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저녁 뻐꾸기 울고 피리소리 들려오누나
물은 고요히 잠자고 그 속에 달그림자 떠 있어......두던의 잔디는 부드럽고 그 위에 몸을 높인 이 몸잠자코 나는 여름 하늘의 별을 세노라.어디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 나는 고요히 물 위에 가벼운 돌을던지다. 물은 잔작히 파도를 일으키고 달은 너울너울 춤을 추누나.여름의 저녁 어느덧 밤은 물속에 든 달그림자와 함께 깊어간다.그윽한 여름 개울의 잔디 두던에 고요히 밤은 짙어간다.제목이 <여름의 저녁>인 이 시 속에 등장하는 '두던'은 언덕의 방언이다. 시인은 평범한 표준어인 '언덕' 대신 '두던'을 사용함으로써 독자에게 작품의 지리적 배경인 시골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 이렇게 언덕 대신 두던을 골라쓴 작가의 언어 구사는 문학의 모든 갈래 중 적합한 어휘 선택에 가장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시인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물결이 '잔잔히'가 아니라 '잔작히' 일어난다고 표현한 것도 마찬가지다. '잔잔히'는 너무나 익숙한 단어인 탓에 '물은 잔잔히 파도를 일으키고'라고 말하면 독자에게는 아무런 느낌도 전달되지 않는다. 너무나 일상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작가는 '잔잔히'가 아니라 '잔작히'를 선택했다. '잔작히'는 대략 '잔잔하고 작다'는 뜻이다. '잔잔하다'가 물결의 고요한 성질만 드러내는 어휘라면 '잔작하다'는 그 물결이 고요할 뿐만 아니라 작기도 하다는 형상까지 말해준다. 게다가 상용되는 어휘가 아닌 까닭에 독자에게 신선한 느낌도 준다.
이 시는 1연과 4연의 첫머리에 '여름의 저녁'이라는 동일한 구절을 앉혀 운율을 생성하는 한편, 1연 2행과 4연 2행의 고요한 물상을 각각 물과 밤으로 바꿈으로써 변화를 추구하는 기교도 보여준다. 물론 1연과 3연이 '소리'가 들려온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소리가 각각 피리소리와 뻐꾸기소리로 서로 다르다는 사실도 작가의 세심한 시적 표현력을 확인하게 해준다.
연못이 있는 시골 여름밤의 고요한 정취를 잘 형상화한 이 시는 1949년에 창작되었는데, 그해 7월 15일 경북고등학교 4학년 2반 학생들이 5학년 진급을 기념하여 필경으로 만든 학급문집 <반딧불>에 실렸다. 학급담임 이길우 교사와 학부모들의 지원을 받아 제작된 <반딧불>에는 전체 급우 63명 중 59명이 쓴 시, 수필, 한뼘소설, 기행문, 평론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학급문집인 데다 오랜 세월 전인 1949년 출판물인 까닭에 일반인이 <반딧불>의 진본을 구해서 읽어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반딧불>을 보려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을 찾아가야 한다. 당연히 기자도 한국학중앙연구원을 방문하여 이 시를 읽은 것은 아니다. 이 시는 경북고등학교 출신 예술가들의 단체인 경맥문인협회와 경맥예술인총연합회가 공동으로 펴낸 <경맥문학> 5호에 수록되어 있다.
놀랍게도 이 시의 작가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당시 고2이던 노태우 학생은 팔공산 아래 산비탈에 살면서 평상시 느껴왔던 여름밤의 정취를 시로 풀어내었다. 이 시를 발굴하여 <경맥문학>에 제공한 이는 경북고 36회 이규직 졸업생이다.
<경맥문학> 5호에는 또 다른 특별 읽을거리가 있다. 이상화와 이장희의 유고를 묶어 <상화와 고월>을 출간함으로써 두 사람의 걸출한 시인을 한국문학사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한 백기만(2회 졸업생) 시인과 그 가족들의 문학작품을 또 다른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이 특집에는 백기만의 시 '갈메기'(원작의 표기임)와 프란츠 카푸스의 시 '소네트' 번역문, 백기만의 장녀 백태희의 '휴전선의 봄' 등 시 5편, 차녀 백용희의 '외눈박이 사회의 바보' 등 수필 4편, 1남 2녀 중 막내인 백낙운의 번역문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릴케)> 중에서'가 실려 있다. 아래는 백태희 작 '휴전선의 봄' 전문이다.
시냇물 졸졸졸새아기 가슴마냥 버들개지 부풀고노랑저고리 분홍치마꽃댕기 나풀나풀봄치장 한창이네하늘엔 종달새 노래들판엔 아지랑이봄마중 갈꺼나신명난 새끼여우그만 지뢰를 밟았네아 사월은 잔인한 달춘래 불사춘정녕 이 땅의 봄은어디쯤 오고 있는가
물론 <경맥문학> 5호에는 시, 수필, 소설, 평론 등 문학작품들만 실려 있는 것이 아니다. 서예 작품(36회 하오명, 37회 황갑용), 서양화(54회 주태석, 55회 공성환), 조형(55회 유영환), 사진(49회 박순국, 49회 문태현, 54회 안중은, 65회 박진관), 가족작품(44회 김광태의 부인 정숙) 등 비문학 갈래의 창작물들이 '경맥 갤러리'에 모여 있어 독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5호는 개교 99주년인 2015년에 경맥예술인총연합회가 성취해낸 큰 사업들에 대한 추억도 특집으로 다루어 세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특집은 43회 정기진 테너의 독창, 54회 김세일 동문 가족의 클라리넷 연주와 피아노 반주, 90회 박호경 테너와 그의 벗들로 구성된 4인조 혼성 중창단의 노래 등으로 구성된 2015년 1월 20일의 '신년 음악회'를 비롯 일본 오사카 히가시나리 구민회관에서 펼쳐진 2015년 6월 30일 해외공연 등의 경과와 사진을 보여준다.
2014년 5월 30일 국내 처음으로 '세월호 희생자 추모 음악회'를 대구시민회관 그랜드 콘서트홀에서 개최한 경맥예술인총연합회는 2015년 6월 11일 같은 공연장에서 개교 90주년, 오사카 카이세이 고교와의 자매결연 1주년, 그리고 한일국교 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도 열었다. 이 음악회에는 키타하라 나오코 피아니스트 등 3명의 일본 연주자가 출연하여 고교 동문 음악회 사상 최초의 국제 음악회라는 신기원을 개척했다. 또 6월 12일과 13일에는 박지운(66회)이 현진건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대본 집필 및 작곡한 창작 오페라 <운수 좋은 날>도 대구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올렸다.
경북고교는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이한다. 경맥예술인총연합회 이원락 회장(44회)은 '발간사'를 통해 "2016년에는 개교 100주년 기념 신년 음악회, 특별 음악회, 미술전, 사진전, 시민 가요제, 영화제, 뮤지컬, 오페라 등 다양한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면서 "많이 지켜봐 주시고 격려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림, 사진, 서예, 문학작품 등 각종 원고의 마감 기한은 2016년 6월 30일로,
grandarts@hanmail.net으로 접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