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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정권의 몸통 중 한 명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10여 년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조카 이동휘를 만나 숨은 비화를 들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등 유신이 부활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은 시점에서 '지피지기'의 관점으로 비화를 연재한다. -기자 말

울산 남구 신정동 골목에 있는 거북장 여관. 이후락의 동생과 조카가 3년전 이곳에서 3년 가가이 월세로 지냈다. 이곳 주인은 "이거락씨인 줄을 나중에 알게됐다"고 말했다.
 울산 남구 신정동 골목에 있는 거북장 여관. 이후락의 동생과 조카가 3년전 이곳에서 3년 가가이 월세로 지냈다. 이곳 주인은 "이거락씨인 줄을 나중에 알게됐다"고 말했다.
ⓒ 박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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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하 등장인물 존칭 생략)은 청와대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 등 박정희 정권의 핵심요직에 있었지만 1973년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이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는 이후락이다'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킨 소위 윤필용 사건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이 우두머리인 하나회가 득세하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12·12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에 의해 이후락은 부정축재자로 축출돼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2009년 별세하기 전까지 경기도 광주 '도평요'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지냈다. 다음은 신군부와 이후락과 관련된 조카 이동휘의 회상이다.

이후락 연행한 신군부, 조카에게 "반항하면 당기라는 지시 받았다"

"10·26이 터진날 밤늦게 이후락 라인을 통해 이후락의 용산 집으로 전화 한 통이 왔다.(당시 이후락 집은 서울 용산우체국 뒤 미군19게이트 앞에 있었다) 당시 내가 전화를 받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때 큰아버지(이후락)는 마침 울산 생가에 가 계셨다. 울산에 이 소식을 전하자 큰아버지는 새벽에 급히 서울로 올라오셨다. 10월 27일 이후락은 당시 최규하 총리와 만나 대책을 논의했다.

이후 신군부는 12·12로 권력을 장악했다. 신군부는 이후락과 김종필 등 박정희의 측근들을 부정축재자로 규정해 구금한 후 전 재산을 몰수하기에 이른다. 당시와 관련한 이동휘의 회상이다.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인 1980년 봄으로 기억된다. 이후락 자택에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조사할 일이 있다'며 이후락을 연행해 갔다. 잠시 후 헌병 2명과 합수부 3명 등 5명이 총을 들고 집무실로 와 내게 '손을 머리에 얹고 꿇어앉으라고 했다.

내가 '못하겠다'고 하자 한 명이 총부리로 내 명치쪽을 쑤셨다. 순간 머리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그들은 '반항하면 (방아쇠를) 당기라는 지시를 받고 왔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시키는대로 하지 않고 주저앉아 좌선을 했다. 신군부는 집 곳곳을 수색하며 갖가지 물품들을 증거물이라며 가져갔다.

이동휘는 신군부에게 "이후락에게 전해달라"며 염주를 전달했다. 당시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이후락은 전국 불교신도회장을, 이동휘는 신도회 조직부장을 맡고 있었다. 후일 이동휘는 감금됐다 풀려난 이후락에게 '염주를 전해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이후락은 김종필 등과 함께 전두환 신군부로부터 부정축재자로 몰려 전 재산을 몰수 당했다. 특히 당시 경찰 경무관으로 근무하던 이후락 동생 이거락(이동휘 부친)은 강제사직을 당하게 된다. 이후 이거락은 2년 전 별세할 때까지 일정한 직업 없이 지냈다.

이동휘는 "당시 신군부가 아버지(이거락)의 재산을 조사하다 집 한 채 외에는 나오는 게 없자 강제로 사직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며 "평소 이후락은 동생에게 '너는 절대 축재를 하지 마라. 노년은 내가 지켜줄 것'이라고 했고, 아버지는 그 말을 성실히 따랐다"고 말했다.

이거락은 그후 직업없이 지내다 부인과 사별한 후 경남 양산에 있는 친척집에서 얹혀 지냈다. 아들 이동휘는 일본 유학생활을 하다 1990년대 초 울산으로 와 <경상일보>와 <울산매일> 대표이사를 지냈다.

신문사를 나온 이동휘는 1995년 김대중이 총재로 있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의 당선을 위해 뛰었고, 2002년 대선에서는 다시 노무현 당선을 위해 뛰었다. 그는 이를 "김대중에 사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관련기사 : "DJ 납치는 애국심의 발로"라는 큰아버지 때문에...)

이동휘는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 후 분당된 열린우리당으로 가지 않고 민주당에 그대로 남아 울산지구당 지부장 대행을 지냈다. 이 때문인지 '공신'이면서도 참여정부로부터 어떤 직책도 받지 못했다.

지역신문 대표이사로 지내다 빈털털이가 된 그는 이후 동가식서가숙 하는 신세가 됐다. 부인과는 이혼하고 장남으로서 혼자가 된 부친(이거락)마저 부양하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부친이 얹혀 사는 모습을 보다 못한 이동휘는 대리운전 등을 하며  부친을 울산 남구 신정동 골목의 여관으로 모셔 월세생활을 했다. 장기방을 놓는 여관은 방이 좁아 둘이 거주할 수 없어 각각 방 하나씩을 사용하며 지냈다. 여관생활 3년이 되자 이거락은 아들 이동휘에게 "이후락 생가로 가고 싶다"고 했다.

울산 울주군 웅촌면 석천길 28-3에 있는 이후락 생가는 오랜 세월 아무도 거주하지 않아 수돗물도 나오지 않는 등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이동휘는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뚫어진 벽을 판자로 덧씌우고 면사무소에 수돗물 요청을 해 이곳에서 아버지와 거주했다. 이후락 생가에서 3년을 생활하던 이거락은 2년 전 가진 것 하나없이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형 이후락이 별세한 지 3여년 만이다.

울산 울주군 웅촌면 석천길 28-3에 있는 이후락 생가. 조카 이동휘씨는 이곳에 거주한다. 그의 부친은 이곳에서 2년전 별세했다. 그는 "이후락 생가를 복원하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자 과제"라고 했다.
 울산 울주군 웅촌면 석천길 28-3에 있는 이후락 생가. 조카 이동휘씨는 이곳에 거주한다. 그의 부친은 이곳에서 2년전 별세했다. 그는 "이후락 생가를 복원하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자 과제"라고 했다.
ⓒ 박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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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8일 오후 이거락과 이동휘가 3년을 거주했다는 울산 남구 신정동 골목 안 '거북장' 여관을 찾았다. 몇 일전 찾았을 때는 만나지 못했던 주인 장아무개씨를 만났다. 주인 장씨는 당시 이거락이 고령인 점을 감안해 3층에 있던 방을 1층으로 옮겨 주는가 하면, 때때로 식사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인 장아무개씨는 "3년 정도 아버지와 아들이 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찡한 생각이 들었다"며 "나중에서야 그 분이 이후락 동생 이거락인줄 알고 깜짝 놀랐다. 믿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처음부터 이거락인줄 알았으면..." 이라며 아쉬워했다.

세간엔 이후락 직계 재산설 떠돌아, "지금 내 모습 보면 모르겠나" 

이후락과 관련해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군사영어학교 출신의 한 예비역 장성은 수 년 전 필자에게 '이후락은 미국이 보낸 박정희의 사상 감시자였다'는 증언을 한 적이 있다"고 기술한 바 있다.

특히 그는 재미 블로거 안치용씨가 이후락 후손과 관련해 블로그에 올린 글 일부를 인용했는데, 인용글에는 '이후락의 직계가족, 즉 자녀들의 미국 부동산 매입은 쉽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라고 주장했다. 또한 한 때 세간에서는 이후락 직계의 미국내 자산이 5000만불에 달한다는 설들이 나오기도 했다.

이동휘는 "이후락 유족이 10여년 전 문중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울주군 웅촌면 이후락의 별장을 매각해 생활비로 사용했다"며 "지금 내가 다 쓰러져 가는 이후락 생가에서 거주하는 것도 '제발 생가만은 팔면 안된다'는 것 때문이다. 일각에서 나오는 직계 가족 재산설은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다.

이동휘와 관련해서는 한때 지역 일부 언론인들이 "이동휘가 지역언론사 대표이사를 지내면서 재산을 축적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동휘는 "지금 내 모습을 똑똑히 보지 않았나. 남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호기일 뿐이다. 일일이 대응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말년에 아버님(이거락)이 몸이 아프실 때 간병인도 못 구해주고 저 세상으로 보내드린 것이 너무나 한이 맺힌다"며 "하지만 돈이 없고 가난하다고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재산이 없어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것"이라고 말했다.


태그:#이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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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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