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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하나도 키우기 힘든 세상에 둘이나 낳아 고생입니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편하게 싸울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은 건강한 삶을 사는 데 가장 중요하죠. 잘 싸워야 잘 커요. 질투하고 미워하고 주먹을 날려도, 비난 받지 않는 관계가 형제 말고 또 있나요."

그러나 이런 생각과는 달리 막상 싸움이 벌어지면, 먼저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막을 찌르는 울음바다의 음향효과와 자지러지는 액션까지,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악을 쓰며 자기 마음을 알아달라고 칭얼거리는 격한 몸부림에 엄마의 체력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이성적인 여유를 갖고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엄마의 입에서는 이 모든 불씨를 잠재울 괴성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 그림책에 등장하는 개구쟁이 오빠와 깍쟁이 여동생은 틈만 나면 싸웠다. 종일 티격태격 다투는 아이들 때문에 화가 난 엄마가 말했다.

"둘이 같이 나가서 사이좋게 놀다 와! 점심 때까지 들어오지 마."

어렸을 적 이 그림책을 너와 함께 같이 봤을 땐, 나만 그런 건 아니지 하는 묘한 동질감이 위안으로 다가오곤 했다. 오랜 만에 다시 들춰본 그림책 속에서 발견한 낯익은 말! 답답한 속이 뻥 뚫리는 듯 했다.

그런데 요즘엔 도통 그 화법을 써먹을 수가 없었다. 마른 하늘에 내려질 날벼락을 다시 맞을 각오가 아니라면, 함부로 사용할 순 없었다.

"엄마는 아빠랑 싸우고 나서 사이좋게 얘기할 마음이 생겨?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닌데, 왜 자꾸 가르치려고만 해? 그러니까 어른들이 하는 말을 잔소리라고 하는 거야. 실행 가능한 말이어야 들어줄만 하지, 안 그래?"

엄마의 마른 하늘에 몰아치던 날벼락의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너의 야무진 반격에 엄마는 넋을 잃어버렸다. 엄마의 충고도 뭉개버릴 만큼 너의 생각은 예상 외로 논리정연 했다.

그날도 동생과의 말다툼으로 집안은 어수선했다. 더 이상의 혼란은 두고 볼 수가 없어 교통정리를 하려고 방문을 나섰다. 여드름 난 네 얼굴을 골려먹는 동생을 향해 불시에 날아든 너의 주먹은 아직도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형이니까 먼저 네가 다가가서 얘기 해보라고 권하려던 참이었다. 엄마는 분명 권한 것이었는데, 너에겐 지속적인 강요처럼 들렸던 것일까.

세월이 바뀌었으니, 싸움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져야 할 텐데. 여전히 엄마는 뭔가를 일러주기에 다급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나 보다. 억지로라도 서로 사과의 말을 주고 받아야 마음이 편해지는 방식에 길들여진 탓일까.

손가락을 가리키며 방향을 일러주는 그림책 속 엄마의 모습에 자꾸 눈길이 쏠렸다. 그림책 속의 방법은 아이들에게 다른 형식의 강요였다. 부모라는 권위를 내세워 무조건적인 순종만을 바라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었다. 부모가 내미는 화살표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뿌리 깊은 저 도도한 이상향. 인간이 깨달아야할 진실, 도덕적인 규범. 왜 그런 것들이 눈앞에 먼저 떠오르는지 자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상처 입은 아이의 가슴보다 이 상황을 수습하고 싶은 의욕이 지나치게 앞섰다.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그토록 아름다웠던 기억은 엄마에게도 없는데. 당장 화해하라니, 이 억지스러운 도덕이 뭐 그리 인간적일까.

밖으로 쫓겨난 두 남매는 우연히 작은 터널을 발견했다. 오빠는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오빠를 찾아 동생은 울상을 지으며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터널 속은 컴컴하고, 축축하고, 미끈거리고, 으스스했다.

터널 밖으로 나오자 돌가루를 뒤집어 쓴 오빠의 동상이 보였다. 동생은 본능적으로 오빠를 와락 껴안았다. 동생의 따뜻한 체온이 닿자 돌가루가 부서졌다. 얼굴을 되찾은 오빠가 말했다.

"로즈! 네가 와 줄 줄 알았어."

돌가루를 녹일 수 있는 건 따뜻한 체온뿐이었다. 그 따뜻함은 오빠와 동생이라는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오빠가 아니었다면, 음침한 동상 따위에 마음이 흔들리진 않았다. 두 남매는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마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다정한 사이로 변했다.

터널을 지나온 두 사람은 그 전과는 달라졌다. 그림책 속 엄마는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우연한 일치로 불거진 결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 우연에 기대어 지금 풀어놓으려는 이야기 역시 다른 억지일 테지만, 이 기회에 솔직히 전하고 싶구나.

앤서니 브라운 / 장미란 / 논장
▲ <터널>의 겉표지 앤서니 브라운 / 장미란 / 논장
ⓒ 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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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세상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방법

사실 엄마도 아직 숙제를 하는 중이란다. 아직도 진실 앞에서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단다.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아름다운 가치 앞에서 수없이 길을 헤매었지만,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제야 겨우 피부로 체감했을 뿐이다.

싸우고 화해하는 일이 엄마라고 수월할까. 싸우지 말라고 잔소리 하는 엄마에게도 오늘 밤 아빠와 싸울 일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이럴 때 한 이불을 덮고 자야 한다는 말을 되새기지만, 싸늘해진 가슴만은 어쩔 수가 없다.

인간에게는 어떤 상황에서 문득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 그렇게 살지 못해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아름다운 문장들이다. 닳고 닳아 기억에 각인시켜도 될까 말까한 실로 힘에 벅찬 진실들이다. 미움보다 사랑을 실천하며, 남보다 자신을 탓하며 사는 일이 불혹의 나이에도 어렵기는 여전하다.

평생을 살아도 누군가와 화해하는 건 정말 어렵다. 그런데 너에게 화해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부드럽게 말하지 못하는 건, 일종의 자격지심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자식 앞에서 부모는 커다란 나무이고 싶다. 어떤 비바람이 몰아쳐도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하는 튼튼한 뿌리를 가진 나무.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른이라고 모두 완벽한 인간일 수는 없는 법. 그 길을 먼저 걸어왔을 뿐, 미래에 대해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사춘기의 부모 마음 역시 겪어봐야 알 수 있었다. 직접 부딪쳐봐야 알 수 있는 건 자식이나 부모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부모는 자식의 인생에 어떤 화살표를 걸어주는 사람도 아니고, 인생의 정답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부모의 억지 협박에 쫓겨난 두 아이 앞에 나타난 터널. 우연하게 맞닥뜨린 터널 앞에서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아름다운 화해를 이루었다.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작은 터널 안에서 이런 목소리가 새어나오는 듯 했다.

"세상에는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터널이 있습니다. 부모들이여, 당신들의 조급한 성질을 잠시 미뤄두고, 세상의 곳곳에 숨겨진 터널을 바라보세요. 부모들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스스로 터널을 잘 통과한답니다."

우리의 현실은 항상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돌가루를 뒤집어쓰고 차가운 동상이 되어버린 아들을 어느 부모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아이들은 그런 놀라운 마법도 풀어낼 만큼 놀라운 비밀을 간직한 아이들이다. 부디 믿어보시기를. 작은 터널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이었다. 조금 서툴고 불안하게 보여도 세상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방법쯤은 능히 알고 있는 아이들이다.

넌 지금 사춘기의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다. 돌가루를 뒤집어 쓴 네 마음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터널 속에 갇힌 이 고립의 상태가 두렵지만, 삶은 동굴이 아니라 길이 되기 위해선 터널을 지나가야 한다니. 터널 끝은 새로운 길이다. 터널 속을 천천히 걸어가는 너의 발걸음을 믿을게.

덧붙이는 글 | <터널> 앤서니 브라운 / 장미란 / 논장 / 값 9000원



터널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장미란 옮김, 논장(2018)


태그:#사춘기,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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