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계속해서 쇠락할 수밖에 없다. 대중을 리드할 자산과 이념을 상실했다. 불멸 후 500년이 지난 대승불교가 일어났듯 새 대승운동이 필요하다. 기성 종단은 사망한 것과 다름없다. 희망은 재가자에 있다. 비구보다 덜 때 묻은 비구니가 희망이다."
근현대 한국불교 최고 학승이었던 탄허 스님(탄허 스님(1913~1983)은 예언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탄허 스님에게 사사 받은 현오 스님(전 영월 보덕사 주지)은 29일 용인 정원사에서 병신년 새해와 한국불교를 이렇게 전망했다.
돈, 향락에 빠져 힘 잃은 출가자들
스님은 "기득권을 가진 스님들이 놓지 않으려 해서 불교가 암담해졌다. 종교인의 범죄율이 일반인보다 높다. 출가자가 돈과 향락에 빠지면서 대중을 이끌 힘을 잃었다. 출가자는 재가불자들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재가자가 한국불교의 희망인 까닭"이라고 했다. 이어 "지금은 여성의 시대이다. 비구니스님들이 기운을 받는 시기이다. 비구스님들이 시내에 포교당을 차렸다가 많이 실패한 것도 한 본보기이다"고 했다.
스님은 지난 1977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희찬 스님 상좌로 출가해 탄허 스님에게 사교과정 사사 받았다. 1980년부터 제방 선원에서 수행했다. 1986년 대지포교원을 세워 포교에 힘썼다. 1990년 토굴에서 수행 후 1993년 미얀마 수도원을 찾아 위빠사나 수행을 했다. 1994년 영월 보덕사 주지를 지냈다. 1998년부터는 꿈과 최면술을 연구했다. <대지법요집>(1988년). <미얀마 72일>(1994년). <예언의 허와 실>(1999). <불교에서 본 마음과 최면 전생>(2001). <꿈! 미래의 열쇠>(2006) 등을 펴냈다.
큰 공부하려면 스님 되라는 말에 출가스님은 탄허 스님을 3년 동안 시봉했다. "출가 후 바로 시봉을 시작했다. 수행비서처럼 잘 모시고 다녔을 뿐이다. 법회에 모시고 다니면서 불교를 배웠다"고 했다.
탄허 스님은 주로 새벽에 공부를 가르쳤다. 새벽예불 후 상좌를 불러 전날 외운 경전을 점검했다. 현오 스님은 <초발심자경문> 등 내전을 비롯해 외전인 <대학> <맹자> <중용> 등을 탄허 스님에게서 직접 지도 받았다.
스님은 "발심출가가 아니고 나는 역학을 공부하고 싶어 출가했다"고 말했다.
대전에 역학의 대가이던 이동원 선생이 있었다. 스님은 출가 전 이 선생에게 역학을 배우러 다녔다. 탄허 스님과 이 선생의 왕래가 잦았다. 이 선생의 "큰 공부하려면 스님 따라가 출가하라"는 말에 출가를 결심했다.
처신은 도교, 이상은 유교, 생노병사는 불교
스님은 "역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해결 못하는 인간사를 풀기 위함이었다. 죽음과 알 수 없는 미래가 바로 그것이다. 탄허 스님을 모셔보니 불교에 해답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겸양 지혜 등 살아가는 처신은 도교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정치와 이상구현은 유교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생노병사 해결은 불교에 답이 있었다. 아는 것을 실행하는 방법이 참선이다.
스님은 탄허 스님에게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판자때기 이빨에서 털이 난다)' 화두를 받아 선방에 갔다. 방부를 몇 번 들이고 선방과 토굴을 번갈아가며 정진 했다. 스님은 탄허 스님에게 "앞니에 터럭 나는 것은 아무리 고민해 봐도 없다"고 말했다. 몽둥이가 날라왔다. 스님은 무주구천동에 토굴을 마련해 공부했다. 화두를 바꿨다.
스님은 무주구천동 토굴에서 혼자 공부하던 2년을 이렇게 회고 했다. "처음에는 고독으로 몇 달을 지냈다. 이어 산돼지 등 산짐승의 위협을 받으며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더니 수마가 나를 괴롭혔다. 하루 종일 잠만 잔적도 많다."
스님은 경허 스님의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나귀의 일이 가니 말의 일이 오는 이치)' 화두를 타파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하늘이 찢어지는 느낌이 났다. 그러기 전에 내 손목부터 내 몸이 없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신도와는 불가근불가원 해야
공부에 어느 정도 성취를 맛 본 스님은 서울에 포교당을 차렸다. 대지포교당이다. 3년 쯤 지나 문을 닫았다.
스님은 "원력이 웬만하지 않으면 포교할 수 없다. 정진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주구천동 토굴로 돌아갔다. 찾아오는 신도들 때문에 공부가 되지 않았다.
스님은 "포교원에서 만난 인연으로 신도들이 찾아왔다. 공부에 걸림이 됐다. 신도들이 다녀가면 정신이 사나워 공부가 안됐다. 신도들이 안 다녀가면 먹을 것이 없었다"고 했다.
스님은 홍천 토굴로 옮겼다. 4년 동안 간화선을 중심으로 다시 정진했다. 그러면서 신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스님은 "신도들은 마음공부보다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지, 성공할 수 있는지를 궁금해 한다. 우연치 않게 꿈을 꾸게 됐다. 그 계기로 유식과 연결시켜 꿈을 연구했다. 불교는 마음을 강조한다. 꿈은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공부가 꿈 연구와 다르지 않은 이유"라고 했다.
스님은 미얀마 마하시 선원 등을 찾아 위빠사나 수행을 했다. 다녀오니 문도에서 공찰 주지를 맡겼다. 영월 보덕사였다.
주지? 수행자가 할 짓 못 돼 스님은 보덕사 주지를 3년 지냈다. 방학 동안 비는 보덕사 부설 유치원을 이용해 위빠사나 수련원을 운영했다. 조계종 최초의 위빠사나 수행시설이었다. 이곳을 거친 대표적인 사람이 임승택 교수(경북대)와 붓다락키따 스님(보리수선원)이다.
스님은 "주지 소임을 살다보니 수행자가 할 짓이 못됐다. 스스로 나를 돌이켜봐도 공부를 더 해야 할 사람이었다. 다시 토굴로 돌아와 수행과 함께 최면, 꿈, 사주, 관상 등을 공부했다"고 말했다. 스님은 공부한 것을 대중에게 회향코자 서울에 대지심리연구소를 설립했다.
스님은 "(꿈 사주 관상 등을) 출가자들이 공부해 대중을 더 이롭게 하기를 바랐다. 정작 스님들은 관심이 없었다. 연구소 운영을 3년 하다 보니 싫증이 났다. 다시 토굴로 들어갔다"고 했다.
스님은 "지금 시대를 보면 불교가 신도들을 계속 뺏기고 있다. 신도들은 출가자가 훌륭한 수행자가 되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출가자를 만나) 자신들의 삶이 윤택해지기를 더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스님들이 의사‧상담사 역할을 했다. 중생이 아프면 약왕보살처럼 치료를 했다. 상담을 통해 고민을 풀어주고 희망과 용기를 줬다. 이런 역할을 스님들이 할 수 없다보니 신도를 철학관에 뺏기고 의사, 교수들에게 뺏기고 말았다. 스님들이 기도해 주는 역할로 전락했다"고 했다.
귀신은 없다, 현혹되지 말아야스님은 "출가자들이 중생의 고통을 해소시키고 희망을 주고 미신에게 탈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나 천도재 등을 통해 귀신장사를 하고 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없는 귀신도 만들어 내고 있다"고 했다.
스님은 "귀신은 없다. 모두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내가 최면 꿈 등을 연구한 결과이다. 이는 확실하다. 귀신이 내 마음 밖에 있다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에서 어긋난다"고 했다.
스님은 "불교에서는 부처님도 때려잡으라고 한다. 간화선의 특징은 번뇌가 일어났다면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다. 제거는커녕 불교가 중생의 번뇌를 조장하고 있다. 49재 등 천도재도 수익창출의 수단이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출가자는 신도들을 살펴 그들의 운이 좋을 때는 희망을 주고 운이 나쁠 때는 인내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돕고자 나는 역학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스님을 만난 곳은 경기도 J사찰이다. 스님은 이곳에서 매주 4일씩 비구니스님들에게 역학을 지도하고 있다.
"비구스님들은 종단에 줄서서 절 하나 맡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비구니스님들은 신도들과 유대를 이끌기 쉽다. 포교에 강점이 많다. 비구니스님들에게 내가 재능기부를 하는 이유"라고 했다.
번뇌가 곧 미신, 미신이 곧 번뇌스님은 "바르게 받아들인다면 사주를 보는 것은 미신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떤 종교든지 운명론이 다 있다. 표현만 다르다. 도교에서는 자연 그대로 살라는 것이 운명론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가 그렇다. 불교는 업보가 운명론이다"고 했다.
스님은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가 곧 미신이다. 운명론도 번뇌다. 세상에 번뇌 아닌 것이 어딨느냐. 내가 (역학 등을 통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도 번뇌일 수 있다. 불교교리가 들어가지 않으면 모두 미신이 된다"고 했다.
이어 "간화선은 무엇이라고 하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뭐라고 해도 미신(번뇌)이 될 수 밖에 없다. 각자 최선을 다하고 살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매일 판단을 하고 산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판단하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신에 사로잡힌 것이다"고 했다.
스님은 "일반인에게 '모든 게 번뇌망상이다. 다 부질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통하겠느냐. 한 본보기로 나쁜 꿈꿔서 불안한 사람을 감내하게끔 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나쁜 것(운, 꿈 등)이라도 내가 어떤 생각을 가졌느냐가 중요하다. 원수라도 '~ 때문에'라고 생각해서는 내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스님은 죽고 싶은 사람에게 참고 살 수 있는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누구라도 괴로운 것은 똑같다스님은 "고뇌는 수행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사주를 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어떤 악운도 견뎌서 견딜 힘을 주는 것이다. 추워질 것을 알고 미리 옷을 두껍게 입는 것과 같다"고 했다.
스님은 "운 좋은 사람은 30%에 불과하다. 운 나쁜 70% 사람들과 모두 어울려 산다. 분명한 것은 운이 좋던 나쁘던 괴로운 것은 똑같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고민이 있고 괴로움이 있다"고 했다.
스님은 "공부하고 수행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내가 살아봐도 무주구천동 토굴에서 공부에 매진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미얀마에서 수행할 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제일 괴로울 때가 언제인 줄 아느냐? 포교원 운영하고 보덕사 주지 소임 살 때였다. 끊임없이 신도들이 돈 내게 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했다. 너무 괴로웠다"고 했다.
스님은 "깨달음은 누구나 얻을 수 있다. 괴로움은 누구나 똑같다"면서 "수행자는 수행을 해야한다. 수행자가 수행하지 않고 좋은 절 주지를 살면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날마다 좋은날'인데 분별할 뿐스님은 "사람은 봄을 가장 좋아한다. 만물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여름은 여름대로 활동할 수 있어 좋다. 가을은 추수를 할 수 있어 좋다. 겨울은 내년을 계획할 수 있어 좋다. 사시사철 나쁜 때는 없다. 사람이 분별해서 구할 뿐"이라고 했다.
이어 "한국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상승세였다. 운이 좋았다. 운이 좋을 때는 어떤 사람이 대통령을 하더라도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민생고를 해결했다,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은 전환기를 만들어 큰 충돌을 막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군부독재를 정리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역감정을 해소해 전라민국이 생길 뻔 한 것을 막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좌익과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던 항일투사의 한을 풀었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없었다.)
스님은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후광을 업고 대통령에 당선돼 지금까지 그것을 기리는데 힘썼다면 남은 임기라도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스님은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허물을 해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안 되면 한국은 다시 혼란을 맞을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스님은 "내년은 한국에게는 가을이다. 새 시기를 준비하는 정리 기간이다. 상당히 정치권이 혼란스럽다. 빅뱅 수준이다. 야당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당도 마찬가지다. 가을은 내년이 좋을 수 있는 준비기간이다. 결과는 좋겠지만 혼란스럽다"고 했다.
병신년 신수가 궁금해?스님은 "새해를 맞아 병신년 신수가 궁금하거든 입춘일에 절을 찾아 부처님께 약속을 하자"고 했다. 동지는 태양이 잉태되는 날이고 입춘은 태양이 탄생하는 날이라고 설명했다.
스님은 "삼재팔란은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다. 입춘에 절에 와서 새해에 이룰 한 가지를 서원하고 한해 동안 실천한다면 운명이 바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