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지금 행복하니?" 거울 앞에서 물었다. 이 질문의 답은 '사표'였다. 배낭을 멨고, 지구를 한 바퀴 돌겠다며 길을 나섰다. 좌충우돌 세계일주 여행기를 연재한다. - 기자 말
[이야기 1] 시작에 불과했던 중국버스 여행따리에서 리장으로 향하는 길 위에선 즐거운(?) 긴장이 계속됐다. 20명 정원의 작은 미니버스. 외국인은 나 혼자였다. 배낭을 메고 버스에 올라타자 나시족 버스안내양이 활짝 웃어 준다. 버스안내양을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건지 신기하기만 했다. 돈도 받고, 자리 안내도 해주고, DVD도 틀어준다. 안내양이 하라는 대로 배낭을 앞쪽에 두고 자리를 잡았다.
따리 고성을 출발한 버스는 얼하이 호수 주변을 달리기 시작했다. 호수 주변 경관을 감상하며 여유롭게 버스여행을 즐겼다. 우리나라의 시골버스 같은 분위기는 여행 기분을 한껏 돋웠다. 가까이서 현지인들의 표정을 살펴볼 수 있는 것도 장점이었다.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긴장을 풀어주었다. 더없이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30분 정도 순조롭게 달리던 버스가 반대편 차선 방향으로 불법 좌회전을 한 뒤 멈춰 섰다. '벌써 휴게소인가?' 승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차량이 진입한 곳은 차량정비소였다. 하나둘 승객들이 버스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나시족 안내양은 나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나름 외국인을 위한 특별서비스였다.
"팅부똥."중국에 온 뒤 중국어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많아 '알아듣지 못한다'는 의미의 중국어는 확실히 배워두었다. 안내양은 버스 기사를 불렀다. 버스 기사는 놀랍게도 영어를 할 줄 알았다. 그는 차에 문제가 있으니 10분만 기다리라고 했다.
수리를 마친 버스는 이때부터 고속 'S'자 운전을 시작했다. 왕복 2차선 도로에서 앞지르기가 계속됐다. 영화 <스피드>가 연상되는 현란한 운전이었다. 버스의 움직임은 결코 '만만디'가 아니었다. 따리에서 리장까지 전 구간을 곡예운전으로 달렸다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필시 이건 조향장치 문제로밖에는 볼 수 없는 운전이었다. 차량정비소에서 정비를 잘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운전기사는 시도 때도 없이 과감하게 가속페달을 밟으며 반대편 차선을 질주했다. 버스는 검은 매연을 쉼 없이 내뿜고 있었다. 공포의 질주였다. 반대편에서 마주 오던 차들도 성난 버스를 보곤 알아서 속도를 늦추었다. 버스가 트럭을 추월하는 것은 예삿일이고 심지어 3000cc 이상의 대형 승용차까지... 거침이 없었다. 진땀이 났다. 한 번 좁아진 미간은 그대로 굳어갔다.
절체절명의 순간을 수차례 맞았지만 승객들은 천하태평이었다. 대부분 잠을 자거나 입속에 과자를 털어 넣고 있었다. 배낭을 끌어안고 곡예 부리는 버스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건 나밖에 없었다. 대국(大國)다운 면모였다. 이 상황만 놓고 보면 F1 드라이버로 중국인이 채용될 날도 멀지 않은 듯했다.
얼하이 호수를 빠져나오자 길은 산으로 이어졌다. 버스는 산비탈에서 교통체증으로 멈춰 섰다. 난 한숨을 돌렸다. 길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비탈길에서 30분 이상 발이 묶였다. 승객들 모두 중국산 청심환을 하나씩 먹은 듯 '절대 안정' 상태를 유지했다. 누구 하나 밖을 내다보지도 않았다. 서서히 버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문제를 일으켰던 길목엔 중국군 탱크가 서 있었다. 승객들은 이런 상황이 신기한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군사훈련 구간을 빠져나오자 앞자리 아저씨는 창문을 굳게 닫아 놓은 채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옆자리 청년은 그나마 창문을 열고 미안한 척 피는 게 양심은 있어 보였다. 가만 보니 버스 기사도 담배를 물고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흡연자들의 천국이면서 비흡연자들의 지옥이었다.
"풉." 어이가 없으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버스에서 잠을 잔다는 건 불가능했다. 스쳐지나가는 차량들 중 상당수는 매연저감장치를 고철상에 팔아 치워버린 듯 시커먼 매연을 뿜어댔다. 거기다 흡연버스. 목이 아픈 게 당연했다. 아찔한 곡예운전은 계속됐고, 중간 중간 승객들이 타고 내렸다. 자리가 없으면 통로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한 아주머니는 버스 안에 놓인 휴지통을 뒤집어 의자로 썼다. 맥가이버도 울고 갈 응용력이었다.
그렇게 재미있고 황당한 버스여행의 끝에는 리장의 상징 '옥룡설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한 건 죽지 않고 리장에 도착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화장실에서 난 혈변을 보았다. 리장의 해발고도는 대략 2400m다. 벌써 고산증이란 말인가. 고산증이 혈변을 일으킨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 그럼 5시간의 긴장이 피똥으로 연결됐다는 말인가. '휴~~~' 긴 한숨을 토해냈다.
여행 정보 |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소수민족은 총 56개로 이 가운데 나시족도 속해 있다. 운남성은 '민족의 용광로'로 불릴 만큼 수많은 소수민족이 살아가는 곳으로 이족, 장족, 회족, 백족, 태가족, 경파족 등 26개의 민족이 어울려 살아간다. 나시족도 이곳을 삶의 본거지로 삼고 있다.
나시족의 종교는 다신교 신앙인 동파교로, 동파경이라는 경전을 대대손손 이어가고 있다. 일부 나시족은 장전불교를 믿는다.
이들은 예로부터 전해온 나시어와 함께 동파문이라는 문자를 함께 쓰고 있다. 동파문은 전 세계를 통틀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유일한 상형문자다. 나시족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가족을 형성하는 모계사회이며 인구는 약 30만 명에 이른다.
|
[이야기 2] 차마고도 절대 비경 호도협과 마주하다"앗! 이 길이 아니었어!"한 번의 실수가 모든 계획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트레킹으로 한껏 기분이 들떠 있어야 했지만, 더위를 먹은 강아지처럼 헐떡이며 기진맥진한 몸을 추스르기 바빴다. 호도협을 그냥 포기하고 샹그릴라로 갈까도 생각했다. 그날의 역경은 이렇게 시작됐다.
리장에서 2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호도협 트레킹의 시작점인 차우토우에 도착했다. 버스 기사는 승객들에게 입장료로 65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버스는 가던 길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승객들을 내려줬다. 버스에서 내리자 말몰이꾼들이 몰려들었다.
"제인? 제인?"한 말몰이꾼이 손짓으로 오르막길을 가리켰다. 대부분의 트레커들은 차우토우 입구에 위치한 제인 게스트하우스에 큰 배낭을 맡겨 놓고 필요한 짐만 챙겨 호도협 트레킹을 시작한다. 물론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게스트하우스의 위치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승객들이 어디로 가는지 확인한 뒤 뒤늦게 오르막을 따라 올랐다.
등에는 17kg짜리 배낭이, 가슴에는 5kg짜리 작은 배낭이 매달려 있었다. 고행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얼굴은 땀범벅이 됐다. 말몰이꾼은 옆에 바짝 붙어 나를 계속 따라왔다. 말을 타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먼저 가라고 손짓해도 절대 먼저 가는 법이 없었다. 거머리처럼 부담스러운 존재들이었다.
산길을 아무리 올라도 제인 게스트하우스는 보이지 않았다.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20분 정도 산을 올랐을까. 지나가던 한 금발 미녀가 내 행색을 보더니 어디를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난 제인 게스트하우스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순간 그녀의 동공이 확장됐다. 곧이어 그녀가 불길한 얘기를 내뱉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불행하게도 맞아떨어졌다.
"버스에서 내려 반대쪽으로 내려가야 제인 게스트하우스인데... 길을 잘못 들었어!""뭐!"순간 화가 치밀었다. 말몰이꾼의 손짓 한 번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셈이었다. 발길을 다시 돌리니 나를 졸졸 쫓아오던 말몰이꾼은 빈정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내 곁을 떠나갔다. 다리 힘이 풀렸다. 그날따라 햇살은 파스처럼 따가웠다. 그때 승용차 한 대가 내려오는 게 보였다.
"차우토우! 차우토우!"
동물적이면서 간절한 외침이었다. 여행 중 첫 번째 히치하이킹이기도 했다. 거의 차를 막다시피 결사적으로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불행하게도 막아선 차는 호도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벤츠였다. 나 같은 배낭여행자를 구원해 줄 차량으로는 너무 고가였다. 그런데 천운이었다. 차 주인은 내 행색을 보더니 두말없이 차에 타라고 했다. 그는 샹그릴라로 가는 길이면 태워주겠다고 했다. 이 얼마나 달콤한 제안인가.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벤츠를 타고 샹그릴라까지 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얄미운 말몰이꾼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세계일주 중 첫 번째 트레킹이라는 의미가 머릿속에서 충돌하기 시작했다. 판단을 내려야 했다. 내가 아무리 경박하고 새털 같은 남자라고는 하나 계획은 계획이었다. 이 정도로 산을 포기하면 앞으로 내 여행은 동남아를 벗어나지 못할 게 뻔했다. 호도협을 벤츠와 바꿔먹을 순 없었다. 눈앞에 엄청난 스케일의 협곡이 날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벤츠는 순식간에 날 제인 게스트하우스에 데려다 주었다. 차 주인은 어설픈 영어로 다시 한 번 샹그릴라로 가는 길이면 태워주겠다고 했다. 입맛을 다셨지만 거기까지였다. 치명적인 유혹을 뒤로하고 제인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맡기고,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국수를 주문했다. 가장 일반적인 국수를 달라고 했는데 내 입맛에는 울트라스페셜 국수였다. 주문을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수를 거의 다 남기고 빈속에 왔던 길을 다시 가야 했다. 원점이었다. 말몰이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손상된 동영상 파일이 똑같은 영상을 반복해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오늘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말은 타지 않으리라!' 말몰이꾼에게는 한 푼도 주고 싶지 않았다. 호도협 트레킹 중 가장 힘들다는 28밴드. 스물여덟 번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길은 말의 넓은 등판이 가장 매혹적인 자태로 다가오는 곳이다. 28밴드에서 8월의 막바지 더위를 먹은 강아지처럼 헐떡이고 있는 날 보고 말몰이꾼은 계속 말에 타라고 손짓했다.
그럴 때마다 난 가격을 물었고, 가격을 얘기해 주면 난 준비된 대사인 "NO"를 외쳤다. 소심한 복수였다. 보다 못한 말몰이꾼은 흙먼지를 날리며 내 옆을 냉정하게 스쳐 지나갔다. 몇 번의 휴식 끝에 오른 28밴드의 끝에는 멋진 포토존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포토존에는 '사진을 찍을 경우 5위안의 돈을 내야 한다'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었다. 경고판 한쪽에는 '한국인은 특별히 3위안으로 할인해준다'는 내용의 한국어도 보였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중국 정부의 정책이란 문구는 없었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현지인들의 얄팍한 상술이었다. 한 서양인 친구가 사진을 찍고 그냥 가려 하자 상인 한 명이 길을 막아서며 싸움이 벌어졌다.
트레커들은 대부분 1박 2일 코스로 이곳을 찾는다. 숙소는 보통 차마객잔이나 중도객잔을 많이 이용한다. 난 차마객잔에서 일본인 와타루(남성), 핀란드인 소피아(여성)와 한방을 썼다. 역시 도미토리는 편하지 않았다. 여행자의 면모를 갖추기에는 시간이 짧은 것 같았다.
불편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눈을 떴다. 마침 소피아도 눈을 떴다. 눈만 뜬 채 소피아와 인사를 나누었다. 잠시 뒤 소피아가 이불 속에서 몸을 빼냈다.
'헉!' 소피아는 북유럽 처자답게 팬티와 가슴가리개 차림으로 당당히 방안을 휘젓고 다녔다. 난 조용히 이불을 끌어올려 다시 자리에 드러누웠다. 넥타이 대신 배낭을 메고 바라본 세상은 낯설기만 했다.
여행 정보 |
호도협은 호랑이가 다니는 협곡이라는 뜻으로 강의 상류와 하류 낙차가 170m에 달한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협곡이 바로 이곳이다. 호도협 트레킹의 최고 해발고도는 2800m다.
합파설산과 옥룡설산 사이로 진사강(금사강)이 굽이쳐 흐르는 모습은 가히 압권이라 할 수 있다. 16km에 달하는 협곡은, 운남성에서 차를 싣고 티베트로 가던 마방들의 옛길이다. 차마고도는 시솽반나에서 따리~리장~샹그릴라를 거쳐 라싸로 이어진다.
일반적인 1박 2일 코스로 호도협 트레킹에 나섰다면 차마객잔과 중도객잔에 여장을 풀게 된다. 만약 3~4명 정도 일행이 있다면 차마객잔에서 닭백숙을 꼭 먹어보길 권한다.
|
[이야기 3] 세계일주 시작 즈음...
출근 마지막 날이었다. 책상을 정리하고 텅 빈 자리를 사진으로 남겼다. 빈자리가 주는 허망함과 허전함을 기억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간 정도 들었겠지... 세계 일주를 떠나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울 것 같은 일을 남들 보기엔 쉽게 마쳤다.
사표를 낸 나는 홀가분했지만 개중에는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로서는 여행이란 낯선 목적, 그게 어색한 헤어짐을 만든 것 같다. 모두 날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회사에선 몇 개월의 휴직을 제안했다. 지금까지 이 직장에서 몇 개월씩 휴직을 쓴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내 기억에는 없었다.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첫 번째 장기휴직자가 되는 셈이다. 몇 개월을 쉬고 난 뒤엔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워커홀릭'이 돼 있을 게 뻔했다. 쉼표 끝엔 결국 다른 '올무'가 기다리고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인생의 불확실성을 믿어보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 흔한 연월차도 한 번 못 써봤다. '휴직'은 내게 특별대우였고, 그 느낌이 너무 싫었다. 또 몇 개월의 휴직으로 될 일도 아니었다. 박수는 못 받더라도 웃으며 떠날 수 있길 소망했다. 내가 가진 욕심의 전부였다. 그렇게 여행이 시작됐다. 그리고 보름의 시간이 흘렀다. 배낭도 등산화도 마음조차도 아직 모든 게 어색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내게 자연스레 반문했다.
"정말 이렇게 여행을 해도 되는 걸까?"회사에서 찾는 전화도 없었고, 마감을 맞출 일도 없었다. 난 빈둥거렸고 한량의 삶은 나를 반겨줬다.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꼼짝하지 않고 숙소를 지켰다. 내일의 고민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을 이렇게 접근해도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닭장 같은 서울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리고 불안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작은 사무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