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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아들 내외 그리고 딸까지 며칠을 두고 의논을 하였습니다. 아내는 결론을 내려 내게 말했습니다. 

"애들이 추천하는 이태리여행 어때요? 난 그동안 연월차 아껴둔 거 이번에 쓰면 시간 낼 수 있고요. 당신 퇴임한 뒤 어디 가지도 못했는데, 이번에 눈 딱 감고 기분 전환이나 합시다."

나는 이탈리아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하면 몇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한반도와 같은 장화모양의 반도, 교황님이 있는 바티칸시국, 세계문명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로마제국, 베르디의 오페라, 우리 입맛에도 친숙한 스파게티와 피자 그리고 프랑스 파리 뺨치는 패션산업 등등. 낯선 것에 대한 큰 기대를 안고, 아내와 나는 이탈리아 로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유서 깊은 고색창연한 두오모

안개 속에서도 웅장함과 화려함이 있는 오르비에토 두오모이다.
 안개 속에서도 웅장함과 화려함이 있는 오르비에토 두오모이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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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첫날(12월 30일). 전날 12시간이 넘는 비행에도 피곤을 잊은 채 움브리아주 오르비에토로 갑니다. 이른 아침, 일기가 고르지 못합니다. 고속도로에 아침 안개가 자욱합니다. 어느 순간 햇살이 비춥니다. 안개가 끼웠다 걷혔다를 반복하며 조화를 부립니다. 차창에 비치는 이탈리아 산하가 평화롭습니다. 차창 밖 파릇파릇한 밀밭 풍경은 우리나라 초봄과 같습니다.

오르비에토는 언덕 위의 도시라 '푸니콜라레'라는 전용열차를 이용한다.
 오르비에토는 언덕 위의 도시라 '푸니콜라레'라는 전용열차를 이용한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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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고요한 아침안개가 낮게 깔린 오르비에토 역에 멈춥니다. 여기서 '푸니콜라레'라는 전용케이블카를 타고 잠깐 오릅니다. 여행 안내자가 설명한 언덕 위의 도시를 실감합니다.

마을 입구 카헨광장에서 다시 버스로 갈아탑니다. 몇 분 만에 도착하여 오르비에토 두오모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언덕 위에 인구 2만의 작은 도시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정말 아름답고 화려한 두오모입니다. 안개에 휩싸였지만, 희미한 성당의 실루엣이 고색창연합니다. 일행 모두는 카메라를 꺼내 초점을 맞춰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웅장함에다 화려함을 더한 오르비에토 두오모.
 웅장함에다 화려함을 더한 오르비에토 두오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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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0년에 시작하여 300여 년에 걸쳐 완성되었다는 오르비에토 두오모. 웅장하고 화려한 성당의 위엄이 오르비에토를 찾는 이들의 가슴을 화려하게 물들입니다. 건축가, 화가, 모자이크 장인들이 대를 이어 얼마나 많은 기도와 정성을 기울였을까? 성당 첨탑 십자가를 보고 두 손을 모읍니다.

두오모는 이탈리아 중심의 대성당을 말합니다. 이른바 주교좌의 성당이죠. 오르비에토 두오모는 로마네스크양식과 고딕양식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게 특징입니다. 성당 정면의 은은한 색감의 외벽과 금빛 찬란한 섬세한 모자이크화가 웅장함과 화려함을 더합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봤습니다. 정문 위 장미창의 화려함은 극에 달합니다. 생각보다 성당 안은 어둡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보면 그저 대리석일 뿐이지만, 대리석을 통해 채광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입니다.

오르비에토 두오모 내부. 성당의 아름다운 모습과 장엄함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오르비에토 두오모 내부. 성당의 아름다운 모습과 장엄함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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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비에토 두오모는 외부의 웅장함과 내부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볼세나의 기적'의 성체포가 보관되어 있어 유서 깊은 성당으로 명성이 큽니다.

13세기에 프라하의 베드로 신부는 볼세나의 산타크리스티나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중 성체에서 피가 흘렀다고 합니다. 이때 흘러내린 피가 제대와 성포를 적시게 되었는데, 당시의 교황 우르비노4세는 이 성체포를 오르비에토로 가져오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르비에토 두오모는 성혈 성체포를 모시기 위해 300년에 걸쳐 건축이 이뤄진 셈입니다.

성당의 웅장함에 매료된 것 이상의 어떤 경건함이 마음 속 깊이 파고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슬로우시티 발원지 오르비에토

오르비에토의 한적한 마을. 중세시대의 고즈넉한 마을이 연상된다.
 오르비에토의 한적한 마을. 중세시대의 고즈넉한 마을이 연상된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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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당에서 나와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마을길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미로처럼 꼬였다 풀리기를 반복하는 차 없는 골목길이 혼잡스런 마음을 떨쳐버리게 합니다. 길바닥에 멋진 옛날 돌로 포장된 길이 발걸음을 가볍게 합니다.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를 걷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안개에 젖은 마을 풍경은 이국의 정취에 듬뿍 취하게 합니다. 중세 영화 세트장 같은 마을분위기가 자신들의 빛나는 전통을 고귀하게 여기는 품격이 느껴집니다.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세태에 인간의 진정어린 정서에 운치를 더하는 게 무엇인지를 다시금 깨닫습니다.

부산하게 걸으며 사진 찍기에 정신이 팔린 나에게 아내가 말을 겁니다.

"여보, 여기에선 천천히 걸어요, 이곳이 슬로우시티라잖아요!"
"슬로우시티? 아,그렇지!"

오르비에토는 슬로우시티 운동이 시작된 곳이라 합니다. 이곳에는 국제슬로우시티본부가 있습니다.

오르비에토에 있는 성을 천천히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르비에토에 있는 성을 천천히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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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시티운동은 천연의 자연 속에서 전통문화와 자연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느림의 삶을 추구하는 국제운동입니다. '맛의 세계화, 표준화'를 거부하고, 각국 고유의 음식을 지키자는 슬로푸드운동에서 확대된 것입니다. 옛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림의 미학으로 삶의 가치를 되돌아보자는 운동입니다.

슬로우시티의 발상지답게 오르비에토에는 즉석식품의 패스트푸드점이 없습니다. 소상공인을 보호하기 위해 대형마트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대신 크고 작은 식당에는 인근에서 생산되는 유기농채소로 만든 자연식품만을 팔고 있습니다. 이른바 슬로우시티의 면모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대를 살아가며 모든 게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삽니다. 언제부터 우리가 사는 세상이 '빨리빨리'의 노예가 되어버린 걸까요? 나 자신에 대한 정체성마저도 망각한 채 주변을 배려 못하고, 마음이 사나워지고 있는 게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오르비에토에서의 서둘지 않는 '느릿느릿'의 여유를 가지는 삶의 가치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느림의 미학과 긍정의 힘

응회암 절벽 위에 세워진 요새도시 오르비에토는 성벽으로 둘러 쌓여있다. 성벽의 성문이다.
 응회암 절벽 위에 세워진 요새도시 오르비에토는 성벽으로 둘러 쌓여있다. 성벽의 성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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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비에토의 아름다운 성. 그 멋스러움에 마음이 끌린다.
 오르비에토의 아름다운 성. 그 멋스러움에 마음이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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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바위산 언덕 위의 작은 중세도시 오르비에토. 900년 된 고풍스런 성벽을 그야말로 느릿느릿 걸어봅니다. 성벽은 중세 영화에서 본 듯한 요새 같기도 하고, 새의 둥지 같기도 한 신비스러움이 느껴집니다.

잘 보존된 오르비에토 중세의 성곽길은 시간을 거꾸로 돌려놓은 것 같습니다. 느림의 미학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기면서 나도 몰래 어떤 삶의 모습이 행복한가를 잠시나마 생각합니다.

짙은 안개로 언덕 아래 마을과 먼 산하가 보이지 않는 게 아쉽습니다. 그래도 그 옛날 중세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새롭습니다. 여행 안내자가 앞서가며 손짓을 하며 말을 합니다.

"저기를 보세요! 유명한 산 파트리치오의 우물입니다. 안개에 휩싸여 잘 보이지는 않지만 유서 깊은 우물입니다."

안개 속에 휩싸인 유서 깊은 산 파트리치오 우물이다.
 안개 속에 휩싸인 유서 깊은 산 파트리치오 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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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게 드러난 원기둥 모양의 건물이 보입니다. 교황 클레멘스7세가 이곳이 적에게 포위될 것을 대비하여 판 우물이라고 합니다. 우물 안에는 이중의 나선형 계단이 248개나 둘러져 있고, 지금도 맑은 물이 고여 있다고 합니다. 바쁜 일정으로 가까이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다음 여정인 시에나로 이동하기 위해 우리는 버스에 몸을 싣습니다. 짙게 깔린 안개가 비로소 걷히기 시작합니다. 올려다보는 언덕 위의 오르비에토가 병풍처럼 아름답게 펼쳐집니다.

아래에서 올려다 본 오르비에토 도시.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모습이다.
 아래에서 올려다 본 오르비에토 도시.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모습이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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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 중 한 분이 아쉬움 섞인 말을 합니다.

"안개가 조금만 일찍 걷혀주지! 더 멋진 오르비에토 언덕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여행 안내자가 말을 받습니다.

"오르비에토의 장관을 맑은 날 맞이하는 사람은 많지만, 안개 속에서 차분히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볼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요!"

슬로우시티 느림의 미학과 긍정의 힘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2월 29일부터 1월 6일까지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태그:#이탈리아, #오르비에토, #오르비에토 두오모, #중세마을, #슬로우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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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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