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는 창은 참으로 다양하다. 누구는 뉴스를 통해, 누구는 책을 통해, 누구는 종교를 통해, 누구는 SNS를 통해, 또 누구는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송문호(68, 충남 예산군 예산읍)씨는 16살 때부터 지금까지 50년 넘게 우표를 통해 세상을 만나왔다. 성인남자 엄지손톱만한 2×2.5㎝크기 종이 안에는 정치와 경제, 문화, 역사, 인물, 자연 등이 모두 담긴다. 그해의 가장 중요한 사안이 무엇이었는지, 굳이 신문을 들춰보지 않아도 사방 요철무늬의 초미니 종이인쇄물만 보면 알 수 있다.
"이것 좀 봐요. 이게 다 우표책이요. 1년에 한권씩은 넘지. 이것만 보면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취임연도가 언제였는지, 어떤 국가원수들이 방한을 했는지, 그해 올림픽은 어디에서 열렸는지, 인간이 달에 첫 착륙한 해, 우리나라가 WTO에 가입한 해가 언제인지 다 알 수 있어요."서재 한쪽 벽면을 꽉 차게 차지하고 있는 우표수집파일과 액자 등을 보여주는 송문호씨의 목소리가 한껏 들뜬다.
"대통령 취임 때마다 기념우표가 나왔는데, 윤보선 대통령 때 딱 한 번 안 나온 적이 있어요. 왜 그런지 알우? 당시 내각제였기 때문에 대통령 권한이 약했고, 그만큼 취임 의미도 약화된 거지."그렇구나, 이 조그만 종이 속에 담긴 한국정치사라니.
"그것 뿐이 아녜요. 우표는 상식도 넓혀주지. 아마 40, 50대들은 어렸을 때 이 우표 다 봤을텐데, 이것 좀 봐요. 꽃시리즈, 새시리즈. 그리고 전통음식시리즈, 염료식물시리즈에 아이돌시리즈까지 있다니까. 또 뭘 보여줄까?"그러고 보니 우표를 통해 물가의 흐름도 읽을 수 있겠다. 송문호씨가 처음 우표수집을 시작한 1964년에 4원이었던 표준우표 가격은 7원, 10원, 20원, 30원, 60원, 100원, 130원, 150원을 거쳐 현재 300원까지 올랐다.
우표책자 속에 50여 년 세상사가 다 담긴 듯 자랑스러워하는 송문호씨의 자긍심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서울까지 가서 사온 적도
매년 초, 송문호씨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우정사업본부의 우표발행계획표를 확보하는 것이다(우표수집가가 아닌 사람에게는 이런 계획표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는 혹여 계획표를 분실할까 코팅까지 해두고, 새 우표 발행일 첫날 아침 일찍 우체국으로 달려간다.
"어느 핸가는 일찍 갔는데도 다 떨어져 서울 남대문에 있는 중앙우체국까지 가서 산 적도 있어요. 그것 뿐이간? 당초 계획에 없던 기념우표가 갑자기 발행되는 일도 있어서 우표발행 관련 기사도 챙겨 봐야 해요. 예를 들면 재작년에 교황님 방문 때 특별 기념우표가 나왔는데, 이런 기념우표 놓치지 않고 사면 기분 좋죠."어려서는 용돈을 쪼개 사다보니 1종에 4장 사는 게 최고였지만,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는 명판(수집가들을 위해 4장씩 묶은 것)이나 시트(디자인을 더해 1장 짜리를 크게 만든 것), 전지(16장~60장짜리 한판)까지 원없이 샀다.
"어느 달엔가는 우표 사는데 20만 원이나 써 아내한테 혼나기도 했지."고가에 거래되는 희귀본 우표도 팔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우표사랑이 유별난 그이지만 우표선물하기는 즐긴다. 역대대통령 취임기념우표, 국빈방문우표, 올림픽 참가기념우표 처럼 주제별로 다시 분류해 만든 우표액자는 돈주고 살 수 없는 특별한 선물이 되곤 한다.
소인이 찍힌 우표는 더 귀하다고 한다. 다만, 누가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지 알 수 있도록 봉투째 보관하는 것이 원칙이란다. 예산군 공무원으로 퇴임한 송문호씨는 내용물만 철하고 그냥 버려지던 봉투 가운데 의미있는 것들은 따로 수집했다. 개인적인 취미 때문에 시작한 일이 지금에 와서는 예산군의 행정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자료로 가치도 있어 보인다.
우표모으기가 국민 취미였던 시절, 온갖 공을 들여 집으로 배달돼 온 편지봉투에서 우표를 상처없이 뜯어내 비닐 덮인 전용 스크랩북에 꼽아 넣고 친구의 것과 비교하던 추억을 갖고 있는 세대는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됐다. 그리고 지금은 디지털통신의 발달로 우표값이 얼마인지 모르는 이가 더 많은 세상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표는 주제와 디자인에 대한 많은 고민 속에 발행되고 있다. 송문호씨에 따르면 1년에 40여 종의 우표가 발행된다고 한다. 지금까지 모은 우표가 몇 종이나 되는지, 우표수집책자는 몇 권이나 되는지 "세어보지 않아 모르겠다"는 그는 앞으로도 계속 이 취미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한다.
"자식들 뿐만 아니라 손주들도 내 우표책을 갖고 싶어하니 아마 대를 잇는 취미가 될 것 같죠?"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신문>과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