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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오래된 친구를 만나면 너는 왜 변한 게 하나도 없느냐며 남들이 들으면 웃지도 않을 소리를 서로 주고받게 됩니다. 보자마자 왜 이리 늙었냐고 면박을 줄 수는 없으니 그냥 하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잖아요. 추억 속 친구와 지금의 친구는 많이 달라진 만큼, 또 많이 같습니다. 오래된 친구에겐 유독 그 친구의 같음이, 변하지 않음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 아닐까요.

죽을 것 같던 십대를 지나

 책 표지
책 표지 ⓒ 창비
정세랑의 <이만큼 가까이>에 나오는 친구는 여섯입니다. 여자 넷, 남자 둘. 나, 주연, 송이, 수미, 찬겸, 민웅. 세기말에 십대를 함께 보낸 이 아이들은 이제 삼십대가 되었습니다. 책의 화자 '나'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십대를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세기말에 십대를 보내는 건 더 죽을 것 같은 경험이었다"고. 아이들은 죽을 것 같은 경험을 뚫고 어렵사리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말처럼 이들의 인생을 집약하는 단어는 '가까스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은 친구들의 현재 모습과 과거 모습을 교차하듯 보여줍니다. 현재 모습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건 영화미술 일을 하고 있는 '나'의 동영상입니다. '나'는 DSLR을 들고 다니며 틈만 나면 친구들의 모습을 영상에 담습니다. 저는 이 영상 속 친구들의 대화가 하나 같이 좋았습니다. 별 것 아닌 이야기지만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자체가 참 좋은 거니까요.

송이 잭 스나이더 광팬인  남자하고 만나면 골치 아픈 것 같아.
민웅 그게 누군데?
주연 <300> 감독.
찬겸 <왓치맨>은 나쁘지 않았고 <싸커 펀치>는 나빴지.
나    그보다 왜?
송이 내가 짧은 치마를 입은 날엔 되게 친절하고 별로 꾸미지 않은 날엔 반응이 없어.
주연 ...알 것 같아.
찬겸 그거야말로 시각적인 동물이구나. - <이만큼 가까이> 중에서

아이들의 고등학교 시절 배경은 파주입니다. 아직 신도시가 되기 전인 파주의 모습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허허벌판에 느닷없이 아파트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는 풍경을 상상해 보세요.

아이들은 집에서 나와 들판을 걸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합니다. 파주에서 일산으로 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의 유일한 통학 수단은 '망할' 2번 버스. 겨우 한 시간에 한대 꼴로 운행되는 2번 버스는 아이들의 증오 대상이지만, 그렇다고 안 탈 수도 없습니다. 버스를 타야 학교에 갈 수 있으니까요. 마치 십대를 거쳐야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여섯 명 아이들의 개성은 뚜렷합니다. 모두 정말 제 옆에서 살아 움직이는 친구들 같아요. 밉지 않은 엘리트주의자 찬겸이, 친구 중 가장 느슨한 성격의 민웅이, 쓰디쓴 말을 잘 하는 똑똑한 주연이, 자유로운 영혼 송이 그리고 '나' 그리고 친구들에게선 떠났지만, 본인의 아픔을 승화시킨 수미.

친구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현재의 모습과 맞물려 고르게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하지만 역시 독자의 가슴에 가장 깊이 다가 올 이야기는 '나'의 첫사랑 이야기 아닐까요. 회색 옷을 즐겨 입었던 주완이. 회색 옷만큼이나 흐릿한 안개처럼 아슬아슬하던 주완이. 주완이는 주연이의 1살 위 오빠입니다. 그런 주완이가 '나'의 첫사랑이 됩니다.

아련한 첫사랑을 지나

첫사랑은 다 이렇듯 아련한 걸까요. 주완이는 내내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모습으로 '나'의 옆에 있습니다. 주완이는 세상에 없는 것만 같아요. 학교도 가지 않고,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습니다. '나'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아요. 지금 이대로도 좋습니다. '나'하고만 '이만큼 가까이' 있는 주완이가 더 마음에 듭니다. 이러다 언젠가는 더 가까워지고 가까워져 "분리가 불가능한 사이가 될 거라고" '나'는 "음험하고도 창대한 계획을 세"워 봅니다.

주완이와의 설레고도 행복했던 나날들. 그런데 어느 날, 주완이는 뜻밖의 사고로 갑자기 죽습니다. '나'는 주완이의 죽음을 이겨낼 방법을 모릅니다. 슬픔을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이 사고에는 수미가 관련되어 있고, 또 무엇보다 주완이는 주연이의 오빠입니다. 주연이 앞에서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어요.

이후 '나'는 "죽은 것의 냄새"를 풍기는 여자애가 됩니다. 약간 미친 여자애가 됩니다. 이런 여자애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있습니다. 그 여자애는 그런 남자들에게 안기고 안기고 안깁니다. 충돌하듯이. 그리고 여자애는 이런 진단을 받습니다. 애도 장애. 애도를 정상적으로 하지 못해 이렇게 되었다고 하네요.

'나'가 애도 장애로  힘겨워할 때, 다른 아이들도 저마다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또 저마다의 방식으로 늪에서 빠져나옵니다. 늪에서 빠져나온 아이들 옆에는 언제나 그렇듯 친구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멀어지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는 친구들이지만 이내 다시 가까워지고 돌아오는 친구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들은 이제 그저 서로의 존재가 고마울 뿐입니다.

서로의 결점에 너그러워졌다. (…) 변화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변화를 요구하지도 직언을 하지도 않았다. 서로의 얕은 수와 비굴한 계산까지도 웃음으로 넘겼다. 못나면 못난 대로 살아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껏 멀어졌다가 다시 가깝게 되고 나서, 우리는 늘 서로의 안위를 걱정했다. - <이만큼 가까이> 중에서

어린 시절엔 책의 이 여섯 친구들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는 걸 좋아했습니다. 함께 몰려다니며 떡볶이 집도 가고, 영화도 보고, 마음에 안 드는 애 뒷담화도 까고, 비밀스러운 추억도 만들고요. 그런데 이렇게 같이 어울려 다니다 보면 유독 마음에 드는 친구가 한 명쯤은 생기지 않나요? 다른 애들도 다 좋은데,  그중 더 좋은 아이.

함께 어른이 된 아이들 이야기

전 이 소설 속 등장인물 중에 주연이가 제일 좋았습니다. 주연이는 여섯 친구들 중 가장 늦게 합류한 친구인데요. '나'는 주연이가 처음부터 딱 마음에 듭니다. 처음 보는 주연이는 웃지도 않고 비참한 얼굴을 하고 있었거든요.

'나'는 생각합니다. "웃어주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는 사람이라면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구요. 주연이는 웃고 싶을 때만 웃는 아이입니다. 아닌 건 아닌 거고, 굽힐 필요 없을 땐 굽히지 않습니다. 능력도 짱입니다. 촌철살인의 말도 서슴없이 하지요. 성질도 그만이구요.

약간 무서운 듯 하지만 저는 주연이 같은 친구가 옆에 있다면 매일매일 전화해 그녀의 칼같이 날카로운 세계관에 귀 기울였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친구가 마음은 제일 따뜻하거든요. 주연이는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아이입니다.

주연 내 생각에, 인간이란 종은 아주 가끔을 빼곤 좀처럼 아름답지 않아. 아름다운 생물이 아냐.
나    그럼 언제가 그 가끔이야?
주연 플래시몹을 할 때? 아주 성공적으로 플래시몹을 할 때 정도만. - <이만큼 가까이> 중에서

위의 대화를 보며 저는 그간 봤던 아름다웠던 플래시몹들을 떠올려봤습니다. 저절로 주연이의 말에 동의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고개를 한번 끄덕. 주연이는 또 인간에 대해 이렇게나 무지막지한 발언을 합니다. "내 생각에, 인간은 잘못 설계된 것 같아." 그리고 그 이유를 말하는데, 여기서도 또 고개를 한번 끄덕.

"소중한 걸 끊임없이 잃을 수밖에 없는데, 사랑했던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걸 이겨내도록 설계되지 않았어."

'나'가 친구들의 모습을 동영상에 담았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는지도 모릅니다. 소중한 순간들을 잃지 않기 위해, 혹 누군가가 죽더라도 그를 잊지 않기 위해, 그 많은 실연들을 이겨내기 위해서 말이에요. 지금은 가까이에 없을지라도 우리도 우리와 함께 어른이 된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그 친구들의 얼굴이 생각날 겁니다. 아, 첫사랑 그 아이도요.

덧붙이는 글 | <이만큼 가까이>(정세랑 /창비/2014년 03월 14일/1만2천원)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이만큼 가까이 - 제7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정세랑 지음, 창비(2014)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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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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