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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정권의 몸통 중 한 명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10여 년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조카 이동휘를 만나 숨은 비화를 들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등 유신이 부활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은 시점에서 '지피지기'의 관점으로 비화를 연재한다. -기자 말

이후락의 조카 이동휘(왼쪽 두 번째)가 <경상일보> 대표이사를 지내던 1991년 11월, 일본에서 열린 'CATV 91 국제전 일본 견학 세미나'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아동휘는 "<경상일보>에도 CATV를 접목하려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의 종이신문과 CATV 를 연구하고자 일본에 간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락의 조카 이동휘(왼쪽 두 번째)가 <경상일보> 대표이사를 지내던 1991년 11월, 일본에서 열린 'CATV 91 국제전 일본 견학 세미나'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아동휘는 "<경상일보>에도 CATV를 접목하려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의 종이신문과 CATV 를 연구하고자 일본에 간 것"이라고 밝혔다.
ⓒ 이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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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2인자로 불리다 12·12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걸었던 이후락(HR· 아래 존칭 생략)은 2009년 85세로 별세할 때까지 30년 가까이 경기도 광주 도자기공장 도평요에서 칩거하며 일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일체의 언론 접촉을 피한 것도 그 배경이다.

하지만 HR은 간혹 자신이 권력의 중심부에 있을 때 가깝게 지냈던 인사들과 접촉하며 때로는 일부 사안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신을 10여 년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조카 이동휘를 돕기 위해 나선 일이다.

HR은 권력 중심부에 있을 당시 서울의 경찰서장으로 재직하던 동생 이거락에게 "노후를 내가 책임질 테니 축재하지 말라"고 했고, 동생아들 조카 이동휘에게도 자신을 보필하는 것에 대해 장래를 보장하는 언질을 했었다. 하지만 돌연 벌어진 10·26과 이에 따른 몰락으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내심 미안함을 가졌다. 이에 이동휘가 지역 언론에 참여할 때 도움을 주려 했던 것.

권력 상실로 챙겨주지 못한 조카 위해 나선 이후락

HR이 신군부에 의해 권력에서 쫓겨나자 가신이던 이동휘는 한일의원연맹 실무자를 지내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평소의 꿈이던 일본 로비스트가 되기 위해 HR로부터 소개받은 일본 정치인들과 교류하는 등 꿈을 키워가던 1989년, 이동휘는 중학교 동기인 최일학(전 울산상공회의소 회장)의 권유로 최일학의 외삼촌이 창간한 울산지역 최초 일간지 <경상일보>에 참여하게 된다. (관련기사 : 이후락은 왜 정주영의 대선 출마를 말렸나)

이동휘는 그 과정에서 HR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HR은 이동휘를 위해 친분이 있던 당시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을 만나 협조를 요청하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경상일보>와 <국제신문>은 엇갈린 운명을 맞게 된다. 다음은 이동휘의 증언이다.

1970년대 중후반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을 맡고 있던 이후락이 당시 조계사 2층에 있던 집무실에서 방문한 일본 종교지도자와 환담하고 있다. 12·12로 권력에서 밀려난 이후락은 자신을 보필했던 조카 이동휘를 챙겨주지 못해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1970년대 중후반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을 맡고 있던 이후락이 당시 조계사 2층에 있던 집무실에서 방문한 일본 종교지도자와 환담하고 있다. 12·12로 권력에서 밀려난 이후락은 자신을 보필했던 조카 이동휘를 챙겨주지 못해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 이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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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초 일본에서 공부하던 내게 중학교 동기인 최일학이 '외삼촌과 함께 지역일간지 창간에 동참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문제를 경기도 광주 도평요에 있던 HR에게 상의하자 '가서 참여해봐라'는 답이 돌아왔다.

<경상일보> 서울지사장으로 첫 업무를 시작했다. 당시 서울지사에는 5명이 근무했는데, 입사한 첫 달부터 급여가 나오지 않았다. 신문사의 운영이 어려운 것을 알고 HR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내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HR은 내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얼마 후 HR과 나는 서울 중구 롯데호텔 34층 신격호 회장의 집무실을 찾았다. HR과 신격호 회장은 집무실에서 점심을 시켜 오랜 시간 독대를 했다. 독대가 끝나자 신격호 회장의 측근인 최 비서가 내게 '신격호 회장 고희(70세)사업에 사용하려는 예산이 있다. 이를 언론사업에 사용하시겠다고 한다. 어떻게 투자해야 하는지 본사에 가서 알아보고 답을 해달라'고 말했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1922년생으로 당시 65세였다 -기자 말) 

너무 기뻐 즉시 울산으로 내려와 당시 최일학의 외삼촌인 김상수 <경상일보> 사장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나는 그가 롯데그룹의 투자를 크게 반길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김상수 사장은 화를 내며 '나도 신격호 회장을 만날 수 있는데 왜 쓸데없는 짓을 했느냐'며 오히려 나를 나무랐다. 그 사이 몇 차례나 신 회장 측 최 비서가 전화를 해와 '어떻게 돼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시민들이 자체 운영하는 것으로 결정 났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경상일보>에 대한 롯데그룹 투자를 진행할 수 없었다.

몇 달 후 롯데그룹이 부산의 일간지인 <국제신문>을 인수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롯데그룹은 내가 <경상일보> 투자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자 <국제신문>에 투자를 한 것이다. HR은 '신격호 회장에게 협조를 요청할 때 당연히 성사될 줄 알고 신문사 이름은 말하지 않고 고향신문이라고 했는데, <경상일보>와 <국제신문>이 헷갈려나 보다'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지난 1980년 초,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언론기관의 난립방지'라며 전국의 44개 신문·방송·통신사에 대한 통폐합을 강행했다. 당시 부산 최대일간지이던 <국제신문>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았던 <부산일보>에 통합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 언론통폐합으로 언론인 933명이 해직되었는데, 89년 이후 <국제신문> 해직 언론인들이 울산의 <경상일보>로 들어왔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신군부는 6·29 항복선언을 했다. 이 선언에는 '언론자유 창달'도 포함됐다. 그해 말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노태우는 1988년 언론 자유화 조치를 취했고 <국제신문>은 1989년 2월 복간됐다. 롯데그룹은 다음 해 경영이 어렵던 <국제신문>을 1990년 인수해 직접 운영에 나섰다. 하지만 롯데그룹은 IMF 때인 1998년 경영난을 이유로 국제신문을 그룹에서 분리했다

당시 롯데그룹의 <국제신문> 인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다. 롯데그룹이 지역신문사를 인수한 것은 그룹 보유 비업무용토지를 이용해 부산 서면 등에 백화점을 지으려는 것에 대한 비판 여론을 무마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지적이었다.

당시 롯데그룹의 지역신문사 투자 대상을 두고 <경상일보>와 <국제신문>의 운명이 뒤바뀌었지만, 과연 어느 신문사에 득이 됐을지는 앞으로 역사가 판단해 줄 것으로 보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울산>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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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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