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비슷했지만 이제는 정반대의 모습이 된 두 나라가 있다. 대한민국과 부탄이다. 1970년, 두 나라의 1인당 GDP는 부탄 212달러, 한국 255달러로 별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2016년, 경제성장에 사활을 걸어온 대한민국은 GDP 3만 달러 시대를 목전에 두면서 부탄과의 격차를 10배 이상으로 벌렸다. 그러나 국민행복에 대해서라면 상황은 금세 역전된다. 부탄은 늘 최상위권에 속하는 반면, 한국은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민소득보다 국민행복을 우선시한 부탄의 완승이다. 1729년에 제정된 부탄 법전은 말한다. "정부가 백성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이렇듯 부탄은 인본주의 국가다.
최근 연일 떠들썩하게 터져 나오는 위안부 합의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실망감을 목도하고 있노라면, 행복한 나라 부탄이 자꾸 떠오른다. 부탄은 대한민국 정부가 위안부 합의에 있어 빠뜨린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졸속으로 처리된 위안부 합의 내용의 요지는 이것이다. 일본에게서 100억 원의 기금을 받고, 사과인 듯 사과 아닌 사과를 받은 것으로 양국의 우호관계를 재정립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풀어서 설명하자면 위안부의 산증인인 '사람'들을 배제하고, 대한민국 경제와 국가의 번영을 위한 더 큰 이득을 향해 물꼬를 트겠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번 위안부 합의에는 철저하게 자본과 성장의 논리만이 작용했을 뿐, 사람은 없었다. 국가의 번영이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면 OECD 국가 자살률 1위의 오명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번 합의가 대승적 차원의 합의였다는 정부의 호소도 납득하기 힘들다. 최근 공개된 <일한 국교정상화 교섭의 기록>이 1965년 한·일 협정은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것이었음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번 위안부 합의도 다르지 않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미일 공조가 시급한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해빙무드를 누구보다도 바라고 있었다. 따라서 정부가 역설하는 대승적 차원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그것이 우리나라 국민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닌, 강대국의 눈치를 보기 위한 것이었음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이번 위안부 합의는 우리나라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의사결정의 결과였어야 했다. 정부는 미국과의 논의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심경을 최우선으로 고려했어야 했다. 그러나 정부가 한 일은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야 외교부 차관 몇 명을 보낸 것이 전부다. 처음부터 끝까지 과오는 반복됐다. 경제 정책 하나를 입안할 때도 국민 행복에 미칠 영향을 다각도로 고려하는 부탄의 모습과, 모든 과정에서 사람을 배제하는 대한민국이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물론 그동안 수많은 역사 속에서 대한민국은 강대국들의 이권 다툼에 놀아나며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력만을 탓하다간 앞으로 닥쳐 올 독도 주권 문제와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문제마저 악순환의 고리를 밟게 될 공산이 크다. 강대국과의 관계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국가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확립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단호한 모습을 보여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대승적 차원에서 국민이 자긍심을 갖고 행복해할 수 있는 미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과거사 반성록 <과거의 죄>의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죄라는 것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더불어 끊임없이 미래에도 되살아난다고 역설했다. 이번 12·28 한일 위안부 합의가 어물쩍 과거의 상흔을 덮었다고 해도, 그 상처는 언제라도 다시 곪아터져 나올 수 있다. 우리가 과오를 끝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위안부 연구의 1인자로 꼽히는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한 이번 합의를 백지화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밝힌 점은 고무적이다. 일본의 역사학자마저 이번 위안부 합의의 무용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이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열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