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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어란 포구 전경. 어란진은 고대부터 한·중·일이 만나는 국제 해상로였다.
 해남 어란 포구 전경. 어란진은 고대부터 한·중·일이 만나는 국제 해상로였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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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8월 24일(양력 10월 4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어란포에 머물면서 본격적인 해상활동에 나섰다. 해상에서 기동 타격훈련도 했다.

이순신이 어란포구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일본군이 쳐들어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민심도 어수선했다. 이순신은 헛소문을 내고 다니는 두 사람을 잡아다가 군법으로 다스렸다. 어수선하던 민심도 안정을 찾았다.

어란진은 김 양식을 많이 하는 지역이다. 1970년대 지주식을 거쳐 부류식으로 발달했다. 전복과 굴, 톳 양식도 많이 한다. 인근 바다가 온통 양식장이다. '돈밭'에 다름 아니다. 주민들은 한때 삼치잡이도 많이 나갔다. 위로는 위도, 아래로는 청산도와 나로도까지 나가서 삼치를 잡았다.

그때는 무역선도 무시로 드나들었다. 삼치파시도 열렸다. 어촌마을 사람들이 큰소리를 치며 살았다. 개도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어란포 만호진성의 흔적. 석축이 민가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어란포 만호진성의 흔적. 석축이 민가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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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란포구는 고대부터 한·중·일이 만나는 국제 해상로였다. 제주도 해로와 조운로의 중간 기착지 역할도 맡은 중요한 포구였다. 진(鎭)도 빨리 설치됐다. 1409년(태종 9년)이었다. 왜구를 방어하고 세곡 징수와 운반 등을 위해서였다. 여기에는 수군만호가 머물렀다.

지금도 마을에 만호진성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석축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일부 민가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어란초등학교 앞 마을회관에 당시 수군만호들의 불망비도 남아 있다.

해남 어란 마을회관 전경. 어란진 포구의 어란초등학교 앞 마을에 있다.
 해남 어란 마을회관 전경. 어란진 포구의 어란초등학교 앞 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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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 만호들의 불망비. 어란 마을회관 앞에 줄지어 있다.
 수군 만호들의 불망비. 어란 마을회관 앞에 줄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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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어란 앞바다에 머물고 있던 8월 26일이었다. 저녁 나절에 일본군의 움직임을 파악하러 간 첩보군관 임준영이 말을 타고 달려 왔다. 임준영은 말에서 내리자마자 "적선이 이진에 이르렀다"고 했다. 조선수군은 그때까지 함대를 움직일 사공인 격군과 기구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을 다잡았다.

임준영으로부터 적선이 이진에 도착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이틀 뒤였다. 새벽 어스름한 무렵에 일본군이 탄 왜선 여덟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과 왜선과의 첫 만남이었다.

갑자기 적선이 나타나자 수군들이 겁을 먹었다. 이순신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깃발을 들었다. 적선이 좀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적선이 바짝 다가오자 이순신은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적을 따라가 잡으라고 명령했다.

어란 앞바다 풍경. 바다에서는 전복과 굴, 톳 등을 양식하고 있다.
 어란 앞바다 풍경. 바다에서는 전복과 굴, 톳 등을 양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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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선은 바로 뱃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선수군은 쫓고, 적선은 달아나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조선수군은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땅끝마을 갈두까지 쫓아갔다. 도망가던 적선이 눈에서 더 멀어지자 추격을 멈췄다. 혹여 있을지도 모를 함정도 우려했다. 적선은 일본군의 본대가 있는 방향으로 줄행랑을 쳤다.

첫 번째 해상추격전에서 적선을 쫓은 조선수군은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이날 밤 장도(노루섬)로 옮겼다. 장도는 진도 벽파진에서 가까운 섬이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8월 29일 아침, 더 안전한 벽파진으로 옮겨갔다. 이순신은 벽파진에 머물면서 수군의 기동훈련과 타격훈련을 지휘했다. 열세한 병력으로 어떻게 일본군을 물리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골몰했다.

이순신은 명량대첩을 위해 9월 15일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겨가기 전까지 이곳 벽파진에 머물렀다. 벽파진은 명량대첩의 현장인 울돌목과 아주 가까운 포구다.

암반에 세워진 명량대첩비. 숙종 8년에 전라우수영의 동문밖에 세운 비석이다.
 암반에 세워진 명량대첩비. 숙종 8년에 전라우수영의 동문밖에 세운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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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영 마을의 한가운데에 있는 방죽샘. 당시 수군들이 먹는 물로 이용했다는 우물이다.
 우수영 마을의 한가운데에 있는 방죽샘. 당시 수군들이 먹는 물로 이용했다는 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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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벽파진으로 옮겨가는 사이,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 재건로는 우수영을 거쳐 진도대교로 간다. 우수영은 전라우도 수군절제사가 주재하는 병영이 있었다고 붙은 지명이다. 관할구역은 해남과 진도를 비롯 나주, 영광, 함평, 무안, 영암까지였다. 어란진, 고금도, 신지도, 목포진, 법성포, 흑산도 등 19곳을 속진으로 관리했다.

우수영성도 장대했다. 성의 영역이 남북 10리, 동서 5리에 이르고 석축의 둘레도 3843척이나 됐다. 성터의 흔적도 군데군데 남아있다. 마을 한가운데에 방죽샘이 있다. 당시 수군들이 먹는 물로 이용했다는 우물이다. 정교하게 깎은 돌기둥을 육각형으로 세워 튼튼해 보인다.

암반에 세워진 명량대첩비도 만난다. 1688년(숙종 8년) 전라우수영의 동문밖에 세웠던 그 비석이다. 비석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따라 명량대첩비가 강제 철거돼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해방 이후 주민들이 다시 옮겨 왔다. 명량대첩비 주변이 당시 우수영의 성터였다.

누각 부근에 돌과 흙으로 쌓은 성벽의 흔적도 조금 남아있다. 바닷가에 접한 우수영성의 남쪽은 크고 작은 돌로 틈틈이 쌓은 석성이다. 북쪽은 흙으로 빈틈없이 쌓아올린 토성이다.

우수영 마을 풍경. 전라우도 수군절제사가 주재하는 병영이 있었다는 곳이다.
 우수영 마을 풍경. 전라우도 수군절제사가 주재하는 병영이 있었다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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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영항 전경. 진도대교 쪽에서 본 풍경이다.
 우수영항 전경. 진도대교 쪽에서 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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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고증 및 기초조사(전라남도), 이순신의 수군재건 활동과 명량대첩(노기욱, 역사문화원), 명량 이순신(노기욱,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등을 참고했습니다. 지난 11월과 12월 두 차례 답사했습니다.

이 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어란진, #우수영, #이순신, #조선수군재건, #명량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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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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