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다. 취임 후 첫 방일이었지만, 정상회담으로는 이미 두 번째였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노 대통령의 취임식에 와서 축하해 주었고, 그때 첫 정상회담이 열렸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그 자리에서 노 대통령을 일본에 초청했으며, 이렇게 두 번째 만남이 성사되었다.
국빈 자격으로 동경에 도착한 노 대통령은 다시 총리를 만나 '한일 관계를 위한 새로운 비전'과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그날 저녁 열린 만찬에서 노 전 대통령은 감사를 표한 뒤 이렇게 말했다.
"한일 관계는 때때로 과거 문제가 돌출될 때마다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양국이 이러한 장애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월드컵 대회를 지켜보면서 그 희망과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노 대통령은 고이즈미 총리를 향해 "처음 만난 날부터 마음이 통하는 분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지만, 그가 회담에서 무엇을 얻어내고자 했는지는 그 다음의 말로 명확히 드러났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정착시켜야 합니다. 지금 나와 한국 정부는 '평화번영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실현하는 토대가 될 것입니다."북한의 핵보유는 한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의 근심거리지만, 단순한 '우려'를 넘어 '공포'까지 느끼는 나라로 일본을 빼놓을 수 없다. 일본 정부는 국민들의 이런 우려를 구실로 미국과의 군사적, 경제적 연대를 강화하는 한편, 재무장을 통해 아시아 내에서의 역할 확대를 꾀해 왔다. 일본은 북핵에 대해 '협상을 통한 해결'을 말하면서도 무력충돌과 체제전복까지 염두에 둔 대북전략을 동시에 짜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명시화하는 것은 한반도에서의 전쟁 방지와 더불어 일본의 국비 확장을 견제할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좋은 전략이었다. 노 대통령이 방일 당시 했던 "북한을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현실에 기초한 냉정한 판단보다 감정적 대응을 앞세울 때 파국적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한 것이다.
한반도 평화나 일본의 군국화 견제가 회담 한 번으로 성취될 사안은 아니었으나, 취임 6개월의 대통령이 뜬 '첫 삽'으로서는 칭찬할 만했다.
노무현에게 쏟아진 악담, 12년 뒤 박 대통령의 선택
하지만 귀국한 대통령을 기다라고 있던 것은 보수 언론과 정치인의 냉대뿐이었다. <조선일보>는 '몰매 맞는 '빈손외교'', '거품외교', '화려한 '형식'… 남루한 '성과''로 혹평했다.
이 신문이 이후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해외 순방시 얼마나 극진한 대접을 받았는지를 강조한 것과는 뚜렷이 대비되는 보도였다.
<동아일보>는 '노 대통령의 '대북 진심'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사설을 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신문은 "북한을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말을 문제 삼으며 그 "위험한 발언"의 진의가 무엇이었냐고 캐물으며 비난했다.
하지만 진정한 '스타'는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당시 한나라당(지금 새누리당) 이상배 정책위 의장은 국회최고위원회의에서 "노 대통령이 국빈대우를 받은 것 빼곤 이번 방일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운을 뗀 뒤, 이런 악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의 이번 방일 외교는 한국 외교사의 치욕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고, '등신외교'의 표상으로 기록될 것이다."박근혜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사뭇 다른 길을 갔다. 첫째, 한 명은 무슨 일을 해도 욕을 먹은 반면, 다른 한 명은 무슨 일을 해도 (혹은 아무 일 안 해도) 별탈 없이 넘어갔다. 여기에 두 사람이 일본을 다루는 방식 또한 '상극'이라 할 만큼 달랐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첫날부터 총리를 만났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3년이 다 되어서야 첫 한일 정상회담 자리를 마련했다. 차이는 시기나 횟수만이 아니었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전략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했던 노무현과 달리, 박 대통령은 임기 3분의 2를 '외면'으로 일관하다가 별안간 일본을 끌어안는 기묘한 행태를 보였다.
영어권에서 두루 쓰이는 말로 '외교적(diplomatic)'이라는 형용사가 있다. 겉으로는 상대의 체면을 살려주면서도 뒤로는 이익을 취하는 행동을 일컫는 말이다. 항상 좋은 의미로 쓰이지는 않으나, 살벌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국제사회에서 활동하는 지도자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기교이기도 하다. 세련미, 빠른 계산, 뻔한 듯하면서도 듣기 좋은 언어 등이 외교행위의 핵심 자질이 된다.
그런 면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년간 벌여온 외교는 '외교'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특히 한국이 핵심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주변 강대국과의 외교는 '전략'은 커녕, 어떤 원칙이나 일관성도 찾을 수 없는 '널뛰기' 그 자체였다. 그 결과 터진 것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고 못박은 '위안부 한일 합의'다.
'널뛰기' 외교의 예견된 파국
모두가 알듯, 미국과 일본은 이해를 같이 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6.25 전쟁 당시 미국이 한국 파병을 결정한 것은 궁극적으로 일본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에게 한국은 소련과 중국 등 공산 국가들이 일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아주는 '완충지대(buffer zone)'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반도를 둘러싼 이 역학 구도는 반세기가 지난 뒤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이제 한국은 중국의 자본과 군사력으로부터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쿠션' 역할을 요구받게 된 것이다. 문제는 한국 경제가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큼 중국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2014년 한국과 중국의 교역량은 한-미 한-일 두 나라와의 교역량을 모두 합한 것과 비슷할 정도로 막대하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 간의 경제 상호의존은 계속해서 커질 것이다. 구매력 기준으로 볼 때, 중국 경제는 이미 2014년 미국을 추월해 세계 1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정부는 '한미일 동맹'을 말하지만, 그것은 모순적인 조어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중국과 '경제동맹'인 한국이, 한-미-일 '군사동맹'을 맺고 중국과 대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세 나라와의 관계는 골치 아프게 꼬여 있어 치밀한 외교적 대처가 요구되는데도, 박 대통령은 그런 복잡한 계산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했다.
그동안 박근혜 대통령이 대외적으로 보인 자기모순적 행동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예컨대 2014년 12월 한국정부는 '한미일 군사정보공유 약정'을 체결했다. 당시 일본의 상황은 한국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는데 말이다. 불과 몇 달 전인 9월에 일본정부는 집단자위권, 즉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만들기 위해 안보법안을 가결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해 4월에 아베가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여름까지 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공언한 것이 실현된 셈이다. 그런데도 한국은 도리어 군사정보공유 약정을 밀어붙여 일본의 패권주의에 날개를 달아주는 선택을 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다가 국민들의 맹렬한 반대로 포기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이름만 바꿔 강행한 것이다.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 의결이 중국을 자극할 것은 당연했다. 미국이 즉시 환영의 뜻을 밝힌 반면, 중국은 "일본이 아시의 평화를 훼손하는 전대미문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일본에 들러리를 선 한국이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박 대통령이 중국 항일승전 기념행사에 참석한 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한일합의', 무능외교의 결정타
문제는 박 대통령의 이런 행동이 주변국을 달래기보다 짜증스럽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무리수를 둬서 상대를 불쾌하게 만든 뒤 그를 만회하기 위해 또 다른 무리수를 쓰는 일을 반복해 온 탓이다.
외교의 제 1원칙은 상대를 놀라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중국의 전승기념식에 참석한 것은 그 자체로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주변국에 미리 정보를 제공하고 이해시키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게 외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석 한 달 전, 미국정부가 외교 경로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이 베이징 행사에 참석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어떤 선택을 하든 박 대통령이 곤란해지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참석하면 미국을 무시하는 셈이 되고, 참석하지 않으면 중국을 모욕하는 상황을 만든 것은 완벽한 외교 실패라 할 만했다.
박 대통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11월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를 대놓고 무시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행사가 열리기 전부터 청와대는 "오찬 등 식사와 기자회견을 생략한' (국빈 방문보다 격이 낮은) '실무방문'"이라는 점을 대놓고 홍보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중국의 리커창 총리는 국빈 자격으로 초청해 극진히 대접함으로써 '망신주기' 효과를 극대화했다.
아무리 일본에 감정이 있어도 외교 에티켓이라는 게 있다. 이런 무례가 일부 국민에게 카타르시스를 줄지 모르나, 결국 얻는 것은 국제사회의 조롱과 불신뿐이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위안부 한일 합의' 또한 박 대통령의 감정적이고 일관성 없는 '널뛰기 외교'의 산물이었다. 중국에 '대놓고' 달라붙는 모양새를 연출했으니, 이제 미국과 일본을 달랠 차례였기 때문이다.
최상의 외교는 욕 먹지 않고 이익을 지키는 것이다. 차상의 외교는 욕을 먹더라도 이익은 지키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퍼주면서도 욕을 먹는 최악의 외교를 펼쳐왔고, 한일합의는 무능외교의 결정타라 할 만하다.
'등신외교'라는 몰지각한 언어를 돌려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외교가 도대체 누굴 위해 존재하는지 생각해보라. 외교가 정치인들 체면이 아니라 국민들을 위한 것이라면, 수치를 무릅쓰고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