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위안부 피해자 최갑순(96) 할머니가 별세하셨다. 제1208차 수요시위에서는 최갑순 할머니의 영정 사진이 자리했다. 최갑순 할머니는 살아생전 "죄 짓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항상 주변 사람들을 다독이셨다고 한다. 그 죄로 누군가는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하기 때문에.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법학자 출신의 소설가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과거의 죄>를 통해 독일이 과거사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법리적 관점으로 접근했다. 그가 이 책을 20년에 걸쳐 집필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스스로 과거에 책임을 지는 독일인이 되기를 바랐다. 그는 다음 세대에게 스스로 왜곡되지 않은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권리를 남겨 주고 싶었다. 그리고 죄라는 것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더불어 끊임없이 미래에도 되살아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의 죄>에는 설사 나치 당이 자행했던 반인륜적인 범죄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이 옳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던 수많은 방관자들 또한 피해자들에게 가슴 깊이 뉘우쳐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새겨져 있다. 2025년이 되면 1945년 이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법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즉 당시 성인이었던 독일인이 단 한 명도 생존해 있지 않을지라도.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 과거 청산에서 지금까지 저지른 과오를 더 이상 수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과오를 끝낼 수는 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책 전체를 관통하며 그가 역설하는 것은,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죄하고 뉘우치는 것을 결코 끝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끝나면 과거에 대한 기억에는 점점 먼지가 덮일 것이며, 결국 과거의 죄는 무관심하게 내버려질 것이다. 마치 일본이 지금 과거에 대해 철저히 눈을 가린 것처럼.
책에 소개된 다양한 에피소드 중에서도 가장 시선을 끌었던 부분이 있다. 나치친위대 군인의 손자인 독일 소년이 자신의 할아버지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알고 나서는 속죄하기 위해서 유대인 정착촌에서 일할 결심을 하는 내용이다. 그 소년이 유대인 소년과 직면했을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순간은 범죄자의 운명과 피해자의 운명이 어떻게 얽혀 흘러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용서, 망각, 화해 중에서 화해가 가장 많은 노력을 요하고 성공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그는 전후 독일의 경험을 객관적으로 비판하면서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채찍질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용서를 구하는 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지나치지 않다고 말하는 독일과 잘못한 것이 없다는 일본. 이 대조적인 나라들의 태도에서 그 나라의 미래를 엿보게 된다.
또한, <과거의 죄>는 지금 이 순간 제국주의 일본의 피해국으로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보게 한다. 최갑순 할머니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죄라는 것은 절대로 죽지 않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