적이 아니기에 더 좋은 작품을 위해 받은 기금보다 2배 이상 쓰기에 평생 가난했다. 백남준이 왜 선문답인 '임제록' 등을 그리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75%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5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3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09%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0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100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 - 임제록 중에서

그는 또 "과학자에게는 예술이 마법이고, 예술가에게는 과학이 미스터리다"이라는 말을 하면서 그는 축제주의자인 동시에 새로운 문명을 맞이하기 위해 예술과 과학의 융합을 추구하는 르네상스인간임을 알 수 있다. 친구들도 다 그런 성향을 보였다.

여덟, 파괴 없이 진정한 창조는 없다... 시대우상을 파괴하는 반항정신

1962년 비스바덴에서 플럭서스 첫 공연에서 피아노를 파괴하는 멤버들. 네오다다의 성격을 띤 이 반예술운동은 예술가의 주체성마저 부정하고 문화민주화와 지방화를 지향한다. 백남준 국제학술심포지엄(2013.04.26)에서 소개된 영상자료를 찍은 것임 ⓒ 백남준아트센터
 1962년 비스바덴에서 플럭서스 첫 공연에서 피아노를 파괴하는 멤버들. 네오다다의 성격을 띤 이 반예술운동은 예술가의 주체성마저 부정하고 문화민주화와 지방화를 지향한다. 백남준 국제학술심포지엄(2013.04.26)에서 소개된 영상자료를 찍은 것임 ⓒ 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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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백남준 첫 전시 포스터에 16가지 테마 중 하나로 <아이디어에 대한 물신주의>가 나온다. 백남준은 1965년에 "영원성의 숭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병"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그의 큰 고민 중 하나가 물신주의 숭배의 극복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피카소도 "파괴하려는 충동은 곧 창조하려는 충동이다, 하나의 그림이란 파괴의 총체이다"라고 했지만 이전에 없었던 뭔가를 일으키는(Something happens) 예술을 하려면 시대의 통념과 편견과 고정관념을 파괴해야 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백남준은 피카소식 파괴충동은 물론이고 그 시대를 지배하는 통치이념, 권위주의, 전체주의 등이 얼마나 우리를 숨 막히게 하고 인간성을 파괴하는지 너무 잘 알기에 이런 것과 싸우는 위해 그 허구논리에 구멍을 내고 이를 교란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백남준의 예술적 관점을 조명한 'KBS 다큐_백남준 코드' 장면을 캡처하다. 나치가 저지른 대학살장면으로 2차 대전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백남준의 예술적 관점을 조명한 'KBS 다큐_백남준 코드' 장면을 캡처하다. 나치가 저지른 대학살장면으로 2차 대전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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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자인 백남준은 20세기가 참혹한 전쟁의 시대였던 건 결국 '인간의 몸이 증발'된 데서 왔다고 진단하고 그런 관점에서 예술을 접근했다. '액션 뮤직'이 그렇고 '퍼포먼스'가 그렇다. 이걸 화두로 삼고 그는 평생 이런 저런 관념주의와 싸워나갔다.

백남준 첫 전시 포스터에는 '추방(EXPEL)'이 나오는데 이건 플럭서스 선언문에도 언급된 병폐한 부르주아 문화와 근현대주의를 추방하라는 메시지와 같은 문맥이다. 이를 가시적으로 보여준 게 서양뮤즈를 욕조에 훼손된 채 처박아두었는데 이런 전시가 가능했던 것은 첫 전시장이 독일건축가의 개인저택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백남준이 어려서부터 가진 기질에서 온 것인지 모른다. 그가 기존음계를 전복시키는 작곡가인 '쇤베르크'나 기존사회를 변혁하려는 철학자 '맑스'를 좋아한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푸코'처럼 계몽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주의를 거부하고 그런 관념에 오염되지 않는 원시적 생명력이 넘치는 선사시대의 지식계보학을 열망했다.

백남준은 피아노를 칠 때보다 그걸 부술 때 나는 소리에 더 매료되었다. 거기서 카타르시스가 온 것이다. 소위 북방계 몽골 등의 타악기 전통을 이은 것인가 부수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린 모양이다. 우리 DNA에는 '난타'와 같은 무의식적인 기질이 있나보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백남준이 목을 친 부처의 작품을 선보이다. '살불살조'의 정신을 작품화 한 것으로 백남준의 우상파괴정신을 엿볼 수 있다. 백남준아트센터 전시 때 찍은 사진이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백남준이 목을 친 부처의 작품을 선보이다. '살불살조'의 정신을 작품화 한 것으로 백남준의 우상파괴정신을 엿볼 수 있다. 백남준아트센터 전시 때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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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백남준은 부수고 자르고 파괴하는 과격성을 보였냐고 이영철 초대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에게 물었더니 이건 '새로운 야만인'의 등장을 뜻한단다. 모든 권위에 도전하는 위대한 전사로 일종의 '문화테러리스트'란다. 피아노를 부수고 바이올린을 내리친 건 그것이 음악적 권위뿐만 아니라 엘리트 부르주아문화를 상징하기 때문이란다.

이런 행위의 배경에는 임제록에 나오는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정신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여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투철히 벗어나서 자유 자재하게 된다"라는 철학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백남준의 이런 '살불살조'의 정신은 우리에게 너무 신화화되고 우상화된 서구적 체계를 비판하는 데도 동원된다. 원숙한 나이인 60살에 백남준은 "우리가 세계(서구)의 역사를 이길 수 없다면 그 규칙을 바꾸라고 가르쳐준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던졌다. 이는 서구적 사고를 깨지 않으면 우리에게 어떤 창조도 진화도 올 수 없다는 경고성 메시지다.

아홉, 예술적 교란으로 서구근대 해체... '랜덤액세스·사기론·사이버네틱스' 등  

백남준의 프라이부르크 대학 지도교수 '포르트너'는 그를 두고 "그는 보기 드문 비상한 현상"이라고 했다는데, 1961년 쾰른 돔 극장에서 찍힌 백남준 사진을 보면 그런 분위기가 확연히 느껴진다. 위 사진은 백남준 이론가 헤르조겐라트 박사가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 초청강연 때 찍은 것이다. ⓒ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의 프라이부르크 대학 지도교수 '포르트너'는 그를 두고 "그는 보기 드문 비상한 현상"이라고 했다는데, 1961년 쾰른 돔 극장에서 찍힌 백남준 사진을 보면 그런 분위기가 확연히 느껴진다. 위 사진은 백남준 이론가 헤르조겐라트 박사가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 초청강연 때 찍은 것이다. ⓒ 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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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자신의 예술 골자를 아래처럼 요약했다. 그는 분명 감각적 쾌락주의자다.

"카타르시스, 순간의 환희, 모든 감각의 만족, 전인격 총체적 개입, 극도의 전자적 충동, 두뇌의 전기자기 진동, 직접접촉예술, 전자와 생리학의 시뮬레이션,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전자초고속도로), 정신의 사이버네틱스, 인공신진대사, 다매체 다방향 상응 등등."

시대를 앞선 누구도 규정할 수 없는 멋진 진술이다. 백남준의 이런 면모는 이미 독일유학시절부터 드러난다. 프라이부르크음대에서 백남준 유학할 때 그의 지도교수는 그를 보고 "보기 드문 비상한 현상"이라고 했고, 이어령 선생도 "백남준의 예술은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어떤 틀도 룰도 없는 그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을 취했다.

백남준은 어려서부터 특이하게 피아노 2대를 놓고 연주하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 두 대를 사서 각 피아노 음이 서로 어긋나게 조율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또한 예술의 통념을 교란시키는 한 예다.

또 그는 근대서구의 예술체계를 해체하고 교란시키는 방식으로 '랜덤액세스'를 즐겨 사용한다. 이것은 마치 '68혁명'이나 '촛불시위'처럼 주동자 없는 시위와 비슷하다. 우발적이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게 특징이다. 백남준의 첫 전시에도 '랜덤액세스'라는 작품이 선보였는데 관객의 참여와 함께 무질서한 우연성에서 창조가 나온다고 본 것이다.

이런 비위계적이고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랜덤액세스 기법을 낳게 한 공로는 '나치즘'이다. 나치즘을 포함한 파시즘은 그야말로 질서정연하고 일사불란했기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인간을 권력욕을 채우는 도구로 보는 통치이념이 결국 대참사를 낳았다.

백남준의 랜덤액세스 기법은 당시 큰 파문을 일으킨 '사기론'과 통하는 것이다. 백남준은 자기만 아니라 뒤샹이 이미 사기를 예술화했다고 지적한다. 그럼 여기서 1984년 6월 26일 백남준과 <조선일보> 정중헌 기자와 한 인터뷰 중 '사기'에 관한 내용을 좀 보자.

"전위예술은 한마디로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속이고 속는 사기다. 사기 중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게 예술이다."

이에 대해 이용우 미술비평가는 "그가 말하는 '예술사기론'은 사실상 그의 예술적 실천을 위해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공격하며, 기상천외한 언어를 통한 시선 끌기와 도발적 제스처다"라고 했다. 하긴 예술이란 착각과 환상을 심어주는 유희라고 보면 문제될 것도 없다.

백남준은 전체주의나 독재를 무지 싫어했는데 예술가답게 이 점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이를 테면 "애국하면 망한다" 같은 '반애국주의'로 빗대어 말했다. 왜냐하면 극단적 애국주의를 내세운 게 나치즘이기 때문이다. 사실 애국주의는 "우리가 남이가"와 같은 패거리문화와 다름 아니다. 이런 방식의 표현이 바로 백남준의 사기 중 하나인 것이다.

'사이버화된 세대(Cybernated Generation)'라는 제목이 붙은 1965년 4월 2일 타임지표지. 그 부제가 '컴퓨터사회(The Computer in Society)'다. 당시 '사이버네틱스'가 대유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 타임지(The TIME)
 '사이버화된 세대(Cybernated Generation)'라는 제목이 붙은 1965년 4월 2일 타임지표지. 그 부제가 '컴퓨터사회(The Computer in Society)'다. 당시 '사이버네틱스'가 대유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 타임지(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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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백남준은 또 '랜덤액세스'나 '반애국주의'와 유사한 '사이버네틱스'도 좋아했다. 이 이론은 60년대 유행한 '제3의 과학체계'로 놀랍게도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는 신물리학이다. 아래를 보면 백남준이 왜 이런 역발상적인 이론을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뉴턴의 물리학은 강함이 약함을 누르는 비융합적 이중구조와 권력구조를 갖는다. 하지만 1920년대 독일의 한 천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진공관 안에서 양극과 음극 사이에 전극을 첨가시켰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약함이 강함을 이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불교적 '제3의 길'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 백남준 <사이버네틱스 예술> 1965

백남준은 플라톤, 니체, 루소, 헤겔, 맑스, 사르트르, 리오타르 등의 주제이기도 한 '약자의 힘(La force des faibles)'이라는 철학개념을 과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어 반가웠나보다.

열, 인류문화사에도 기여하는 민족 되길... 3천 년대까지 멀리 보는 안목

백남준은 90대에 들어서 한국미술의 새 지평을 열기 위해 무던 애를 썼다. 1992년 과천현대미술관에서 그의 진면목을 보인 회갑 전은 인산인해였다고 한다. 특히 어린이들이 좋아했단다. 1993년에는 한국미술의 현대화·세계화를 위해 '휘트니비엔날레 순회전'을 기획해 성사시켰고 비엔날레에서 받은 예술상금 3억 상당의 돈을 전시에 기부했다.

그 해는 '대전세계엑스포'가 열렸고 거기서 특별미술전에 세계미술계 거물급을 초대해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여는 데 협조해줄 걸 종용했고 그걸 성사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1995년 광주를 49개국이나 참가하는 세계적 미술도시로 거듭나게 하며 '광주비엔날레'도 개최했다. 결국 그는 다음 해 과로가 겹쳐 쓰려진다.

그는 이렇게 정부도 못하는 버거운 일을 혼자 감당했지만 누가 알아주기는커녕 그 공로도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긴 백남준이 그런 걸 바라고 한 건 아니다. 애국주의를 배격한 그가 보여준 희생적이고 숭고한 애국심일 뿐이다. 하지만 1년 예산 500억을 쓰는 국립현대미술관은 백남준 타계 10주년이 되도록 그를 위해 제대로 된 추모전 한번 연 적이 없다.

김찬동 경기도뮤지엄 본부장이 들려준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면 당시 김 본부장은 몇 년 전 뉴욕에 있는 소호 백남준 자택을 공무로 방문했는데 부인 시게코 여사가 자신을 보자 버럭 화를 내며 한국정부가 백남준을 위해 한 게 뭐가 있느냐고 불만을 터트렸단다.

백남준은 미디어다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을 '전자셔먼'이라고 했다. 즉 죽은 자와 산자를 연결하는 셔먼일 뿐만 아니라 선사시대와 30세기를 연결하고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영매'이고 그 다리를 놓은 '매치메이커'였다
 백남준은 미디어다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을 '전자셔먼'이라고 했다. 즉 죽은 자와 산자를 연결하는 셔먼일 뿐만 아니라 선사시대와 30세기를 연결하고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영매'이고 그 다리를 놓은 '매치메이커'였다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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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백남준은 1999년 말에 이런 말을 하면서 우리에게 과제를 남겼다.

"그러면 왜 우리단군은 이스라엘의 모세처럼 세계적 거물이 못되었느냐? 삼국사기가 구약성서에 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한국은 이스라엘처럼 민족의 유리표방을 거치지 않고 그래도 안정된 중견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개개인으로 볼 때, 우리는 유대인만큼 문화나 과학에서 세계사에 기여하지 못했다. 21~30세기 한국인의 과제는 여기에 있다."

그렇다. 우리는 강대국 속 분단국가에 살면서 어느 나라보다 많은 고통을 받았기에 그 대안을 내놓을 수 있다. 그것도 부족하면 미디어 그 자체인 백남준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다. 미디어란 '영매(靈媒)', 중매자(meditator)', '매치메이커(match maker)', '피스메이커(peace maker)'로도 해석되는데 이제는 우리가 그런 미디어가 돼야 한다.

백남준도 "한국이 20세기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21세기에는 크게 성공할 것이다" 하지 않았나. 우리도 백남준이 앞서 보여준 삶을 본받아 오랫동안 나라 없이 떠돈 유태인이 인류문화사에 크게 기여했듯 21세기에는 우리도 세계문명사에 기여해야 한다. 우선은 주변 4대강국에 도움이 되는 통일을 슬기롭게 유도해 세계평화에도 촉진제가 돼야 한다.

이런 점에 대해 박만우 전 백남준아트센터 관장도 인터뷰에서 한마디 보탠다.

"제가 깨닫는 건 유태인이 디아스포라 속에서도 세계문화사에 크게 기여했는데 그걸 보면서 그들이 뿌리 뽑힌 삶을 살았지만 '약자의 힘(철학용어)'을 발휘했다. 우리도 그게 가능하다. 20세기 당한 고통만큼 21세기에 엄청난 힘을 발휘한 것이다."

그리고 이영철 초대관장은 우리에게 숙제를 준다. 서양의 유명미술사가가 쓴 책 중 백남준 깎아내리는 예는 많단다. 예컨대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등이 쓴 <20세기 현대미술>에서 보면 백남준을 '플럭서스'의 한 회원으로만 봤고 그의 예술파트너 '샬럿 무어먼'을 성적 대상화했다니 놀랐단다. 우리가 백남준을 연구하고 탐구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 12월 5일 영풍문고에서 본 '타센(Taschen)'미술출판사에서 나온 <비디오아트>라는 책에서는 앤디워홀이 비디오아트의 창시자인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서술돼 있었다.

그러면서 이영철 관장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예술의 대부분이 일찍이 그가 예견했고 실험했던 범위 안에 있다며 그러기에 백남준은 '초국가적 장기프로젝트'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기도차원에서 지원하는 '백남준아트센터'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국가예산을 쓰는 국립미술관이 전폭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우리는 지금 백남준 아이디어를 제대로 활용 못하고 있다. 일상에서 정치까지 한반도 통일은 물론 세계평화를 구현하는 방안 등등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우리도 '백남준상'이 있지만 독일에선 일찍이 2002년부터 '백남준상'을 만들어 세계적 작가를 발굴하고 있다. 한국에도 그의 이름이 붙은 거리, 미술관, 대학교, 연구소 등이 더 생겨야 한다.

이제 1인 미디어시대 우리 모든 국민은 첨단의 스마트 폰을 무장하고 디지털 노마드 전사가 되어 국민의 지적 수준을 높이고 백남준의 가치도 다시 세우고, '자존감, 자신감, 자부심'을 되찾아 '탈영토 제국주의'를 만들어가야 하리라. 백남준은 "내일은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했는데 한국의 내일도 그를 통해 세계 속에서 아름다워질 것이다.

80년대 초에 알게 된 백남준
이제야 <오마이뉴스> 연재기사로 마무리하다

2015년 10월 25일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에서 백남준 강의를 끝내고 학생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
 2015년 10월 25일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에서 백남준 강의를 끝내고 학생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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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백남준에 대한 내 기억이 없고 그를 알게 된 건 80년 초부터다. 내가 1981년부터 10여 년간 예일여고(은평구) 불어교사로 근무했는데 내가 부임하고 다음해인가 홍익대를 막 졸업한 박진화씨가 새로 들어왔고 미술을 좋아하는 나는 그와 잘 어울렸다. 그는 작가답게 규칙생활에 적응을 못해 다음해인가 학교를 그만 두고 80년대 민중화가로 변신했다. 1985년 '서울미술공동체' 대표로 '20대 힘 전'을 연 이유로 구속되기도 했다. 박 작가는 지금도 강화도에 갤러리와 작업실을 두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민족미술인협회' 회장이다.

박진화 작가는 폴 세잔을 유난히 좋아했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 많이 했다. 그리고 그의 작품경향을 보면 세잔의 영향을 엄청 받았다. 세잔의 그림에 대해 "그림이 안 되는 뭔가를 그리면 그림이 된다"라고 설명했는데 이게 입체파의 근간이 된다. 이런 세잔의 영향을 받은 피카소는 후에 입체주의의 거장이 된 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중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그는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미대)에 유학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왜 그랬을까. 백남준은 1978년부터 독일의 이 명문미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기 때문이다. 박 작가 때문에 나도 백남준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고 백남준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은 훨씬 높아졌다.

1984년 1월 1일에 백남준이 전 세계에 생중계한 '굿모닝 미스터오웰'은 당시 한국은 군부독재가 정점에 달한 시기라 나에게 큰 해방감을 주었다. 이 작품을 보고 난 어떻게 저런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저건 하나의 예술적 기적에 가까운 사건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유명해진 백남준은 그해 6월 22일 한국을 방문해 대환영을 받았고 당시 <조선일보> 정중헌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의 예술관인 '(고등)사기론' 펼쳤다. 난 그 기사를 스크랩해 둔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최근 우연히 찾았는데 신문지가 너무 닳아 너덜너덜하다.

90년대에는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지학사'에서 프랑스어·영어교과서 편집을 했는데 얼굴이 노래질 정도로 야근을 많이 하는 곳이라 내 관심에서 백남준은 멀어졌고 그를 거의 망각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새천년 전야에 백남준의 '호랑이는 살아있다'를 보고 그에 대한 관심을 다시 높아졌다. 한국인의 저력에 대한 높은 평가와 새로운 천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점 때문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나는 2004년부터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등록 미술관련 기사를 썼고, 2006년 1월 백남준 선생의 타계를 계기로 그의 탐구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백남준아트센터 전시와 그와 관련된 기사에 집중적 관심을 두고 취재했고 관련자료 및 책자를 열심히 읽고 관련강연도 들었다. 백남준 첫 전시 연지 50주년이 되는 2013년부터 백남준 전문가인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과 인터뷰를 필두로 그의 연재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시기사와 함께 시간이 나는 대로 백남준 연재기사를 연대별로 썼고 그의 기사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올 6월 한 달 넘게 뉴욕을 방문해 백남준의 발자취를 밟아봤다. 뉴욕 지인의 소개로 그의 부인 시게코 여사를 만나려 했으나 건강상태가 워낙 안 좋아 못 만났다. 안타깝게 내가 귀국한 지 3주 후 돌아가셨다. 다행히 나는 1997년부터 2003년까지 7년간 조수를 한 미국작가 '라파엘레 셜리(R. Shirley)'를 만나 그녀와 인터뷰를 했고 그걸 기사를 올리는 작은 성과도 있었다. 연재기사 중 본문은 9월말에 끝났지만 이제야 그 후기를 끝마치다.

나는 이 연재기사 덕에 지난 10월 15일(3시간)과 25일(3시간)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겸임교수인 제2의 백남준이라고 불리는 글로벌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 작가의 초대로 백남준론 '미디어의 확장과 융합'을 강연을 하게 되는 기회가 생겼고 다행히 학생들 반응도 좋았다. 파리8대학에선 오래 전부터 '장 폴 파르지에(J. P. Fargier)' 교수가 백남준 비디오론을 강의해왔는데 한국에선 이게 백남준 전반에 대한 첫 강좌인지도 모른다.




태그:#백남준, #비디오아트, #서구근대의해체, #랜덤액세스, #시이버네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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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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